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데프가 멍한 시선으로 아델리아를 보며 말했다.
“야……. 우리보다 아가씨가 힘을 더 주셨는데?”
그러자 아렌트가 숨을 크게 들이켜며 허리를 고쳐 세웠다.
“당연하지. 첫 티파티라고 하셨잖아.”
아렌트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오늘 티파티의 주인공은, 아델리아가 되리라는 것을.
야호! 아렌트! 데프!
멀리서 아렌트와 데프를 알아본 아델리아가 손을 흔들었다.
경쾌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아이의 발긋한 두 뺨에는 기대감이 흠뻑 스며 있었다.
“우리 아가씨, 신나셨네.”
“……연무장 처음 나오실 때 같아.”
“어, 그러고 보니 그렇네? 또 누굴 때려눕히시러 가시나?”
“티파티라니까?”
“아, 그렇지.”
아렌트가 아델리아를 응시한 채, 데프를 나무랐다.
‘인형이 따로 없네, 우리 아가씨.’
연무장에서 흙먼지를 잔뜩 바르고 있어도 귀여웠는데, 작정하고 꾸며 놓으니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투명하고 가느다란 은빛 머리카락이 잔잔하게 불어온 가을바람에 살랑거렸다.
평소에는 장난기 다분하다 생각했던 미소도 나부끼는 은발과 햇살이 더해지니, 그냥 살아 있는 명화와도 같았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나부낄 때마다 앙증맞은 귀걸이가 반짝거렸는데, 사람 자체가 영롱해서 그런가.
귓불에 대롱대롱 달린 귀걸이도, 은빛 머리카락을 장식하는 머리핀조차도, 그 화사함에 묻혀 존재감이 흐릿했다.
“우리가 저런 아가씨를 흙바닥에 굴린 거야?”
데프가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리자, 아렌트가 말했다.
“데프, 너무 얻어맞아서 기억에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우리는 아가씨를 흙바닥에 굴린 적이 거의 없어.”
우리가 아가씨를 굴린 것보다 아가씨가 우리를 굴린 횟수가 더 많으니까.
“엇비슷하지 않았나?”
“9:1 정도.”
“와, 그건 좀 심했다.”
쯔쯔, 데프가 남 일 이야기하듯 혀를 찼다. 그러자 아렌트가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다가온 아델리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화사하게 웃었다.
“빨리 나왔네?!”
크흠! 데프는 다시 잔뜩 긴장한 어깨를 올리며 “오셨습니까, 아가씨!”하고 소리쳤다.
아렌트가 그보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아델리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예쁘십니다, 아가씨.”
“……우와, 뭐야? 아렌트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역시. 기사는 기사였네.”
“기사라서 예의상 한 말이 아닙니다.”
아렌트의 말에 아델리아가 히히,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고마워. 덕분에 긴장이 조금 풀렸어.”
그러자 데프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긴장도 하십니까? 아가씨께서?”
“그럼. 뭐든 처음은 긴장되는 법이거든!”
아델리아가 허리에 두 손을 올리며 장난스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렌트랑 데프도 제법 신경 써서 입었는데?”
아렌트가 대답했다.
“저희가 연무장에서나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지, 대외 행사에서는 나름 알아줍니다. 특히, 매그너스 기사단복은 유명하거든요.”
알지, 알지.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아렌트가 마차 문을 열며 아델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타시죠, 아가씨.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푸핫!”
쑥스러운 듯 웃음을 터트린 아델리아가 조심스레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잘 부탁드려요, 아렌트 경.”
아델리아가 요조숙녀처럼 고개를 까딱인 뒤 마차에 올랐다.
뒤늦게 저택에서 나온 세라까지 마차에 올라타고 문이 닫히자, 아델리아는 창문을 열었다.
아렌트와 데프가 말에 타고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델리아가 기사 둘을 향해 외쳤다.
“출발!”
“네, 아가씨!”
데프가 씩씩하게 대답하며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드디어 마차가 출발했다.
티파티 준비가 한창인 로즈힐 후작가로.
***
“세상에, 비올라!”
“나, 왔어요, 카를리나.”
티파티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비올라였다.
카를리나가 비올라를 반갑게 맞이하며 옷차림을 칭찬했다.
“평소에도 아름다웠지만, 오늘은 더욱 아름다워요.”
흡사, 티파티가 아니라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장이라도 찾아온 듯한 복장이었다.
‘비올라가 원래 화려하게 입는 걸 좋아하긴 했는데…….’
어쩐지 오늘은 평소보다 지나칠 정도로 화려했다.
카를리나의 칭찬에 비올라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중요한 날이잖아요? 우리 카를리나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힘 좀 줬어요.”
비올라는 육감적인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붉은 드레스를 입고 왔다.
화려한 금색 문양과 겹겹의 프릴, 그리고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장신구들은 그녀의 화려한 외모를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비올라가 눈매를 접어 웃었다.
“카를리나도 우아하고 예뻐요.”
“고마워요, 비올라.”
카를리나는 목 언저리에서 가슴까지 이어지는 풍성한 프릴이 달린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남청색 리본과 치마로 포인트를 주었다.
티파티 주최자답게 깔끔하고 단정한 옷차림이었다.
카를리나는 비올라를 티파티 장소로 안내한 후, 속속들이 도착하는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없이 움직였다.
로즈힐 후작가의 티파티에 초대받은 귀족 영애는 총 열두 명이었다.
티파티치고는 제법 많은 인원이었는데, 카를리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자리인 만큼 주요 가문의 영애들만 초대했다.
