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악시덤이 어금니를 꽉 다물었다.
-제가 왜 구하기도 힘들다는 그 폴디아퀸을 사용하라고 했는지 아세요? ……첫 번째 계획이 실패하더라도 두 번째 계획에까지 쓸모가 있기 때문이랍니다.
-두 번째 계획?
악시덤이 되묻자, 붉은 입술이 그림 같은 아름다운 미소를 띠었다.
-말씀드렸잖아요? 해독제를 먹어도 독성만 제거할 뿐, 폴디아퀸의 이로운 성분들은 몸속에 한동안 남게 된다고.
즉, 지금 황제의 몸속에는 아직 독성만 빠져나갔을 뿐 폴디아퀸의 성분이 남아 있다는 소리였다.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걱정 말라며 악시덤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 성분과 만나 또 다른 독이 되는 약초가 있어요. ……첫 번째 계획이 실패하면 그 약초로 만든 향초를 구하세요.
은밀하게 속삭이던 가녀린 목소리를 떠올리며 악시덤이 상체를 세웠다.
“후우…….”
그는 흐트러진 자신의 옷차림을 다시 매만지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쉬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분노를 지운 목소리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집사에게 말했다.
“에이블화이트에게 연락해. ……내가 보자고 한다고.”
“예, 전하.”
“수하들 다 죽는 꼴 보기 싫으면, 단장더러 직접 오라 그래.”
“……예.”
집사는 곧장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다음 날, 아침.
아침 일찍부터 에스테르 공작가의 사람들은 황궁에 와 있었다.
“에스테르 영애.”
“예, 폐하.”
건강을 꽤 회복한 황제는 침대에서 벗어나 알현실 의자에 앉을 정도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보니, 처음 알현실로 들어와 아카데미 입학을 취소해 달라고 했던 날이 떠올랐다.
‘건강해지셔서 다행이야.’
황제를 향해 아델리아가 싱긋 웃었다.
그러자 황제도 그녀를 따라 화답하듯 미소 지었다.
“공식적으로 상을 내리지 못하는 점은 이해해다오.”
“상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폐하.”
아델리아가 꽤 의젓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황제가 나긋한 음성으로 물었다.
“황제의 목숨을 구해 놓고 억울하지도 않은가?”
“폐하께서 알아주시면 되죠. 다른 이들이 아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웃음을 터트리며 테오스를 향해 말했다.
“저거, 저걸 보라고. 테오스, 이 친구야. 대체 아이를 어떻게 교육했길래 하는 말마다 저리 이쁘게 하냐는 말이야.”
“제 어미를 닮았나 봅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말을 이쁘게 하는 편이 아니질 않습니까.”
“아.”
황제가 짧게 탄식했다.
“그건 그렇지. 자네처럼 무뚝뚝한 사내도 아빠라고 선물까지 하는 걸 보면. 테오스 에스테르의 피에는 그런 섬세함이 없거든.”
선물? 아델리아가 황제를 쳐다봤다.
‘아니, 내가 아빠한테 선물한 일이 대체 뭐라고 폐하까지 아시는 거야?’
아델리아가 황당해하자, 황제가 웃었다.
“에스테르 영애. 나는 말이야. 독이 몸에 번져 죽는 것보다 에스테르 공작 때문에 먼저 죽겠구나 했었다.”
“네?”
아델리아가 놀란 눈을 떴다. 그러자 테오스가 입을 열었다.
“폐하.”
“내 말을 막지 마, 공작. 사경을 헤매다가 잠시 정신을 차리면 내 눈앞에 가장 먼저 저 붉은 보석이 달린 체인을 들이밀지 않았나. 왜? 아니야? 내가 독에 취해 헛것을 보았어?”
“…….”
황제는 자신이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금은보화가 가득한 천국에서 눈을 뜬 줄 알았다며 투덜거렸다.
아델리아의 동그래진 눈동자가 테오스에게로 향했다.
테오스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그때 오빠가 하려던 말이 저거구나.’
-아버지는 더하셨—.
오빠도 그렇고 아빠까지…….
‘그 선물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민망한 마음에 뺨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두 사람의 그런 행동을 상상하자, 민망함보다 기쁜 마음이 더욱 커졌다.
‘자주 선물해야겠네.’
아델리아가 입꼬리에 힘을 주며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마음 같아서는 작위라도 내리고 싶은데.”
황제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공작도 알 것이오. 이 일을 공론화하게 되면 내가 어떠한 독에 중독이 되었는지, 누가 그 독을 먹였는지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예, 폐하.”
그러면 독초가 재배되었던 디크레드 백작가는 물론, 전 주치의와 연관 있는 에스테르 공작가까지 거론되게 된다.
