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카를리나가 대치 중인 기사 둘을 바라보다, 비올라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비올라…….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카를리나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올라는 그저 대련을 앞둔 기사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자의 몸으로, ……사업이라고요?
카를리나가 유일하게 자신의 꿈을 털어놓았던 사람이 바로 비올라였다.
-네, 비올라. 사업을 성공시키고 후작가도 이어받을 생각이에요.
제국법에 따라 귀족 작위는 여자가 승계받지 못했다.
그래서 후계가 없는 상태에서 가문에 여인들만 남은 경우, 작위는 소멸하고 재산은 나라에서 환수해 갔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작위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특수 계승법’이라는 게 있대요.
카를리나는 법적인 부분을 찾아 가며 방법을 모색했다.
-가문의 오래된 ‘가업’을 이어받으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특수 계승법’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는 구세주라도 만난 것 같았다. 가문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켜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셈이니까.
비올라는 카를리나의 손을 잡으며 토닥거렸다.
-……힘들지 않겠어요? 성공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서요? 여자가 사업을 물려받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가문까지? 카를리나…….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랬다. ‘특수 계승법’이 시행되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자가 가업을 물려받고 후계로서 인정받는 경우는 한 차례도 나오지 않았다.
여자가 사업에 뛰어드는 일이 거의 없었고 뛰어든다고 하더라도 시작부터 사회적 편견에 막혀 버린 탓이었다.
비올라가 걱정된다며 눈꼬리를 내린 채 말했다.
-그러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좋은 결혼 상대를 찾는 건 어떨까요, 카를리나. 내가 도와줄게요.
비올라의 진심 어린 걱정에 잠시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카를리나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왜, 하필 오늘…….’
그 누구보다 카를리나의 절실함을 잘 알고 있는 비올라가 카를리나가 쌓아 올린 것들을 무너트리려 하고 있었다.
딸랑— 비올라가 테이블 위의 종을 가볍게 흔들었다.
티파티의 시작을 알리던 종이 대련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종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두 사내는 잔디밭을 짓이기며 바닥에서 뛰어올랐다.
딱, 따악—!
목검은 진검 못지않게 빠르고 매서운 소리를 내며 맞부딪혔다. 생명력 넘치던 푸른 잔디밭이 그들의 발길 아래 움푹 패며 거뭇거뭇한 흙바닥이 드러났다.
어떤 영애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대련을 구경했고, 또 어떤 영애는 눈매를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으음, 아델리아가 속으로 침음을 삼키며 티파티의 분위기를 살폈다.
‘확실히……. 티파티에 대련은 아닌 것 같아.’
[그렇네요. 저 기사들이 죽기 살기로 붙어서 그런가. 단순한 대련처럼 느껴지질 않아요.]
어쩐지, 전쟁터에서 마주친 적군 같달까. 목검일 뿐인데도, 두 기사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몹시도 거칠었다.
‘그러게 말이야.’
아델리아도 리그하르트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은 한동안 이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승리의 저울은 데프를 향해 기울어지고 있었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프레이르 가문의 기사가 검을 휘두르며 데프를 압박했다. 그러나 평정심을 잃은 검은 상대에게 기회나 다름없었다.
데프가 기다렸다는 듯 한 걸음 물러서더니 발을 들어 올려 목검과 함께 프레이르 기사의 몸통을 정확히 걷어찼다.
“커억!”
프레이르 가문의 기사가 거대한 짐승에게 들이박힌 것처럼 정원 끝까지 밀려 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힘겹게 다시 몸을 일으켰지만 결국, 목검을 내려놓았다. 고개를 푹 숙인 기사가 비올라가 앉아 있는 곳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져, 졌, 습니다…….”
승부가 났다.
땀으로 범벅이 된 프레이르 가문의 기사와는 달리, 데프는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우뚝 서서 말했다.
“다음.”
아델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거 봐. 어디서 저런 허세만 배워 와서는.’
[누님한테서 배운 거 같은데요?]
‘난 저런 적 없는데?’
아델리아가 뻔뻔한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였다.
그때, 다시 프레이르 대공가의 기사 중 하나가 나섰다.
가볍게 예를 차린 뒤, 다시 목검이 부닥쳤다. 모두가 숨죽여 대련을 지켜보았다.
이미 한 사람과의 대련을 마친 데프였지만, 기세는 처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 둘, ……셋하고 넷.
데프는 모두 다섯의 기사에게서 승리를 거두었다.
허억, 헉, 헉, 헉.
“다, 다음…….”
