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알고 봤더니, 에스테르 영애는 소문보다 더 대단하더라, 하고요.”
아델리아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코끝을 찡긋했다.
아델리아의 말에 귀족 영애들 사이로 옅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확실히, 아델리아의 말이 이어질수록 공포에 사로잡혔던 분위기가 점차 옅어졌다.
아델리아는 걱정하지 말라며 미소 지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일곱 살이에요. 저 기사님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지만, 기사도를 아시는 분께서 일곱 살을 상대로 비열하거나 험악하게 굴지도 않을 거고요.”
안 그래요? 하고 묻자, 영애들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조금 전 대련도 아무 일 없이 잘 끝났잖아요.”
“그렇죠? 에스테르 영애는 검술도 배웠다고도 하고.”
“사실 궁금하긴 해요. 에스테르 영애의 실력이.”
저도요. 하며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영애들이 서서히 입을 열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아델리아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비올라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게다가 프레이르 공녀께서 직접 준비하신 시합인데, 설마 무슨 일이 벌어지기라도 하겠어요?”
아델리아의 말에 비올라의 한쪽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방금 아델리아가 내뱉은 말 한마디로, 이후 벌어질 모든 사태의 책임이 비올라의 책임이 돼 버린 것이다.
비올라가 어금니를 슬며시 짓씹었다.
‘마음에 안 들어.’
사실, 지금 이 분위기는 비올라가 원하던 분위기가 아니었다.
지금쯤이면 티파티가 엉망이 되고 영애들이 새파랗게 질린 채,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갔어야만 했다.
새로 불러온 저 기사도, 쟁반 위 저 보석도.
‘혹시나 하고 챙겨 온 것은 맞지만 꺼내 놓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티파티는 자신의 의도와는 완벽하게 다른 방향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저 아이 하나 때문에.
‘아델리아 에스테르…….’
비올라의 날카로운 시선이 아델리아에게로 향했다.
생각해 보면 저 어린아이가 나서면서부터였다.
자신이 주도하던 분위기의 흐름을 틈만 나면 톡톡 끊어 댔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유도했다.
그 누구도 자신의 말에 토를 달지 못하고 반대하지 못했는데, 저 아이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다.
‘공작가를 등에 업고 오만하게 나서길 좋아하는 아이로구나.’
잠깐. 어쩌면 좋은 기회일지도…….
비올라의 시선이 날이 바짝 선 장검을 든 검투사에게로 향했다.
저 기사의 검날에 꼴 보기 싫은 공작가의 어린아이가 처참히 무너지는 꼴이 꽤 볼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올라의 입꼬리가 아주 느릿하게 올라갔다.
“다녀올게요!”
아델리아가 손을 흔들며 코끝을 찡긋하자, 영애들이 조심하라며 걱정하듯 말을 건네었다.
말을 마친 아델리아가 기사가 서 있는 정원의 한편으로 향했다.
“아, 아가씨! 차라리 제가…….”
데프가 놀란 얼굴로 아델리아의 앞을 막았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목검을 든 손등을 토닥거렸다.
“이제 쉬어, 데프. 고생했어. 이제 저 말은 네 거야. 직접 타든 팔아먹든 알아서 해.”
비올라가 다시 표정을 바꾸었다. 눈썹 끝을 한껏 내려 진심으로 걱정하는 얼굴로 말했다.
“에스테르 영애, 다시 생각해요. 영애께서 다치기라도 하면 에스테르 공작께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그러자 아델리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씀드릴 게 뭐가 있겠어요? 아무 일도 없을 건데요.”
아무 일도 없어? 비올라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상대는 영애보다 두 배 이상 더 큰 성인 남자예요. 거기에다 패한 적이 없는 무패의 기사고요.”
“그럼 오늘 첫 패배를 맛보겠네요.”
아델리아가 당연한 게 아니냐는 듯 어깨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검투사가 서 있는 방향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누님……. 일부러 더 도발하시는 거죠!]
성격 진짜 나빠!
리그하르트의 말에 아델리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히죽거렸다.
‘한 번 더 남았어.’
[뭐, 뭐가요?]
‘도발.’
그리고는 데프의 손에서 목검을 가져왔다.
“전 이걸로 충분해요.”
저 기사를 상대하는 데 무슨 진검까지 필요하겠냐며 아델리아가 하하하, 천진하게 웃었다.
[누님!]
아델리아가 미소 지으며 비올라에게 허락을 구했다.
“지금은 저한테 맞는 진검도 없고, 이 목검이 딱인 것 같거든요. 괜찮을까요? ……프레이르 공녀님?”
그러자 비올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 아가씨!”
데프가 기함하며 소리쳤다. 비올라 역시 혀를 찼다.
“저는 분명히 말렸어요.”
“네네.”
아델리아가 무성의하게 대답한 뒤 손목을 이용해 목검을 가볍게 돌리며 걸어갔다.
저 멀리, 눈물을 줄줄 흘리는 세라가 보였다. 그 옆으로 잔뜩 심각해진 아렌트도.
‘에헤이, 걱정 말라니까.’
우리 세라 저러다 눈 퉁퉁 불겠네.
아델리아가 걱정 말라는 듯 크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 행동이 세라의 눈물샘을 더 자극했는지, 세라는 흐앙—!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가씨 어떡해! 세라의 절규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이런.’
[그냥 빨리 끝내시는 게 낫겠어요.]
‘그러자.’
