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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53)화 (53/161)

53화

“인사가 늦었구나, 아델리아.”

테오스는 체인 위로 손을 겹쳐 올리며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마음에 든다. ……고맙구나.”

“…….”

그러자 아델리아가 쑥스럽다는 듯이 귀 끝을 붉게 물들이고 뺨을 긁적였다.

“비, 비싼 건 아니었어요.”

“가격은 중요치 않다.”

그러면서 아델리아를 바라보는 테오스의 눈동자가 그윽해졌다.

마치, 이 선물에 담긴 아델리아의 진심을 알고 있다는 듯. 묵직하고 다정한 시선이었다.

누가 봐도 딸아이를 애정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항상 딱딱하고 무정하기만 하던 테오스는 온데간데없고, 딸아이를 걱정하고 작은 선물하나에 감동하는 아버지가 앞에 서 있었다.

‘역시,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어.’

근래 테오스가 다정해진 것 같다던, 그 착각이 사실은 착각이 아니었음을.

아델리아는 비로소 확신했다.

“아빠…….”

일곱 살의 아델리아가 알아차릴 수 없었던 그 감정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아빠는 항상 나를 저렇게 바라보셨는지 몰라.’

그것을 일곱 살의 아델리아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점점 덩치를 부풀렸던 오해가 그대로 굳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함께 있을 시간이 너무 부족했었지…….’

오해를 풀 시간도, 아빠의 진심을 알아차릴 시간도.

아델리아가 일렁이는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자. 테오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아델리아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아, 아빠?”

“얼굴이 붉은 것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것 같구나.”

아, 아니. 이건 다른 의미로…….

아델리아가 핑곗거리를 찾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쯧, 테오스가 혀를 차며 아델리아를 안은 채 소파로 걸어왔다.

그 모습에 놀란 것은 데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데릭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녀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망토를 왜 계속 입고 계시나 했더니.’

실내에 들어오면 즉시 망토를 벗어 놓던 테오스가, 오늘따라 망토를 벗지 않고 업무를 보고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그 혹시나가 역시나일 줄이야.’

데릭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잘 어울리십니다, 아버지.”

“…….”

큼. 테오스는 데릭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아델리아를 소파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자신도 맞은편으로 걸어갔다.

“데릭, 너도 와서 앉거라.”

“예, 아버지.”

“그리고.”

테오스가 소파에 앉으며 집사에게 말했다.

“그것을 가져오도록.”

“예, 각하.”

집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집무실을 나갔다가 빠르게 돌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아델리아 앞,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영롱하고 매끄러운 표면, 향긋하고 달콤한 향기, 누가 봐도 군침을 절로 삼킬 것만 같이 황홀한 자태.

푸딩이었다.

‘푸딩……?’

아델리아가 푸딩을 신기하다는 듯 내려다보자 테오스가 푸딩 접시를 들어 올렸다.

“시원하게 준비하라 일러 두었다. 먹어 보거라.”

“아……, 네.”

건네는 자세가 몹시도 자연스러워 아델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접시를 건네받았다.

‘내가 푸딩을 좋아하는 건 맞는데…….’

테오스의 집무실. 이 중후한 장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푸딩이 굉장히 낯설었다.

푸딩 말고도 집사 일렌드는 다양한 디저트를 내어와 테이블 위를 가득 채웠다.

‘아……. 아찔한 이 향기…….’

의아하게 생각하던 것도 잠시, 아델리아는 푸딩의 달콤한 맛에 금세 빠져들어 무아지경으로 퍼먹기 시작했다.

그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테오스가 데릭과의 이야기를 이어 갔다.

“황제께서 건강을 되찾기까지는 시일이 걸릴 것이다.”

황제가 깨어났으니 황태자는 황궁 폐쇄 명령을 거둬들여야 한다.

그렇게 황궁이 다시 열리면 곧장 귀족파 귀족들이 황궁으로 밀고 들어올 것이 자명했다.

“예, 그렇지 않아도 악시덤 대공 쪽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한동안은 계속 입궁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데릭의 말에 테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곧 티파티라고 들었다.”

그에 아델리아가 푸딩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네, 아빠. 로즈힐 후작가에서 열리는 티파티예요.”

“그래……. 한동안 황궁을 오고 가느라 집을 자주 비울 것 같은데…….”

테오스가 턱 끝을 만지며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응? 그거야 당연한 일인데, 뭘 저렇게 심각하게 말씀하시는 거지?

‘혹시 내가 티파티에서 사고라도 칠까 봐 그러시나?’

아델리아가 세 번째 푸딩 접시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테오스는 다시 데릭과 황제의 일을 의논했다.

한참 동안 아델리아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테이블 위 디저트를 먹어 치웠다.

테오스와 데릭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 테이블 위 디저트 접시도 대부분이 비워졌다.

“와, 그 많은 게 다 들어가? 그 작은 배에?”

“성장기 아이의 먹성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보자, 배가 아니라 머리끝까지 다 푸딩으로 가득 찬 거 아니야?”

데릭이 장난치듯 아델리아의 옆구리를 간지럽히자, 아델리아가 깔깔 자지러지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테오스가 말했다.

“아직 아픈 아이다. 심하게 굴지 마라, 데릭.”

“아버지, 이 먹성 좀 보세요. 어딜 봐서 아픈 아이라는 거예요?”

“못 먹는 것보다 낫지.”

테오스의 말에 데릭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그렇죠.”

집무실은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아델리아가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런 풍경이 낯설면서도 동시에 행복감을 느꼈다.