카를리나의 아버지, 아든 로즈힐 후작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내 사업을 물려받겠다고? 여자의 몸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카를리나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고 싶었다. 일찍이 오빠를 전장에서 잃고 가문의 후계자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자신이 가업을 이어받아 가문을 지켜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업에는 인맥과 그 인맥을 관리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신 있습니다.
-그럼 증명해 보거라.
아든 로즈힐 후작은 열 번의 티파티를 모두 성공적으로 개최한다면, 사업을 배울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그 열 번 중, 오늘이 마지막 열 번째 티파티였다.
앞선 아홉 번의 티파티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제 마지막 난관이 남았다.
‘이번 티파티만 성공한다면…….’
후작에게 인정받고 제대로 정식 절차를 밟아 사업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업이 안정적으로 돌아가게 되면 후작 가문을 이어받을 수도 있다.
카를리나는 떨리는 마음을 숨기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때, 로즈힐 후작저 입구로 마차 하나가 들어왔다.
카를리나는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 둘의 제복과 마차에 새겨진 문양을 보고 에스테르 공녀가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델리아가 정말 왔어!’
카를리나가 입구로 걸어 나와 다가오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사실, 티파티 초대장을 보내긴 했지만 정말로 참석할 줄은 몰랐다.
‘설마, 설마 했는데.’
자주 놀러 오라든가, 언니가 있었으면 했다든가, 티파티에 초대해 줘서 고맙다든가.
‘그런 말들이 진심이었다는 거야?’
카를리나는 조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차의 문이 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말에서 내린 호위 기사가 마차 문을 열자, 안에 타고 있던 아델리아가 호위 기사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순간, 카를리나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델리아라고?’
티파티에 참석해 주어 고맙다는 말을 준비하고 있던 카를리나는 잠시 넋을 빼고 아델리아를 보았다.
새하얀 프릴이 팔랑거리는 민트색 드레스와 치마 중간까지 뒤덮은 은색 자카드 레이스가 햇살에 반짝거렸다.
바닥으로 폴짝 내려오자, 풍성한 레이스가 가느다란 발목 언저리에서 물결치듯 흔들렸다.
훈련복을 입고 있는 아델리아가 익숙했던 탓인지, 아니면 오늘따라 작정하고 꾸민 탓인지.
카를리나는 유독 빛나는 모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카를리나!”
카를리나는 자신을 반갑게 부르는 아델리아의 목소리에 시선을 퍼뜩 들었다.
“아……. 에스테르 영애.”
아델리아가 호위 기사와 하녀를 주렁주렁 매달고 카를리나에게로 걸어왔다.
크흠. 아델리아가 작은 주먹을 입술 앞에 대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치마 중간 부분을 살짝 잡고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기다란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깔고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로즈힐 후작가의 티파티에 초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레이디. 아니, 로즈힐 영애.”
“아…….”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반듯하고 그럴듯한 인사였다.
‘아델리아와 이런 인사를 주고받게 될 줄이야.’
이제는 더 이상 검만 휘두를 줄 알던 아델리아가 아니었다.
어쩐지 그녀의 숨은 노력이 느껴지는 것 같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카를리나도 가슴 앞으로 손을 올린 뒤 나머지 손으로 치마를 들어 올리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세웠다.
“초청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에스테르 영애. ……얼마 전에 아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지금은 괜찮은가요?”
그러자 아델리아가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헤헤, 지금은 완전히 다 나았어요.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델리아의 대답에 카를리나가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자리로 안내해 드릴게요. 다른 분들은 이미 도착하셔서 기다리고 있답니다. 자, 안으로 들어가요.”
“제가 마지막이에요? 제가 늦었나요?!”
아델리아가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러자 카를리나가 작게 웃었다.
“아니에요, 에스테르 영애는 늦지 않았어요. 다른 분들이 더 일찍 오셨을 뿐이랍니다.”
그제야 아델리아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첫 티파티에서부터 밉보이게 될까 봐 걱정했어요.”
“밉보이다뇨. 그 누구보다 귀여…….”
“네?”
카를리나가 아델리아의 시선을 피하며 미소 지었다.
“일단 들어가요. 소개해 드릴 테니까.”
“네! 좋아요!”
아델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카를리나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카를리나의 말대로 티파티의 현장에는 이미 많은 영애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게 티파티구나!’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아델리아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모이는 줄도 모르고 아델리아는 카를리나의 뒤를 쫓아가며 테이블 위 디저트를 훑었다.
‘푸딩. 푸딩도 있어!’
그때, 카를리나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에스테르 영애, 이쪽은 저와 가장 친한 벗이에요.”
그제야 아델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아, 이 사랑스러운 영애께서 그 유명한 에스테르 영애?”
하하. 사랑스럽대. 들었어? 릭?
아델리아는 들뜬 마음을 애써 숨기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스테르 공작가의 아델리아 에스테르예요.”
그러자 붉은 드레스를 입은 영애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와, 몸매 봐. 아델리아는 화려한 외모와 늘씬하게 뻗은 몸매에 감탄했다.
그때, 붉은 드레스의 영애가 웃으며 인사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에스테르 영애. 프레이르 대공가의 비올라 프레이르예요. 앞으로 잘 지내 봐요, 우리.”
“네, 저도 만나서 반갑, 습…… 니다…….”
밝게 대답하던 아델리아의 말끝이 늘어졌다.
프레이르? 프레이르 대공가?
‘프레이르 대공가라면…….’
아델리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악시덤 대공의 딸이라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