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크기도 줄였는데 그거 하나 못 할까 봐요?!]
‘가능해? 그런데 왜 말 안 했어?!’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아델리아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
그러자 방금까지 흥분해서 떠들던 리그하르트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흐음, 아델리아가 알겠다는 듯 콧소리를 냈다.
‘……불가능하구나?’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소리쳤다.
[아, 아니에요! 단지…….]
‘단지 뭐?’
잠시 머뭇거리던 리그하르트가 조심스레 말을 이어 갔다.
[제 반쪽 힘을 찾으면……. 그러면 가능한데…….]
‘반쪽 힘? 그 신전 지하에 있다는 그거?’
[네! 맞아요, 그거요!]
리그하르트는 그 힘만 찾으면 크기뿐 아니라, 외형까지 바꿀 수 있다고 했다.
‘으음.’
아델리아가 망설이자 리그하르트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혹시, 나머지 힘을 모두 되찾으면 누님께서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시는 거예요?]
‘정확해.’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그 부분은 절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어째서?’
[지금도 제가 크기를 줄이고 이 크기를 유지하느라 대부분의 힘을 사용하고 있거든요?]
‘그렇지.’
그래서 아델리아가 일곱 살의 몸으로도 성검의 힘을 견딜 수 있었다. 비록 반쪽짜리이긴 하지만.
리그하르트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문제가 없습니다! 나머지 힘을 되찾기만 한다면, 제가 성검인 걸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게 외형을 바꾸게 될 거고 그걸 유지하느라 지금보다 훨씬 많은 힘을 쓰게 될 테니까요!]
‘오……. 그러니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힘만 남게 된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무엇보다, 누님 손에 꼭 맞는 맞춤형 검이 될 수 있다고요!]
아델리아의 눈썹이 올라갔다.
‘제법 그럴듯한 소리야.’
지금 아델리아의 오러는 미완성된 힘이다.
오러 큐브를 만들었다 해도, 불안정한 힘을 가둬 놓기만 할 뿐 제대로 된 활용이 되지 않고 있었다.
‘오러 큐브도, 오러도 훈련이 필요하니까.’
앞으로 훈련을 통해 안정을 되찾겠지만 현재로서는 마음껏 사용하기 힘들었다.
‘그에 비해 성검의 힘은 완성형이지.’
성검의 주인인 아델리아가 그것을 어떻게 제어하냐에 달린 문제였지, 힘 자체가 불안정한 것은 아니었다.
불안정한 오러를 억지로 꺼내 쓰는 것보다 크기를 줄인 성검을 사용하는 게 훨씬 안전했다.
‘그래, 앞으로는 단검만으로 힘들 수 있어.’
에이블화이트만 해도 단번에 급소를 찔러 처리하지 않았더라면, 단검만으로 그들을 상대하기 벅찼을 것이다.
리그하르트가 힘을 되찾고 아델리아의 손에 딱 맞는 크기를 유지할 수 있다면…….
‘성검의 힘은 힘대로 사용하고, 오러도 함께 사용할 수 있어!’
아델리아의 눈동자가 화르륵 타올랐다. 그러다 한순간에 기세가 한풀 꺾였다.
‘어쩐지, 다시 기사였던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인데……?’
다시 기사가 되려고 돌아온 건 아닐 텐데 말이야.
그러다 아델리아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하지만 아빠와 오빠를 지키기 위해 이 힘이 필요하다면, 그래서 기사가 되어야만 한다면.’
……기꺼이 이용해 주겠어.
아델리아가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좋아! 그래서! 어디에 있다고? 신전? 신전 지하 감옥?’
[……감옥이라뇨. 그냥 신전 지하에 있는 유물 창고라고요.]
‘그거나, 그거나!’
[완전 다르거든요!]
‘찾기 싫구나?’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하하! 웃으며 의욕에 넘쳐 소리 질렀다.
[그럴 리가요! 신전 지하! 동쪽 다섯 번째 유물 창고에 있습니다! 제가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누님!]
‘좋아! 가자! 찾자!’
아델리아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자! 찾자!]
리그하르트 역시 들떠 소리쳤다. 그런데.
‘우선 티파티부터 하고.’
예?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것 같던 아델리아가 다시 소파에 얌전하게 앉았다.
당황한 리그하르트가 물었다.
[……다, 당장 가는 게 아니고요?]
‘내겐 티파티도 중요해, 릭. 첫 티파티라고. 지금 내 목표는 그 티파티에서 최대한 많은 인맥을 만드는 거야. 그 전에 사고를 쳐서 티파티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면 어떡해?’
[…….]
티파티에서 오고 가는 이야기들에도 쓸 만한 정보는 있을 테니까, 이 좋은 기회를 날릴 순 없어.
‘좋아! 이왕 생각난 거 미리 움직여 볼까?!’
[티파티요?]
‘아니, 누구 좀 만나려고.’
[그게 누군데요?]
아델리아는 침대에서 훌쩍 뛰어 내려오며 씩 웃었다.
‘내 전우들.’
***
“생각보다 조용합니다.”
근래 악시덤은 대공저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를 지켜보던 수하들의 보고에도 그 어떠한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사이 황제 역시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다.
잠깐 흔들리던 황궁 내부의 분위기도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숙부께서 언제는 요란스럽게 일을 진행하셨던가. 조용하다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더 긴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시도 눈을 떼지 말라고 전해.”
“예, 전하.”
카르세스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새카만 시곗바늘이 어쩐지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참 더디게도 가는군.”
그러자 루드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기다리는 소식이라도 있으십니까?”
“……기다려? 내가?”
“근래 시계를 자주 보셔서 말입니다. 오늘이 며칠이냐고 자주 묻기도 하셨고요.”
카르세스는 루드가 건네준 서류를 받으며 말했다.