아델리아는 검투사 앞으로 걸어가 섰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무지막지한 체구였다.
흑갈색의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을 한데 묶고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릿하게 웃고 있는 투박한 입술이…….
‘와, 열받게 생겼네. 지금 저거 나 비웃고 있는 거지?’
[네, 누님!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어린애로군. 어떻게 처리할까? 단칼에 목을 날리기엔 아깝고. 실컷 조롱하고 창피를 줄까? 크크크,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
정말 독심술이라도 하는 것 같은 리그하르트의 사실적인 연기에 아델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그거, 네 속마음…….’
딸랑—
그때, 비올라가 종을 울렸다. 대결을 시작하라는 신호였다.
프레이르 가문의 기사는 신호를 기다렸다는 듯이, 커다란 장검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아델리아의 눈이 갸름해졌다.
‘느리네.’
그리고 곧장 쿠웅—! 커다란 검이 정원 바닥에 내리꽂혔다.
꺄악! 곳곳에서 놀란 귀족 영애들의 비명이 튀어나왔다.
쯔쯔. 묵직하게 떨어지던 검을 피해 한 걸음 비켜났던 아델리아가 혀를 찼다.
“검이 아무리 크고 예리해도.”
아델리아는 들고 있던 목검으로 바닥에 박혀 있는 장검의 옆면을 톡톡 두드렸다.
“상대에게 닿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지.”
아델리아의 말에 검은 눈동자를 번뜩이던 검투사가 빠르게 장검을 뽑아냈다.
“목이 떨어져 나가도 그런 말을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작은 목소리여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는 않았겠지만, 아델리아에게는 정확히 들렸다.
아델리아가 눈썹을 들썩였다.
‘이놈 봐라? 릭! 네가 한 독심술이 맞았어! 저놈이 내 목을 노리고 있어!’
[아, 앞을 보시라고요!]
‘보고 있어.’
후웅— 장검이 큰 원을 그리며 다시 한번 아델리아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허억! 지켜보던 사람들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아델리아가 상체를 가볍게 뒤로 젖히면서 이번에도 공격을 피했다. 공격이 재차 실패로 돌아가자, 검투사가 턱을 불뚝거리며 검을 치켜들었다가 내리찍었다.
육중한 검투사의 몸짓에 따라 검날은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며 정원 흙바닥 여기저기를 찧어 댔다.
쿵! 쿵! 쿠웅!
그에 맞춰 폴짝폴짝, 껑충껑충. 아델리아의 걸음도 경쾌하게 움직였다. 가벼운 발걸음에 드레스 자락이 꽃잎처럼 팔랑거렸다.
검투사의 이마로 검붉은 핏대가 솟았다.
“빌어먹을.”
작게 읊조리는 욕설에 아델리아가 푸흡, 도발하듯 웃었다.
“덩치에 비하면 날렵한 편이긴 한데, 그래도 그거 가지고는 날 못 잡아.”
그러자 도발이 제대로 먹혀들었는지 검투사가 어금니를 짓이기며 억눌린 음성을 토해 냈다.
“쥐새끼 같은!”
“뭐?”
이게 정말 미쳤나. 아델리아가 어이없다는 듯 탄식했다.
“쥐새끼?”
다행인지 불행인지, 거리가 제법 있었던 탓에 다른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어금니를 악문 아델리아가 작게 말했다.
“너 오늘 잘 걸렸다.”
그러자 흙바닥에서 검을 뽑아내던 검투사가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빠드득, 아델리아가 목검을 고쳐 잡았다.
“적당히 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아델리아의 붉은 눈동자가 화마에 휩싸인 숲속처럼 강렬하게 타올랐다.
한껏 미소를 끌어 올려 웃으며 작게 속삭였다.
넌 오늘,
“뒈졌어.”
***
“꽤 오래전부터 왕래했었군.”
카르세스는 루드가 건넨 보고서를 살피며 말했다.
보고서에는 비올라와 카를리나의 관계에 대해 적혀 있었다.
데뷔탕트 이후, 두 사람은 급격히 친해졌다.
“당시 로즈힐 영애의 피아노 교사가 노렌 후작 부인이었는데, 후작 부인의 소개로 두 사람이 안면을 틔웠다고 했습니다.”
“노렌 후작 부인이면, 중립파 귀족일 텐데.”
“그렇습니다.”
“중립파 귀족이 황제파와 귀족파 집안을 이어 줬다?”
“중립파라서 가능한 일이고, 중립파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일이라 생각됩니다.”
“숙부께서 꽤 깊은 곳까지 손을 뻗으셨나 본데.”
카르세스가 시계를 쳐다보았다.
하늘의 태양은 머리 꼭대기에서 머물고 있었다.
“한창이겠군.”
오늘이었다. 에스테르 공녀의 첫 티파티가.
에스테르 공녀는 잔뜩 들뜬 얼굴로 말했다.
-로즈힐 후작가에서 티파티 초대장을 보내 주셨거든요? 저, 거기 꼭 가야 해요!
철창을 부러트려 기사들을 때려눕히던 장면이 강하게 뇌리에 박혔기 때문일까.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군.’
얌전하게 앉아 찻잔을 홀짝이는 에스테르 공녀라니.
“잠깐 보고만 올까…….”
차분하고 다소곳한 모습의 에스테르도 궁금하니까.
카르세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옷걸이에 걸린 외투를 집어 들고서 집무실을 유유히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