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시합? 이게 또 무슨 말이야?
‘릭, 티파티는 되게 잔잔할 줄 알았거든? 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자극적이네?’
시합이래, 시합!
[오오! 시합! 여자들의 티파티는 사내들의 투기장 같은 건가 봐요!]
‘어? 그런 건가?’
아닌데,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아델리아는 세라에게 들은 티파티 이야기에서 ‘시합’이라는 단어를 들어 본 기억이 없었다.
‘세라가 빠트렸나.’
몰라, 나도 티파티는 처음이니까!
게다가 티파티 주최자인 카를리나의 표정을 살폈지만, 이미 이야기가 되었던 모양인지 당황하기는커녕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이런 티파티, 저런 티파티 다양한가 보지, 뭐.’
[시합! 시합!]
아델리아와 리그하르트는 호기심으로 들떴다.
확실히, 평화롭기만 한 분위기에 새로운 즐거움이 될 만한 이야기였다.
‘어차피 구경만 하면 되니까.’
사실 아델리아의 목표는 티파티 분위기를 익히는 데 있었다.
괜히 나서서 눈에 띄는 행동을 한다거나 사고를 칠 생각은 없었다.
‘특히 저 비올라라는 사람. 이 분위기를 단번에 바꾸는 걸 보면 보통내기가 아니야.’
그냥 예쁘고 그냥 친절하며 그냥 예의 바른 귀족 영애가 아니었다.
‘악시덤의 딸이니까 당연한 걸지도.’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말했다.
[전형적인 악녀라고요!]
‘그건 모르겠고.’
일단 지켜보자고.
아델리아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기분으로 시합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비올라는 붉은 갈기가 근사한 말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합의 룰은 간단해요. 저 훌륭한 명마를 가질 수 있는 가문이라는 걸 증명하기만 하면 돼요.”
“증명이라면 어떤 방식으로요?”
그러자 비올라가 살며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이 자리, 우리 영애들을 호위하기 위해 모인 기사님들이 많잖아요. 토너먼트 형식으로 간단하게 검술 대련을 하는 건 어떨까요?”
비올라의 말이 끝나자마자, 영애들은 놀란 얼굴로 웅성거렸다.
“비, 비올라!”
카를리나가 놀란 목소리로 비올라를 불렀다. 아델리아는 당황해하는 카를리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건 미리 이야기된 부분이 아닌 것 같은데?’
난감해하는 카를리나에게 비올라가 달래듯이 말했다.
“괜찮아요, 카를리나. 단순한 대련일 뿐이에요. 기사님들께 대련은 숙명과도 같은 거 아니겠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분명, 이 지루한 티파티의 활력소가 되어 줄 테니까.”
지루해? 아델리아의 눈이 갸름해졌다.
‘친구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것도 절친이라고. 그런데 저런 말을 서슴없이 한다고?
티파티에 대해 잘 모르는 아델리아도 티파티를 지루하다 평가하는 말이 사교계에서 얼마나 치명적인 말인지 알고 있었다.
카를리나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괜히 가슴께에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다시 비올라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제복을 갖춰 입은 프레이르 대공가의 기사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와, 누가 보면 전쟁 난 줄?’
[이거 어째, 일이 요상하게 돌아가는데요?]
따사롭던 티파티의 분위기는 단박에 얼어붙었다.
지금 이 협소한 자리에서 토너먼트라니. 그것은 이 티파티를 완전히 끝장내겠다는 소리와 다를 게 없었다.
‘아, 정말……. 내 생애 첫 티파티가…….’
아델리아는 괜히 울컥해졌다.
‘설치지 않으려 했는데…….’
[어쩌시려고요?]
아델리아가 손을 들어 말했다.
“토너먼트니, 뭐니. 괜히 복잡하게 그러지 말고요. 그냥 승자전 방식으로 가시는 건 어떨까요?”
그러자 비올라의 시선이 아델리아에게로 향했다.
“승자전?”
“네, 장소도 토너먼트 대결을 펼치기엔 협소하고. 차라리 일 대 일로 붙어서 승리한 사람이 계속 대결을 이어 나가 마지막에 우승한 사람이 최종 우승자가 되는 방식이죠.”
아델리아의 말을 듣고 있던 비올라가 눈꼬리를 내리며 걱정스레 말했다.
“그럼 처음 승리한 사람이 불리한 거 아닌가요? 결국 최종 우승을 하기도 전에 지쳐 버릴 텐데?”
그러자 아델리아가 비올라를 쳐다보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렇게 기사들이 걱정되면, 경기 자체를 취소하시면 되고요.”
어차피 이미 공평한 게임은 물 건너갔다.
미리 결투가 있을 거라는 걸 알고 단단히 무장하고 온 대공가의 기사들과 단순 호위로 따라온 기사들은 애초에 마음가짐 자체가 달랐다.
‘그래 놓고 불리는 무슨. 이런 식이면 백전백패지.’
아, 물론 우리 아렌트랑 데프는 빼고.
‘아무렴. 매그너스 기사단은 다르다고.’
아델리아가 비올라를 쳐다보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다행히도 오러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오러가 발현된 실력자는 없는 것 같아.’
아델리아가 기사들을 쭉 훑어보며 속으로 안도했다.
비올라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렇네요. 듣고 보니 승자전 방식이 더 재밌겠어요.”
비올라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엘투.”