‘거론으로 끝나지 못할 거야. 분명, 귀족파는 이것을 빌미로 죄를 물어야 한다고 나서겠지.’
황제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작위나 영토를 상으로 내리지 못하지만, 내 약조하마.”
황제가 눈을 접어 웃으며 인자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영애의 소원 하나 정도는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겠다고 말이야.”
그러자 아델리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소원이요?!”
“그래, 소원. 생명의 은인에게 그 정도쯤은 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우와! 고급 약재나 옷감, 장신구나 장식품으로 끝날 줄 알았더니!
황제가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은 ‘면책권’을 주겠다는 말과도 같았다.
반란처럼 큰 죄만 아니면, 말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 죄의 처벌이 한없이 가벼워질 수도 있고 아예 없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아델리아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지자, 황제가 다시 웃었다.
“눈빛을 보니 당장 생각나는 소원이 있는 모양인데. 말해 보거라.”
“아, 혹시. 지금 당장 이야기해야 되나요?”
“아니다. 생각이 정리되거든 말해도 된다.”
“정해진 기한은 없는 거지요?”
“물론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아니. 내가 죽더라도 황위에 오른 황태자를 통해서 그 소원을 이루어도 되느니라.”
황제의 말에 아델리아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럼 아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소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필요할 때?”
“네! 이 소원이 꼭 필요해지는 순간에요.”
그러자 황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하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아델리아가 화답하듯 천진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사실, 로샤크 전쟁에 우리 아빠를 출정시키지 말아 달라는 소원을 빌고 싶지만…….’
아직은 그 누구도 2년 뒤, 로샤크 전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랬기에 그 소원은 당장 말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 소원은 2년이 지나 로샤크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빌 수 없을 거야.’
영웅이라는 명성에 흠집이 가더라도, 아델리아는 꼭 그 소원을 빌어 테오스를 붙잡아 두고 싶었다.
그러나 테오스의 성격상 전쟁이 터졌다는데 딸아이와 함께 저택에 머물 것 같지도 않았다.
‘제국에 기사단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이 아빠뿐인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래서 아델리아는 그 소원권을 다른 곳에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2년 뒤, 로샤크 전쟁이 터지고 어쩔 수 없이 테오스가 출정해야만 한다면 그때…….
‘물론, 그런 일이 안 생기면 더 좋을 테지만.’
어쨌든 황제는 살아났다.
아델리아는 황제가 웃으며 테오스와 대화 나누는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이로써 아델리아가 알고 있는 미래는 많이 바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 일이 자신의 행복한 은퇴 생활을 위한 발판이라는 것을 아니까.
‘일단 악시덤에게 황위가 넘어가는 건 막은 것 같아.’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쭈욱 평화로우면 좋겠는데…….
‘황태자 전하께서 무사히 성년이 될 때까지 말이야.’
우리 황제 폐하 오래오래 건강히 지내시라고 몸에 좋은 보양식도 좀 구해다 드려야겠네.
황제와 테오스의 대화가 이어졌다. 잠시 틈을 엿보던 아델리아가 눈매를 둥글게 접으며 황제를 향해 말했다.
“폐하, 허락해 주신다면 먼저 물러갈까 합니다. 신전에 있는 친우를 만나야 해서요.”
“오, 신전에 친우까지 있어?”
잠깐 놀라던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하도록 하라.”
그러자 데릭이 몸을 돌렸다.
“혼자? 안 돼. 같이 가.”
“그래, 아델리아. 혼자서는 위험하다. 데릭과 동행하도록 해라.”
테오스와 데릭이 동시에 아델리아를 붙잡았다.
얼마 전, 신전에서 악시덤을 만나 쓰러졌던 일 때문에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델리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누가 보면 전장에라도 가는 줄 알겠어요. 두 분 모두 진정하세요. 이번에는 대강당에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곧장 데오나의 방으로 갈 테니 걱정 마시고요.”
“아델.”
“아델리아.”
아델리아는 두 사람이 더 말리기 전에 황제에게 인사를 건네고 후다닥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
알현실에서 나온 아델리아는 신전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정원을 지나, 조금씩 채도가 낮아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떨어지는 낙엽들 사이로 걸었다.
“어……? 전하다.”
정원을 거의 빠져나왔을 무렵, 수로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는 카르세스를 발견했다.
“전……!”
전하! 하고 냅다 부르려다 아델리아는 입술을 합, 하고 다물었다.
그리고는 곧장 커다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아델리아가 나무 뒤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밀어 다시 카르세스를 바라보았다.
‘옆에 누구지?’
[여자요.]
‘그건 나도 알아!’
아델리아는 속으로 버럭 소리를 지른 후, 다시 카르세스를 주시했다.
카르세스 옆에는 그 또래로 보이는 귀족 영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