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카르세스보다 살짝 작은 키였지만, 카르세스가 또래보다 큰 편이었기 때문에 그 귀족 영애가 작은 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몸짓이며 표정 하나하나에서 제법 예법을 배운 티가 났다.
프릴이 가득 달린 하늘색 드레스가 우아한 걸음에 맞춰 하늘하늘 흔들렸다.
앞으로 가지런히 놓은 두 손에는 앙증맞은 가방이 들려 있었는데, 그마저도 귀족 아이의 귀여운 생김새와 어울렸다.
잔잔한 웨이브가 들어간 연갈색의 긴 머리카락과 홍조 띤 두 뺨.
‘전형적인 레이디구나.’
어울리네…….
그렇게 생각한 아델리아의 눈꼬리가 조금 내려갔다.
오랜만에 본 황태자는 어쩐지 조금 달라 보였다.
그 사이 키가 크거나 성년이 되었을 리가 만무한데, 낯설기도 하고.
‘더욱 잘생겨진 것도 같고.’
허어? 가만히 듣고 있던 리그하르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델리아는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카르세스의 흑발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제대로 복식을 갖추어 입은 카르세스는 그 자체로 빛이 났다.
검은 제복에는 황금 왕관 아래 포효하는 날개 달린 사자가 금실로 수 놓여 있었다.
‘되게 성숙해 보여.’
그래서 그런가. 마치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나란히 걸어가는 것도 같았다.
‘전하께서 황태자비를 맞이하면 저런 모습일 거야, 그치?’
아델리아가 물었지만, 리그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님께서 아는 영애가 있긴 했고요?]
‘…….’
아델리아는 리그하르트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듣고 보니 그랬다.
티타임이나 티파티에 참석한 적이 있길 하나, 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길 하나.
돌이켜 보니, 귀족 영애들과 얼굴을 익힐 기회가 없었다.
‘나도 곧 티파티에 가거든?!’
[그런데 숨으시는 이유가 뭐예요?]
그건……. 아델리아가 시무룩하게 답했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아델리아의 시선이 다시 카르세스에게로 향했다.
상관의 연애 현장을 목격한 것처럼, 어쩐지 되게 껄끄러웠다.
‘막상 저런 상황에서 마주치면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말이야.’
[호오?]
왜 이렇게 입안이 쌉싸름하지?
아델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아델리아의 코끝으로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낙엽 하나가 톡, 내려앉았다.
뭐야, 갑자기.
“푸후.”
아델리아는 입으로 바람을 훅, 불어 낙엽을 떨어트리고 손끝으로 코끝을 비볐다. 문득 자신의 어깨에도 낙엽이 내려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가을은 가을인가 봐.’
아델리아가 왼쪽 어깨 위 낙엽을 바라보며 손을 뻗은 그 순간.
“에스테르 영애.”
“응?”
아델리아는 뒤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헉!”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깝다 했더니, 바로 뒤에 카르세스가 서 있었다.
“저, 전하?!”
여긴, 어떻게……. 아델리아가 중얼거리자 카르세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할 소린데.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놀란 아델리아와는 달리 카르세스는 평소처럼 담담하고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분명 건너편에 계셨는데.”
아아, 카르세스가 고개를 돌려 아델리아가 가리킨 건너편을 쳐다보며 말했다.
“수로를 지나갈 수 있도록 다리가 놓여 있다. 그 다리를 이용하면 금방 넘어올 수 있지.”
“아…….”
그렇구나, 그건 또 몰랐네.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카르세스의 시선이 돌아왔다. 보랏빛 눈동자가 나무 기둥에 등을 바짝 대고 있는 아델리아를 담았다.
언제부터 숨어 있었던 건지, 아델리아의 은발 위로 노란색과 붉은색의 낙엽 몇 개가 붙어 있었다.
카르세스가 손을 뻗어 낙엽을 털어 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나저나, 그렇다는 것은 여기 숨어서 날 보고 있었다는 얘긴데.”
“아, 그게…….”
아델리아는 카르세스가 손을 뻗어 낙엽을 떼어 내자 눈으로 가볍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카르세스의 옆에 선 귀족 영애를 보며 말했다.
“두 분께서 좋은 시간을 보내시는 것 같은데 괜히 제가 방해하게 될까 봐…….”
그러자 카르세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좋은 시간?”
무덤덤한 카르세스와는 달리, 옆에 서 있던 영애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 내가 말실수를 했나?
아델리아가 수습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전하. 그리고 레이디. 제가 이래 봬도 입 하나는 끝내주게 무겁거든요.”
하며 영애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에 카르세스 옆에 있던 영애가 곱게 말아쥔 주먹으로 입을 막으며 작게 웃었다.
웃으니 더 귀여웠다.
그러나 정작, 카르세스는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여기에 있는 걸 보면 신전으로 가던 길이었나 본데.”
“아, 네! 맞습니다, 전하.”
흐음, 그러자 카르세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황궁에 왔으면서 황태자 궁에는 들리지 않고 신전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의 말에 아델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황태자 궁에는 왜요?”
검술 훈련하는 날도 아니고, 그렇다고 따로 부르신 적도 없으신데?
