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대련이라는 게 이렇게 재밌는 거였나?
겁에 질려 아델리아의 대련을 지켜보던 영애들은 어느새 주먹을 꼭 쥐고 대련의 긴장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순수하게 대련에 빠져들었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이 빠져든 이유는 오롯이 아델리아 때문이었으니까.
딱, 따악! 퍽, 퍽! 터엉—!
시원한 타격음이 들릴 때마다 영애들은 어깨를 들썩거렸다.
아델리아는 모두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오로지 ‘복수’에만 전념 중이었다.
물론, 복수 뒤에 따라올 부가적인 보너스 역시 그녀의 목적이긴 했지만.
“다시 말해 봐. 뭐? 쥐새끼? 쥐새끼?!”
“컥, 커억! 자, 잠깐!”
검투사는 기다란 장검을 인정사정도 없이 휘두르면서도 아델리아에게 한 번을 닿지 못했다.
아델리아는 제복과 견갑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급소만 집요하게 노려 목검 끝으로 찔러 댔다.
“잠깐은 무슨.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넌 적군 앞에서도 잠깐이라고 하냐?”
아, 애들만 상대해서 전장에 서 본 적이 없으려나? 그러니까 이렇게 굼뜨지.
“그러고도 네가 무슨 기사야?”
너한테는 기사 제복조차 아까워.
이 검투사 앞에서 ‘잠깐’을 외쳤을 수많은 아이들이 떠오르자, 다시 머리끝까지 피가 쏠렸다.
“넌 더 맞아야 해.”
죽이지는 않을 거지만,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만 맞자.
아델리아는 검투사이자, 프레이르의 기사인 이 사내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진검승부라고는 해도 사망자가 나오는 순간, 카를리나의 티파티를 망치게 될 테니까.
그러나 그런 아델리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투사는 아델리아를 정말 죽이겠다는 작정으로 검을 휘둘렀다. 아델리아는 비웃었다.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를 데려다 놔도 너보단 빠르겠다. 그리고 그 일곱 살이 나야.”
“언제까지 도망만 칠 겁니까!”
“응? 도망이라니? 누가 도망쳐? 그럼 아까부터 널 두들겨 패고 있는 사람은 누군데? 나잖아, 나!”
으아아아! 비이이이러먹을!
성질이 날 대로 난 검투사가 소리를 지르며 속도를 올렸다.
그러나 검투사의 움직임은 더욱 느려졌다. 체구에 비해 지구력이 한참은 아래였다.
“그러게. 몸집만 키우니까 벌써 지치지.”
내가 나설 필요도 없었겠는데? 아렌트한테 시켜도 가뿐히 이겼겠어.
[보석 때문에 나서신 거잖아요.]
‘어허, 아니라고.’
아델리아는 리그하르트의 말을 무시하며 기세를 몰아 더욱 공격에 집중했다.
‘죽이지는 않고,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죽여 달라고 빌고 싶을 만큼!
***
조금 떨어진 티테이블. 영애들은 그 광경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작은 체구의 여자아이는 대련이 아니라 춤을 추는 듯했다.
“멋지다…….”
쥴리아노 백작가의 올리비아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주위의 다른 영애들 역시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델리아가 가볍게 튀어 올랐다 내려앉으면 드레스가 꽃잎처럼 펼쳐졌다.
민트색 드레스를 감싼 자카드 레이스는 햇살을 받아 꽃잎 위 이슬처럼 반짝였는데, 큼직한 검날이 꽃잎 같은 아이를 베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단 한 순간도 닿지를 못했다.
검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지금 누가 우세한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중간중간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것도 같았는데, 애석하게도 거리가 멀었던 탓에 들리지는 않았다.
“검술이라는 거……. 생각보다 야만적이기만 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어떤 영애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자 주위 다른 사람들도 동조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에스테르 영애가 자신의 소문을 똑바로 퍼트려 달라고 한 이유를 알겠네요. 검술을 배우면 누구나 저 정도로 강해지나요?”
몇 배나 커다란 사내를 가지고 놀 정도로?
“설마요. 에스테르 영애는 천재라고 들었어요. 그래도 검술이라는 게 궁금해지기는 하네요.”
맞아요, 맞아. 영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묘한 긴장감에 눈을 뗄 수 없네요.”
“맞아요, 프레이르 공녀께서 좋은 볼거리를 알게 해 주셨어요.”
영애들이 환하게 웃으며 비올라를 추켜세웠다.
그러나 비올라는 웃지 못했다.
자신의 마지막 카드였던 검투사마저 아델리아의 손에 농락당하고 있는 것이 너무도 또렷하게 보였던 탓이었다.
비올라가 의자의 철제 손잡이를 저도 모르게 움켜쥐었다.
한동안 일방적인 아델리아의 공격이 이어졌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쿠웅—!
