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네, 신력을 가진 아이거든요? 그런데 그 신력이 대신관님께서도 놀랄 정도로 엄청 강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신력 때문에 아이는 죽어 가고 있었고 우연히 지나가던 길에, 우연히 그 사정을 듣게 되어 도와주게 되었다는.
아델리아는 적당히 사실과 거짓을 섞어 가며 두루뭉술하게 설명했다.
“그 아이의 아버지를 공작가로 데려오고 싶었거든요.”
아……. 그제야 좁혀 들었던 카르세스의 미간이 스르륵 풀어졌다.
“대단한 실력자인가 보군.”
고용인의 아이 때문에 그 먼 길을 달려 해독제까지 구해 온 것을 보면.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편으로 끌어오고 싶은 사람들이 있지.”
카르세스의 말에 아델리아는 복도 위를 걷는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어요. 실력 때문에 찾아갔고, 그 사람의 아이가 아픈 걸 이용했죠.”
아델리아의 눈꼬리가 슬며시 내려갔다.
아델리아는 그게 항상 마음에 걸렸다. 한 사람을 손에 넣기 위해 약점을 이용했다는 것이, 자신도 악시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하지만 그런 마음만 있었던 건 아닌데, ……정말인데.’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겠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자신 역시 악시덤처럼 비열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만, ……구해 주고 싶다는 마음은 진심이었어요.”
“알아.”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아델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보라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영애가 누군가를 구하는 데 있어 거리낌이 없다는 거. ……직접 겪어 봐서 알고 있어.”
카르세스의 입가로 옅은 미소가 스몄다.
아델리아는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그 미소를 그대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분에 넘치는 칭찬을 듣고 있는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살랑거리는 가을바람이 하늘색 치맛자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복도를 걸었다.
***
신전에 도착하니 데오나가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데오나는 벌써 신관이 된 것처럼 하얀 신관복을 맞춰 입고 단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
“데오나?”
그러자 데오나가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스테르 공녀님.”
“와! 몰라보겠어!”
며칠 사이에 데오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푸른빛에 가까울 정도로 창백했던 안색이 봄날의 햇살처럼 화사하게 돌아와 있었다.
아직 살이 차오르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겠지만, 죽음의 냄새가 짙었던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모든 게 공녀님 덕분이에요.”
데오나는 두 손을 단정하게 모은 채 다시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아이는 여섯 살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반듯하고 고결했다.
‘어릴 적부터 저 정도는 되어야 신관을 하나 봐.’
[그건 아닐 거예요.]
‘왜?’
[저도 누님 같은 분만 선택한 건 아니었거든요.]
‘…….’
그러니까 신력 또한 사람의 성격을 봐 가며 내려지는 힘이 아니라는 거였다.
‘뭔가, 굉장히 욕을 듣는 기분인데.’
[칭찬이에요.]
데오나는 카르세스를 뒤늦게 알아보고 깜짝 놀라 인사를 건넸다. 물론, 카르세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대신관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따라오셔요.”
“응.”
아델리아와 카르세스는 데오나를 따라 신전 안으로 향했다.
조용히 복도를 걷던 데오나가 아델리아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저, 공녀님.”
아이는 입술을 꼭 물었다가 놓으며 말을 이어 갔다.
“저희 아빠는…….”
아, 맞다.
지금 데오나가 가장 궁금해할 이야기가 바로 데오나의 아버지 노베트의 이야기였다.
“내가 눈치가 없었어. 많이 궁금했을 텐데.”
“아, 아니어요. 중간중간 서신을 보내 주셔서 대충은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서신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델리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데오나. 서신에도 아마 적혀 있었겠지만, 아버지는 지금 공작저에 있어.”
“네, 서신에서 읽었어요.”
“응, 공작저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으셨거든? 데오나가 건강해져서 얼른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어.”
“아빠가요?”
“응, 데오나.”
그러자 긴장하고 있던 데오나의 얼굴에 안도하는 기색이 스쳤다.
“저어, 아빠는……. 식사 잘 하고 계시나요?”
“물론이지.”
아델리아의 대답에 데오나의 미소가 더욱 환해졌다.
“다행이다……. 제가 아프고 나서는 제대로 식사도 못 하셨거든요.”
노베트는 약값을 구하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
대장장이이면서 어째서인지 판로가 모두 막혀 만든 물건들을 팔 수 없게 되자, 다른 잡다한 일들을 찾아서 골드를 벌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먹는 음식의 질이 떨어졌다.
아픈 데오나에게는 좋은 음식, 좋은 약을 먹였지만 정작 노베트 자신은 말간 수프 한 그릇으로 하루를 버티고는 했다.
“이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걱정되면 어서 빨리 나아서 직접 확인하러 와.”
“네, 공녀님…….”
데오나가 발개진 눈을 하고서 미소 지었다.
“아, 맞다. 그리고.”
데오나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아빠 대장간은요?”
대장간? 가만히 두 아이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카르세스가 슬쩍 아델리아를 흘겼다.
“아, 대장간!”
헤헤, 아델리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까 말했었지? 노베트가 공작저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고.”
“네, 기억하고 있어요.”
대장간, 노베트……. 익숙한 이름에 카르세스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다.
노베트는 얼마 전에 놓쳤던 대장장이의 이름이었다.
‘데오나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다고 했더니.’
루드가 조사해 온 노베트의 자료에서 딸아이의 이름이 데오나였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렇게 된 거였나.’
