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아델리아가 비올라와 만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회귀 전, 비올라는 결혼과 동시에 제국을 떠났다.
‘그땐 내가 아카데미에 있어서 만날 기회가 없었거든.’
기억으로는 그 결혼 상대가 동맹 국가인 보르데어 제국의 황자라고 했던 것 같다.
악시덤이 황제가 되기 전이었으니까, 아카데미에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만날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건너 듣기로 화려한 미인이라고 하더니.’
소문이 간결한 편이었다. 화려하다는 말 한마디로는 표현이 어려웠다.
[다행히 아빠를 닮지 않았네요?]
그래서 누렁이는 아니라며 리그하르트가 말했다.
‘그러게. 맑은 금발이야. 카를리나처럼.’
금발의 미인이 양옆에 서자 주위가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카를리나와 친분이 있었나 봐.’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로즈힐 후작가와 프레이르 대공가의 친분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하지만, 로즈힐 후작가를 로시안트 제국에서 쫓아낸 사람이 악시덤 프레이르였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아빠랑 오빠가 살아 있으면, 로즈힐 가문도 무사할 테니까.
아델리아는 비올라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프레이르 대공가의 영애셨군요. 저도 잘 부탁드려요.”
아델리아가 천진하게 웃자, 비올라도 그녀를 따라 웃어 주었다.
카를리나가 비올라의 옆자리로 아델리아를 안내했다.
아델리아는 의자에 앉아 근사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아주 천천히 훑었다.
‘잘 봐 둬야겠어. 나도 티파티를 열어야 하니까.’
다양한 푸딩과 쿠키, 제철 과일로 만든 생과일 케이크와 크림이 듬뿍 올라간 컵케이크, 갓 구워 내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빵까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놓인 3단 케이크 트레이 위로 알록달록한 디저트들이 먹음직스럽게 플레이팅되어 있었다.
모두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의 디저트였다.
‘레이디들은 입이 작은가 봐. 죄다 토막을 내 놨네.’
[귀족 영애들이 입을 크게 벌리고 먹을 순 없잖아요?]
‘아! 그렇네?’
똑똑해, 릭! 아델리아는 감탄하며 다시 티파티 테이블 위를 다시 살폈다.
초원의 산뜻한 향기가 나는 향초에 분위기를 해치지 않을 정도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음악, 음식 사이에 놓인 화병 역시 티파티와 조화를 이루었다.
‘아, 다 기억하지 못할 것 같은데.’
[세라 양이 기억해 주겠죠.]
‘그, 렇겠지?’
아델리아가 세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귀족들이 데려온 고용인들과 기사들은 따로 자리가 마련되었다.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진 그들 사이에서도 그들만의 대화가 오고 갈 것이다.
세라는 아델리아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되나 봐.’
아델리아가 작게 미소 짓자, 세라가 주먹을 불끈 쥐며 아래로 당겼다.
마치, ‘아가씨, 힘내세요!’ 하고 소리치는 세라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 세라도 이런 쪽으로는 센스가 있으니까.’
딸랑— 카를리나가 자신의 자리에 서서 종을 흔들었다. 티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바쁘신 와중에도 초청에 응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카를리나의 낭랑한 목소리에 귀족 영애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간략하지만 예의를 갖춘 인사말이 끝나고 서로의 이름을 묻고 얼굴을 익히는 시간이 짧게 주어졌다.
카를리나와 비슷한 나이대 영애들도 있었고 아델리아와 비슷한 나이대의 영애도 있었다.
‘다양하네.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데 관심사가 비슷해질 수 있나?’
아델리아가 테이블에 둘러앉은 영애들을 찬찬히 살폈다.
‘그런데……. 누가 누구라고?’
그에 리그하르트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그러니까. ……누님 정면에 앉아 있는 영애부터 시계방향으로. 쥴리아노 백작 가문의 올리비아, 그 옆으로 네펠리 후작 가문의 다이앤, 그리고…….]
리그하르트가 능숙하게 영애들의 이름을 읊조리자, 아델리아가 감탄했다.
‘내가 이래서 널 아끼는 거야, 릭.’
[에헴!]
사람을 사귀고 인맥을 넓힌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구나.
‘대충 차 한잔 마시고 수다만 떨면 되는 줄 알았더니…….’
어쩐지 아델리아는 벌써 지치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티포트와 찻잔이 준비되었다.
평소 아델리아는 차를 그다지 즐기지 않던 터라, 티포트도 낯설고 신기했다.
쪼로로— 미리 예열해 놓은 찻잔 안으로 황금빛 물줄기가 흘러 들어와 고였다. 그것이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던 아델리아가 불현듯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자신을 관찰하듯 바라보고 있던 비올라와 눈이 마주쳤다.
응?
아델리아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할 말 있으세요, 프레이르 영애?”
“비올라. 비올라라고 불러요.”
편하게. 하며 비올라가 싱긋 웃었다.
“그럴게요. 저도 아델리아라고 불러 주세요.”
“좋아요, 아델리아.”
그리고 비올라가 상체를 숙여 아델리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카를리나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카를리나 말대로네요.”
비올라는 다시 한번 싱긋 웃은 뒤 상체를 세웠다.