“세상에! 에스테르 영애가 정말 이겼어요!”
올리비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사람들의 시선은 바닥에 널브러진 검투사가 아니라 그의 옆에 우두커니 선 작은 아이에게로 향했다.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목검만 달랑 들고 서 있는 아델리아에게로.
아델리아는 목검 끝으로 바닥에 엎어진 검투사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어때? 많이 아파?”
“끄어어…….”
오, 되게 아픈가 봐. 대답도 못 하네?
검투사는 짧은 신음을 끝으로 의식을 잃었다.
“아가씨! 대단하십니다!”
데프가 달려왔다. 아델리아가 씨익 웃었다.
“알아, 데프.”
“다치신 곳은요?!”
“없지, 당연히. 날 뭐로 보고.”
그리고 데프에게 목검을 건네준 뒤, 비올라를 향해 곧장 걸어갔다.
비올라는 의자에 앉은 채, 걸어오는 아델리아를 응시했다. 손에 힘이 들어가고 어금니를 짓씹느라 턱이 꿈틀거렸다.
비올라 앞에 선 아델리아가 그녀와 눈높이를 똑바로 맞추며 천진하게 물었다.
“제가 이긴 것이 맞지요? 프레이르 영애?”
아델리아의 물음에 비올라는 화려하게 미소 지었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군요. 소문이 에스테르 영애의 실력을 제대로 담지 못하고 있었네요.”
비올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붉은 입술을 한껏 끌어 올리며 말했다.
“두 번째 시합의 승자 역시 에스테르 공작가에서 나왔군요. 다른 가문에서도 욕심내셔서 도전했다면 더 볼거리가 풍부했을 텐데, 아쉬워요.”
비올라가 여러 가문의 영애들을 내려다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곱게 휘어진 눈매 속 눈동자에는 웃음기라곤 없었다.
오히려 한심하다는 듯 상대를 업신여기는 시선이었다.
비올라의 말에 모두들 시선을 피했다.
‘에스테르 영애가 아니었다면 우리 가문 기사들은 심각하게 다치거나 죽었을 거야.’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었다.
“상품은 에스테르 영애께 드리도록 할게요.”
비올라가 턱짓하자, 프레이르 대공가의 하녀가 보석을 가지고 왔다.
아델리아는 데프에게 대신 받도록 하고서 카를리나에게 시선을 건넸다.
그러자 카를리나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의자를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자, 시합은 모두 끝이 났습니다. 비올라 덕분에 긴장감 넘치는 티파티가 되었어요.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
가시가 있는 말에 비올라는 잠시 카를리나를 쳐다본 뒤 고개를 돌렸다.
다른 모두의 시선이 카를리나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여유를 되찾은 표정으로 말했다.
“정원 티파티에 이어 저택 안 연회장 티파티가 준비되어 있으니 자리를 옮기도록 해요, 우리.”
그러자 영애들이 좋은 생각이라며 하나둘씩 자리를 이동했다.
손님들이 모두 정원을 떠나고 비올라가 아델리아를 돌아보았다.
‘고마워요.’
카를리나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별말씀을.’
아델리아가 웃었다.
사실, 정원의 티파티를 파하고 연회장 티파티로 전환하자고 한 것은 아델리아였다.
아델리아는 비올라의 두 번째 시합에 도전하기에 앞서 카를리나에게 귓속말했다.
- 카를리나, 장소를 옮겨서 티파티를 새로 준비하는 건 어떨까요? 영애들 표정을 보니까 대결이 벌어졌던 자리에서 다시 태연하게 차를 마실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가기엔 너무 아쉽잖아요. 그쵸?
아델리아가 헤헤,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장소를 옮겨? 아……, 그래. 그런 방법이 있었지!
아델리아의 말에 카를리나가 비어 있는 연회장을 떠올렸다. 카를리나는 모두의 시선이 아델리아에게로 향해 있을 때 서둘러 하녀를 불렀다.
그리고 연회장에서 티파티를 이어 갈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카를리나는 연회장으로 이동하며 생각했다.
‘아델리아가 아니었다면, 티파티가 엉망이 되었을 거야.’
카를리나가 아델리아를 보며 함께 들어가자고 말하려던 순간.
로즈힐 후작가의 집사가 달려왔다.
“아, 아가씨!”
그리고는 카를리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델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뭐라는지 안 들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티파티는 사건의 연속이로군요!]
아델리아와 리그하르트가 두 사람을 주시했다.
그때.
“뭐? 황태자 전하께서?!”
카를리나가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걸 인식하고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서둘러 집사를 따라 연회장으로 달려갔다.
‘지금, 황태자 전하라고 했지?’
[그런 것 같은데요?]
뭐야? 황태자 전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아델리아는 잔뜩 굳어진 표정으로 카를리나의 뒤를 다급히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