그러자 카르세스가 혀를 찼다.
“됐다……. 신전에서 볼일이 끝나면 내 집무실로 와.”
“아……. 죄송합니다, 전하. 신전에서 아버지랑 오라버니를 기다리겠다고 했거든요.”
그러자 카르세스가 다시 혀를 찼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옆에 서 있던 귀족 영애를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네?”
조금 전까지 뺨을 붉히고 있던 영애는 갑작스러운 축객령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 하지만 전하. 제가, 오늘 전하께 드리려고 특별히 주문한 도시락을 챙겨 왔…….”
“루드.”
얼음 파편처럼 날카로운 그의 목소리가 귀족 영애의 말을 잘랐다. 그러자 뒤편에 서 있던 보좌관 루드가 다가왔다.
“예, 전하.”
“영애를 마차까지 모셔라.”
“예.”
“저, 전하!”
카르세스는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하고 아델리아에게 다시 몸을 돌렸다.
“가지.”
“네? 어디로요?”
“신전으로 간다며.”
“그건 그렇지만, 그럼……. 저 영애는 어쩌고요?”
“그대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고. 갈 길이 달라졌으니 헤어졌을 뿐이야.”
우연이라고?
‘분명 도시락까지 챙겨 왔다고 그랬는데…….’
그때, 막장으로 치닫는 연극이라도 관람하듯 숨죽이고 있던 리그하르트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누구에게는 우연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우연이 아니었나 보죠. 황태자는 역시 쉬운 남자가 아니었네요.]
아, 우리 누님. 꽤 고달프시겠는데? 벌써 경쟁자가 생기는 걸 보면.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리그하르트의 말이 무슨 뜻인지 헤아릴 틈도 없이, 아델리아는 카르세스에게 등이 떠밀려 신전으로 함께 이동했다.
신전과 이어진 복도를 걸으며 아델리아가 카르세스를 힐끔거렸다.
“그런데 아까 그 영애는 누구예요?”
“몰라.”
“네?”
“모르는 영애라고.”
“……그런데 함께 산책하시는 거예요?”
아델리아가 의아해하자, 카르세스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영애. 말은 똑바로 해야지. 같이 산책한 게 아니라, 내가 산책하는 중에 옆에 들러붙은 거다.”
“아.”
잊고 있었다. 황태자가 어떤 사내인지를.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쾌활하고 호쾌한 성격, 잘 웃고 다정한 성격은 여자를 향한 게 아니라 전우와 동료를 향한 거였다.
‘내게 잘 웃어 주신 것도 내가 전우였기 때문이었지.’
아델리아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이번에는 카르세스가 말했다.
“황태자 궁에는 왜 안 온 거지?”
“……훈련 날짜도 미뤄졌는데 제가 황태자 궁을 찾아갈 이유가 없잖아요.”
황궁이 폐쇄되었다가 다시 열린 뒤로 한동안은 황궁 돌아가는 사정이 몹시도 혼란스러웠다.
아델리아와 테오스, 그리고 데릭 역시 곧장 입궁하지 못하고 황제가 부를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 덕분에 자연스레 황태자와의 검술 훈련도 일정이 밀리게 되었다.
“검술 훈련을 재개하기로 했다. 이틀 뒤.”
“어? 전하, 이틀 뒤는 안 되는데요.”
“……왜?”
“제 생애 첫 티파티가 있어서요.”
“티파티?”
“네! 로즈힐 후작가에서 티파티 초대장을 보내 주셨거든요? 저, 거기 꼭 가야 해요!”
그러니까 훈련 일정을 하루만 더 미뤄 주시면 안 되냐고, 아델리아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티파티라…….”
흠, 카르세스가 낮게 침음했다.
“……일단 알겠다. 다시 일정을 조율해 보도록 하지.”
“네! 감사합니다!”
헤헤, 아델리아가 기쁘다는 듯 웃었다. 그러자 카르세스의 시선이 아델리아에게 잠시 머물렀다.
요 며칠 사이, 가슴과 머리를 어지럽히던 불쾌한 감정이 한순간에 휘발되었다.
신기하게도, 이 아이를 보고 있으면 그랬다.
‘하늘색.’
방금까지 함께 산책했던 영애의 얼굴은 물론, 드레스 색깔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에스테르 공녀의 것은 유독 선명한 것이 이상했다.
흰색 상의에 하늘색 허리끈. 그 아래로 허리끈과 같은 색상의 하늘색 치마가 나풀거렸다.
‘그러고 보니 머리를 묶었네.’
양 갈래로 풍성하게 땋아 묶은 머리끝으로 치마 색과 같은 하늘색 리본이 달려 있었다.
하늘색이라는 건 꽤 사랑스러운 색이구나.
카르세스는 무의식적으로 아델리아를 쳐다보며 걷고 있었다.
그러다 시선이 딱 마주쳤다.
‘응?’
아델리아가 뭘 쳐다보냐는 듯 양쪽 눈썹을 들어 올리자, 카르세스는 태연하게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신전에는 무슨 일로?”
“아, 중요한 사람을 만나러 가요.”
“중요한 사람……?”
아델리아를 돌아보는 카르세스의 미간이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