비올라가 기사 한 명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대열을 맞춰 서 있던 기사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비올라가 턱짓을 하자, 기사는 티파티가 마련된 장소 반대편으로 걸어가 널찍한 공터에 자리 잡고 섰다.
한가로운 티파티가 열린 정원, 그 한편으로는 긴장이 감돌았다.
비올라는 화사하게 웃으며 영애들을 돌아보았다.
“자. 첫 번째 도전자는 어느 가문에서 나오실 거예요?”
그때, 더는 지켜볼 수 없었던 카를리나가 나섰다.
“비올라.”
“아니, 낯빛이 왜 이래요? 카를리나, 카를리나도 동의한 일이잖아요.”
“시합에 동의한 건 맞지만, 그 시합의 내용이 결투라고는 안 했어요. 미리 알았다면 동의하지도 않았을 거고요.”
그러자 비올라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결투가 아니에요, 카를리나. 고작 대련일 뿐이에요. 무슨 시합으로 할까 하다가 대련을 떠올린 건 얼마 되지 않아서 말하는 시기를 놓쳤고요. 결투와 대련은 달라요. 사람이 다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카를리나.”
“하지만 비올라.”
그때, 아델리아가 말했다.
“대련이니까 진검 말고 목검으로 하시는 건 어떨까요? 여기 어린 영애들도 있고 혹시라도 사고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다시금 들려오는 아델리아의 목소리에 비올라의 표정이 잠시 흐트러졌다.
그러다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서 몸을 돌렸다.
“그래요. 대련이니까. 좋은 의견 고마워요, 에스테르 영애.”
“별말씀을.”
아델리아라고 부르겠다던 비올라는 다시금 자신을 ‘에스테르 영애’로 부르고 있었다.
‘내 말에 기분이 상한 거 같지?’
[항상 느끼는 거지만, 악시덤이나 그 핏줄이랑 누님은 상극이에요.]
‘헤헤.’
[웃을 일이 아닐 텐데요…….]
비올라는 우아한 미소를 머금은 채 하녀들과 기사들이 대기 중인 곳을 훑었다.
“은색 제복은 어느 가문이죠?”
그러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어린 영애가 입을 열었다.
“저, 저희 가문……, 입니다. 공녀님.”
곱슬거리는 적갈색 머리카락이 사랑스러운 쥴리아노 백작가의 올리비아가 손을 들었다.
손끝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아휴, 안쓰러워. 저 떠는 것 좀 봐. 저러다 거품 물고 쓰러지겠어.’
비올라가 흐음, 콧소리를 내며 턱을 조금 치켜들었다. 반쯤 내리깐 시선이 올리비아를 탐색하듯 훑었다.
“쥴리아노 영애. 어때요? 즐거운 티파티를 위해, 영애의 호위 기사가 첫 도전자가 되어 주면 좋겠는데. 운이 좋다면 제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훌륭한 말을 얻게 될 거예요.”
그러자 올리비아의 떨리는 고개가 자신의 호위들로 향했다.
호위들은 이미 결연한 표정으로 각오를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선뜻 그러겠다고 말하지 못했다.
현장 분위기가 너무도 두렵기도 했고, 자신의 성급한 결정으로 호위 기사들이 다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아이의 턱이 떨렸다.
그때였다.
“우리 가문이 먼저 도전하겠습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그에 가장 놀란 사람은 카를리나였다.
“아, 아델리아.”
아델리아는 그런 카를리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천진하게 웃어 보였다.
“헤헤, 괜찮아요. 아시다시피 요즘 에스테르 공작가의 매그너스 기사단이 출정을 안 나가고 있거든요. 아마 몸이 근질근질할 거예요.”
아델리아는 다시 비올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프레이르 공녀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첫 번째 도전자는 제 호위 기사로 따라온 데프 경이 나섰으면 하는데요.”
그러자 비올라가 고개를 기울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분위기를 살릴 줄 아는 분이시네요, 에스테르 영애는.”
“과찬이십니다.”
[안 나서시겠다면서요.]
‘시끄러. 그럼 저 아이가 기절할 때까지 내버려 둬?’
그렇게 되면 저 올리비아라는 아이의 평판도, 이번 티파티도 모조리 망하게 되는 건데?
‘그렇게 내버려 둘 순 없는 거잖아.’
아델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라와 아렌트, 데프가 대기 중인 장소를 쳐다보며 말했다.
“데프. 기대해도 되겠지?”
그러자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데프가 걸어 나왔다.
“분부만 하십시오, 아가씨. 그동안의 훈련 성과를 제대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역시 듬직해.
데프는 제복이 터질 듯 커다란 근육을 자랑하며 대공가의 기사가 서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데프의 근육은 단순히 크기만 키운 근육이 아니다. 촘촘한 근육질은 마치 바위와도 같은 강도를 가졌다.
데프가 자신의 근육을 또 다른 무기라고 부르는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아델리아는 데프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참 잘 컸다니까?’
[…….]
얼마 지나지 않아, 로즈힐 후작가의 연무장에서 공수해 온 목검이 각 기사들에게 제공되었다.
데프도 목검을 전달받았다. 데프의 손에 들어가니 목검이 아니라 불쏘시개 같은 느낌이 강했다.
푸하, 아델리아가 속으로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우리 기사는 준비가 끝난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럼. ……시작해 볼까요?”
비올라가 옅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