돈이나 명성에도 흔들리지 않던 대장장이를 단번에 채어 간 사람이 바로 에스테르인 모양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꽤 오랜 시간 공들였던 사람을 빼앗겼는데도,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뭐, 숙부만 아니면 되었다.’
특히 에스테르라면 황제파 가문이기도 하니까.
카르세스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아델리아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 중요한 임무로 에스테르 공작가의 수석 대장장이를 맡았어.”
“수석……?”
데오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옅은 갈색의 단발머리가 찰랑거렸다.
“수석이 뭐예요……?”
“음, 그러니까.”
아델리아가 과장된 손짓을 하며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을 곁들였다.
“우리 에스테르 공작가의 대장장이가 되에에에에에게 많거든?”
이만큼! 아니, 이것보다 더 많이!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아아아아장 높은 사람이라는 뜻이야.”
아델리아가 손을 높이 들어 올리자, 그 손을 따라 고개를 올린 데오나의 눈이 커다래졌다.
“우리 아빠가요?”
“응! 데오나의 아빠가 그렇게 대단하신 분이야.”
우와아……. 데오나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방금까지 어른스럽고 얌전하던 데오나의 얼굴에 비로소 아이다운 천진한 빛이 감돌았다.
“그러니까 대신관님 말씀 잘 들어서 얼른 낫자. 돌아오면 아빠랑 같이 지낼 수 있도록 집도 마련해 줄게.”
“감사합니다, 공녀님.”
“아, 물론 신전에 남아서 신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도 되고.”
그건 데오나의 선택에 달렸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치만…….”
데오나가 시무룩해졌다.
“그러면 아빠랑 헤어져야 하잖아요. 그렇지요?”
“……응, 신력이 없는 사람이 신전 안에서 살아갈 순 없거든.”
“그래서 싫어요. 대신관님도, 다른 신관님들도 다 좋은데……. 아빠가 없으니까요. 아빠도 제가 보고 싶어서 제대로 일 못 하실 거고요.”
아빠 곁에는 제가 있어야 해요, 라며 데오나가 작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델리아가 다정하게 웃으며 데오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맞아. 지금도 데오나 걱정만 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얼른 낫자. 알았지?”
“네, 공녀님!”
“공녀님 말고 그냥 아가씨라고 불러.”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네, 아가씨!”
데오나가 천진하게 미소 지었다.
수다를 떨며 걷다 보니 어느새 대신관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르세스를 발견한 대신관이 놀라 의자에서 일어났다.
짧은 인사가 오고 갔다.
“해독제의 효능이 뛰어났습니다. 쉽지 않으셨을 텐데, 고생이 많으셨다고요.”
아델리아가 웃으며 대꾸했다.
“저도 이 일을 계기로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났어요. 그래서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대신관님. 그보다 데오나를 보살펴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하죠.”
“아닙니다. 데오나가 잘 따라와 주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놀라운 신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관이 되어 꾸준히 수련한다면 다음 대신관 자리는 저 아이의 것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델리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 정도라고?!’
아델리아가 대신관 옆에 앉아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 데오나를 쳐다보았다.
‘너, 생각보다 더 대단한 아이였구나!’
이거, 잘하면 미래의 대신관을 내 편으로 둘 수 있겠는데?
정해진 것은 없지만, 아델리아의 마음속에서 음흉한 욕심 하나가 싹을 틔우고 있었다.
[신전에 있기 싫다잖아요…….]
‘어허, 미래는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법이야.’
아델리아는 데오나를 바라보며 초롱초롱 욕심내는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
신전에서 돌아온 아델리아는 곧장 노베트를 찾아 데오나의 소식을 전했다.
노베트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아델리아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고맙습니다, 아가씨……. 이 은혜, 평생 목숨으로 갚겠습니다!”
에이, 아델리아는 그러지 말라며 노베트의 등을 토닥거렸다.
“노베트. 목숨을 그렇게 함부로 걸면 안 돼요. 데오나를 위해서라도 아껴 두세요.”
“아가씨…….”
“아, 대신! 단검 하나만 만들어 주세요.”
그러자 노베트가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데릭 경께 전해 들었습니다. 쓰시던 단검의 날이 엉망이 되셨다고요.”
노베트는 빠르게 단검을 만들어 놓겠다며 자신 있게 말했다.
[나도 할 수 있는데…….]
단검이든, 장검이든, 도끼든, 장창이든. 다 부러트릴 자신 있는데.
방으로 올라오는 내내 리그하르트가 구시렁거렸다. 아델리아는 중얼대는 리그하르트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귀여운 녀석.
방으로 돌아온 아델리아는 곧장 소파에 뛰어들었다. 폭신한 소파에 길게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릭, 조금만 참아.’
[조금이라뇨. 누님께서 성년식을 치르려면 아직 한참 멀었잖아요!]
그때까지는 계속 이렇게 목걸이인 척해야 해요? 네? 그런 거예요?!
[이 위대하신 리그하르트 벤 티에리 스코엘리이어 미티어스 록사니크가 고작 목걸이라니.]
리그하르트가 울먹이자 아델리아가 달래듯 말했다.
‘말했잖아. 넌 너무 눈에 띄어. 지금 내가 널 사용하다가 혹시라도 성검 외형을 아는 사람이 보면 난리가 날 거라고.’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잠시 후. 비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제가 외형을 바꾼다면요?]
‘응?’
생각지도 못한 리그하르트의 말에 아델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