‘……잃고 싶지 않아.’

이 따뜻한 분위기, 듣기 좋은 웃음소리. 과거에는 알 수 없었던 이 충만함을.

두 사람을 담은 아델리아의 눈동자가 잔잔하게 흔들렸다. 그 순간.

데릭이 자신의 소매가 잘 보이도록 아델리아 앞으로 팔을 쭉 뻗었다.

“아!”

데릭의 소매에는 자신이 선물한 커프스 링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델리아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잘 어울리네?”

“아무렴. 누가 주신 건데.”

데릭이 자랑하듯 턱 끝을 치켜들었다.

-요즘 젊은 청년들 사이에서는 이런 화려한 커프스 링크가 유행하고 있습죠! 여인들의 시선을 한눈에 확 집중시킬 수 있는! 레노에르트 광산에서 생산되는 특급 다이아몬드!

가게 주인은 테오스의 사슬 말고도 데릭의 선물까지 자신 있게 추천했다.

아델리아에게서 데릭의 나이를 듣더니, 가게에서 가장 화려한 커프스 링크를 가지고 나왔다.

큼직한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지만, 그럼에도 디자인이 투박하지 않고 날렵하게 잘 뽑혔다며 가게 주인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빠 피부가 하얀 편이라서 잘 어울릴 것 같았어.”

“황실 기사단 단원들이 부러워 죽으려고 그래.”

“뭐어? 벌써 그걸 하고 돌아다녔단 말이야?”

“그럼. 어떻게 참아? 우리 동생이 처음으로 선물한 건데!”

데릭은 아델리아가 디크레드 영지로 떠난 뒤, 곧장 커프스 링크를 착용하고 황실 기사단 숙소를 찾았다고 했다.

자고 있는 동기들을 모조리 깨워 자랑을 했다고.

“아니, 그게 뭐라고…….”

“아버지는 더하셨—.”

크흠.

테오스가 헛기침으로 데릭의 말을 끊었다.

아델리아가 “왜? 뭐가? 아버지가 왜?” 하고 되묻자, 데릭이 짓궂게 눈웃음 지으며 테오스를 흘깃거렸다.

그리고는 아델리아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마워, 아델. 진짜 마음에 들어.”

데릭이 손목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러자 커프스 링크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헤헤, 아델리아가 웃었다.

‘그 가게를 발견해서 다행이야.’

평생을 전장에 있던 그녀에게는 장신구나 드레스의 유행을 읽는 것이 몹시도 힘들었다.

‘내가 고르는 게 촌스러울까 봐 걱정했었는데…….’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조만간에 그 가게에 다시 들려서 인사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 김에 다른 거 또 살 거 없나 구경도 좀 하고.’

[제 체인도요.]

그때 은색 체인으로 바꿔 주신다고 했던 거, 잊지 않으셨죠? 하며 리그하르트가 되물었다.

‘응, 안 잊었어. 미리 주문 넣어 놨잖아.’

하필 목걸이 줄로 쓸 체인이 품절이어서 그날 리그하르트의 목걸이 줄을 교체할 수는 없었다.

돌아오는 마차에서 리그하르트가 어찌나 구시렁거리던지.

그때를 떠올리고 있자니, 리그하르트가 말했다.

[에헴. 제 노고를 잊지 마세요. 아시죠?]

‘당연히 알지.’

아델리아가 속으로 쿡쿡 웃음을 흘렸다.

사실, 체인과 커프스 링크에는 두 사람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선물이 담겨 있었다.

신력.

아델리아는 리그하르트에게 부탁했다.

테오스의 체인에 달린 루비와 데릭의 커프스 링크에 박힌 다이아몬드에 각각 신력을 넣어 달라고.

신력은 치유와 방어에 특화된 힘이었다.

물론 아델리아는 그 힘을 공격 위주로 사용하긴 했지만.

어쨌든 두 선물에 담은 힘은 치유와 방어의 힘을 가진 신력이었다.

‘두 사람은 앞으로도 숱한 전장에 나서게 될 거야.’

그때 그들 앞에 나타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작은 도움이 되기를.

그러한 마음으로 보석에 신력을 담았다.

아델리아는 테오스와 데릭을 번갈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의 이 행복이 오래 가기를.’

아델리아는 어딘가에서 듣고 있을 신에게 기도했다.

***

콰앙—!

악시덤의 집무실. 악시덤이 분을 참지 못해 책장 위 집기들을 한 손에 쓸어 버렸다.

“해독제라니! 대체 어떻게!!”

악시덤의 목소리가 집무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맹렬한 분노가 깃든 목소리였다.

황궁이 다시 열렸다.

거기에다 황제는 건강을 되찾아 알현실에서 귀족들을 맞이하기까지 했다.

‘몇 년을 들이부은 계획인데!’

이 계획이 실패하지 않도록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고 가문 하나를 세울 만큼 엄청난 양의 골드가 소모되었다.

‘그런데 뭐? 해독제?!’

빌어먹을!

악시덤이 이번에는 아예 책상을 뒤집어엎었다.

오러가 사방으로 폭발하여 튀어 나가고 집무실의 가구며 창문이 부서지고 깨졌다.

‘해독제를 만들 수 없도록 폴디아퀸이 재배되는 땅이란 땅을 죄다 태우고 갈아엎어 버렸는데…….’

정제되지 않은 독초가 남아 있을 줄이야.

‘두 번째 계획만큼은 쓰는 일이 없길 바랐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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