“아……. 그래요?”
하하, 아델리아가 웃었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저렇게 방긋 웃는 걸 보면 나쁜 이야기는 아니겠지.
그런데 카를리나가 나에 대해 이야기할 부분이 있었던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겨우 편지 한 번 주고받았을 뿐인데?
‘아, 모르겠다.’
뒷말을 했더라도 이제부터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면 되지, 뭐!
아델리아가 해맑게 미소 지었다. 다양한 음식을 앞에 두고 있자니, 마음이 더 푸근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랬다고.
‘악시덤은 밉지만, 딸은 무슨 죄가 있겠어?’
게다가 예쁘지, 예의 바르지.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혀를 찼다.
[악시덤도 겉으로는 정의로운 전쟁 영웅이었던 거 잊으셨어요?]
‘아, 맞다.’
에이, 그래도 그 딸까지 그러려고?
[……사람 보는 눈 없다는 소리 자주 들으셨죠?]
‘……아, 아닌데?!’
들었네. 그것도 아주 자주 들으셨네. 리그하르트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누가 봐도 악역이잖아요! 올라간 눈 하며, 사람을 훑어 내는 시선 하며! 붉은 입술! 붉은 드레스!]
‘그거 편견이야, 릭.’
[어휴! 제 말이 맞다니까요?!]
어허, 아델리아가 아무 근거 없이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된다는 설교를 늘어놓았다.
사실, 아델리아는 비올라의 마지막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그녀에게 동정이 갔을지도 모른다.
‘비올라는 정치적 목적의 희생자였어.’
제 아버지에게 철저히 이용당하다가 버림받은.
[희생자요?]
‘응.’
악시덤은 자신의 딸이 성년이 되자마자 혼처를 찾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황제가 되는 일에 힘을 보태어 줄 세력을 찾아냈는데, 바로 로시안트 제국의 서쪽에 있는 보르데어 제국의 7황자였다.
‘비올라는 그 7황자와 결혼했다고 들었거든.’
[황자면 나쁘지 않잖아요?]
리그하르트의 말대로, 황자 자체는 나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악시덤은 계획대로 황자의 세력을 이용하여 조금 더 수월하게 황제 자리에 올랐으니까.
‘문제는 결혼하고 1년쯤 뒤였나.’
비올라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로시안트 제국으로 돌아왔다.
악시덤은 딸아이의 장례를 거창하게 치러 줬다. 하지만.
‘이미 죽었는데 화려한 장례식이 무슨 의미야.’
죽은 이유에 대해서는 확실히 아는 게 없었다.
그저 그 일 이후로 로시안트 제국과 보르데어 제국의 동맹 관계가 깨졌다는 것 말고는.
[냄새가 나네요.]
‘그렇지.’
아델리아가 비올라를 슬쩍 바라보았다. 다른 영애들에게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도도하게 찻잔을 들어 올려 입술을 축이고 있었다.
그때, 또 다른 시선이 느껴졌다.
아델리아가 고개를 휙 돌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어린 영애와 눈이 딱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어린 영애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돌렸다.
‘누구랬더라. 오, 올, 올리지? 올리브? 올, 뭐였는데…….’
[올리비아 쥴리아노.]
‘아, 맞다. 올리비아!’
아까부터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우리 누님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연무장의 시커먼 녀석들뿐일 텐데.]
아델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봤더라.’
곱슬거리는 붉은 갈색의 머리카락과 그 머리카락을 반으로 묶어 둔 흰색 레이스가 잘 어울리는 귀여운 아이였는데, 긴장한 모양인지 눈동자가 이리저리 초조하게 움직였다.
‘저 영애도 나처럼 처음인가 봐!’
어쩐지 동료를 만난 것 같아 반갑기까지 했다.
비슷한 나이 같기도 했고, 이 기회에 또래 여자 친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아델리아는 올리비아를 보며 그런 희망을 꿈꿨다.
티파티의 분위기가 조금씩 무르익었다.
접시는 비워질 틈 없이 다시 새로운 음식들로 채워졌다.
‘첫 티파티치고, 나 잘하는 거 같지 않아?’
[아주 순조롭네요.]
‘그렇지?’
헤헤, 아델리아는 달콤하고 포근한 티파티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이대로 조용히, 마무리까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다른 티파티도 궁금해졌어. 가문마다 분위기가 다르겠지?’
한 번 겪어 봤으니 두 번은 더 쉬울 터.
벌써 다음 티파티는 어떤 가문에서 열릴지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그런데 그때.
“제가 평화롭고 아름다운 이 티파티에 조금의 즐거움을 더해 볼까 해요.”
옆에 앉아 있던 비올라가 테이블 위로 팔꿈치를 올리며 말했다.
“즐거움이요?”
비올라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영애가 물었다.
비올라가 매혹적인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네. 제가 아버지께 받은 명마가 한 마리 있는데.”
비올라가 짝, 짝.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러자 정원 끝에서 말 한 마리가 기사에게 이끌려 들어왔다.
“저 말을 걸고 시합을 하나 제안할까 해요. 당연히.”
비올라는 자신의 깍지 낀 손등 위로 턱을 괴며 눈매를 접어 웃었다.
“모두들 참여해 주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