“자세히도 지켜봤군.”
“그게 제 일이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카르세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보너스를 줘야겠어. 일을 너무 잘하셔서 말이지.”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전하.”
루드도 웃으며 맞받아쳤다.
한동안 서류만 쳐다보던 카르세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시계로 향하자, 루드가 말했다.
“오후 세 시 반입니다, 전하.”
“……알았다고.”
카르세스가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내렸다.
한동안 말없이 수하들의 보고가 적힌 서류를 넘겼다. 그러다 문득, 카르세스의 손이 멈췄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에스테르 영애가 참석한다는 티파티.”
“예, 내일입니다. 로즈힐 후작가에서 열린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카르세스의 미간이 좁혀 들었다.
“루드.”
“예, 전하.”
“아스틴에게 로즈힐 후작가에 대해서도 알아 오라고 전해.”
그의 말에 루드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전하, 혹시……. 왜 그러시는지.”
로즈힐 후작가는 황제파 귀족이었다. 황제파 귀족이라면 이미 충분한 조사를 마친 뒤였기에 새로 조사하라는 카르세스의 명령이 새삼스러웠다.
서류를 내려다보던 카르세스가 낮게 말했다.
“내일 티파티에 비올라 프레이르가 참석한다고 적혀 있다.”
“아…….”
그러자 루드 역시 놀란 눈으로 서류를 쳐다보았다.
“비올라 프레이르와 카를리나 로즈힐의 친분에 대해서는 이전의 보고서에서 보지 못한 내용이다.”
루드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알아보겠습니다.”
“서둘러.”
“예, 전하.”
루드가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도 한동안 카르세스의 시선은 보고서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
“안녕, 아렌트. 데프.”
에스테르 공작가의 매그너스 기사단 1부대 소속 아렌트와 데프는 놀란 눈으로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부른다는 말에 응접실까지 따라왔더니,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아델리아였다.
“아, 아가씨?!”
“오랜만이야.”
아델리아가 활짝 웃었다.
“앉아.”
아렌트와 데프는 서로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소파에 앉았다.
“잘 지냈지?”
아델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묵묵하게 있던 아렌트가 대답했다.
“저희를 영영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럴 리가. 내가 너희들과 함께 보낸 시간을 어떻게 잊어? 조금 바빠서 그랬어. 멀리, 돌아서 오느라.”
아델리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쿠키 하나를 집어 들며 말을 이어 갔다.
“호위 기사가 필요해.”
“호위, 기사요?”
“응!”
아렌트와 데프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실은, 내일 내 생애 첫 티파티가 있어.”
“예에? 아가씨께서 티파티라고요?!”
데프가 믿을 수 없다며 되물었다. 아델리아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니까. 그런데 들어 보니 참석하는 영애들이 호위를 데려간다잖아? 근데 나는 딱히 호위를 지정해서 데리고 다니질 않았거든.”
아렌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필요 없으셨죠. 기사들의 호위를 직접 하시면 몰라도.”
“뭐, 그렇지. 그래서 이번에 너희 둘에게 내 호위를 맡기고 싶어. 훈련할 때 두 사람이 나랑 가장 합이 잘 맞았잖아.”
아렌트와 데프는 동그래진 눈을 여러 차례 깜빡거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렌트가 물었다.
“저희가……, 할 수 있을까요?”
매번 아가씨께서 바닥에 꽂아 대던 놈들인데요.
아렌트가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웃었다.
“호위 기사라는 게 꼭 나보다 강할 필요가 있나? 내가 보지 못하는 방향을 대신 봐 주고, 내가 발견하지 못한 위험을 알려 주고. 그렇게 전우처럼 돕고 도우면 되는 거지.”
“…….”
잠시 적막이 흘렀다. 아렌트와 데프의 표정에서 망설이는 기색이 엿보였다.
‘내키지 않나 봐. 하긴, 훈련할 시간도 부족할 텐데 티파티나 따라다니라고 하면 싫을 만도 하지.’
아델리아가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싫으면 싫다고 해도 돼. 강요할 생각은 없…….”
그때,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하겠습니다.”
“하게 해 주십쇼!”
“…….”
단단한 결심이 엿보이는 아렌트의 대답과 열정적이고 도전적인 데프의 대답에 아델리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마워, 둘 다. 잘 부탁해.”
아델리아가 미소로 화답했다.
***
다음 날, 아렌트와 데프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마차 앞에서 아델리아를 기다렸다.
마지막 출정에서 돌아온 이후, 외부 일정이 없었고 출정도 없었기에 기사단 제복을 꺼내 입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성년식을 앞둔 두 사내는 부쩍 외모에 신경 쓰고 있었다.
게다가 티파티라고 하지 않나.
많은 귀족 영애들과 그 영애들의 하녀, 그리고 호위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절대 우습게 보일 수 없었다.
“이제 슬슬 아가씨께서 나오실 때가 되었는데.”
“내가 갔다 올까?”
“뭐 하러. 아직 여유 있어. 천천히 준비하시게 기다려.”
“아, 그런가? 그러지 뭐!”
데프는 제복이 답답한지, 목 언저리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러게, 근육을 좀 줄여.”
보는 내가 다 답답하다. 아렌트가 말했다. 그러자 데프가 가슴을 쭉 내밀며 반발했다.
“근육을 줄이면 데프가 아니지. 이 근육으로 짓이겨서 숨통 끊어 놓은 놈이 몇인데! 내 무기야!”
데프가 자랑스레 떠들었다. 그런 데프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아렌트가 저택에서 나오는 아델리아를 발견했다.
“아, 저기 아가씨 나오신……. 어?”
그러자 데프가 뒤로 돌았다.
“어? 그래?! 드디어 나오…….”
두 사람은 동시에 할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