데프에게도 드디어 한계가 찾아온 모양이다. 독이 오를 만큼 오른 프레이르 가문의 기사들을 무려 다섯이나 상대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큼직한 데프의 근육들이 꿈찔꿈찔 경련하는 게 보일 정도였다.
아델리아가 이번에는 아렌트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렌트는 이미 몸을 풀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다음은 아렌트를 내보내면 되겠어.’
그때였다.
무표정으로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비올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에스테르 공작가의 기사로군요. 소문의 ‘매그너스’ 기사단의 실력을 직접 보고 있자니 경이로울 정도네요.”
비올라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여유롭고 따사롭게 웃었다.
아델리아가 비올라의 표정을 살폈다.
‘뭐지? 이쯤에서 끝낼 생각인가?’
뭐, 사실 이쯤에서 끝난다고 하더라도 아쉬운 것은 없었다. 티파티의 분위기가 더 망쳐지기 전에 끝난다면 오히려 다행이었다.
비올라가 말을 이어 갔다.
“너무 일방적인 대련이다 보니 제가 기대했던 즐거움을 느끼기가 힘드네요. 여기 모여 있는 다른 분들도 같은 생각이실 거예요.”
그렇지요? 하고 빙글 웃었다.
“그래서 새로운 제안을 할까 하는데.”
새로운 제안? 아델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끝내는 게 아니라, 다른 제안이라면 먼젓번 제안보다 강도가 셀 거야.’
모두가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 누구도 그만하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주최자인 카를리나가 비올라를 막아 보려 나섰다.
“비올라.”
카를리나가 비올라의 팔을 잡았다.
“이제 그만해요.”
그에 비올라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림처럼 웃었다.
“어머, 카를리나. 그만하라뇨? 지금 에스테르 가문의 기사께서 연승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없던 일로 치자는 거예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좋아요.”
좋다고? 아델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비올라는 환하게 웃으며 데프를 가리켰다. 선심을 베푸는 듯이 인자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이 승자전의 우승은 에스테르 공작가의 것으로 하겠어요.”
오? 아델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금방 수긍한다고?
그 모양새가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든 데프가 여러 명의 기사를 상대한 보람은 있었다.
숨을 헐떡이던 데프도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그에 아델리아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잘했어, 데프! 받아, 받아도 돼! 당연히 그럴 자격 있어!’
그런 아델리아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데프가 씨익 웃으며 가슴을 내밀었다.
‘차 한잔 마시러 왔다가 말 한 마리 얻어 가게 되었네.’
이게 웬 횡재야. 아델리아가 키득거렸다.
비올라가 승자를 발표하자, 동시에 박수가 쏟아졌다.
이제 끝이 났다 생각한 영애들이 모두 안도하는 표정으로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비올라는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대신, 이대로 끝내면 너무 아쉬우니까.”
비올라가 입구에 서 있던 기사를 향해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그러자 입구에서 대공가의 제복을 입은 사내 하나가 걸어 들어왔다.
순간, 안도하고 있던 영애들의 얼굴이 다시 새하얘졌다.
‘어……?’
아델리아도 놀라 눈을 크게 뜨며 걸어 들어오는 기사를 응시했다.
데프와 나란히 세워도 전혀 밀리지 않을 만큼, 거대한 체구였다. 아니, 어쩌면 데프보다 더 클지도.
체격이 크다고 하여 전투에서 무조건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일단 저 기사는 생긴 것부터 해서 뿜어내는 기세가 사나웠다.
‘무엇보다 데프는 잘생기기라도 했지.’
지금도 저 기사의 등장으로 어린 영애들은 다시금 긴장으로 움츠러들었다.
대공가의 기사가 점점 가까워지자,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그리고 아델리아의 표정 또한 덩달아 심각하게 가라앉았다.
[누님……. 저 기사…….]
리그하르트 역시 무언가를 눈치챈 듯 말했다.
아델리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눈치챘어. ……그 녀석이야.’
아델리아가 그리젤 길드장을 찾아갔던 투기장.
그 투기장의 무대 한가운데서 아이들을 학살하고 있던 검투사였다.
‘저 검투사가 왜 프레이르 대공가에 있는 거지……?’
아니, 언제부터 학살을 위해 길러진 살인귀가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 무리 속에 끼어 있을 수 있는 거지?
아델리아가 의문을 가지고 그를 주시했다. 그때, 비올라의 말이 이어졌다.
“목검 대련은 충분히 볼 만큼 봤고. 에스테르 공작가의 매그너스 기사단의 실력도 충분히 봤어요. 그럼 이제, 진검승부도 한번 봐야 하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