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65)화 (65/161)

65화

연회장에는 정원의 티파티보다 조금 더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디저트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테이블 중앙에는 야외 정원에서 보았던 3단 케이크 트레이가 놓여 있었다.

1층은 샌드위치와 에그타르트가, 2층은 쿠키와 컵케이크, 마지막 3층의 신선한 제철 과일이 먹음직스러웠다.

정원에서는 만개한 장미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면, 실내 연회장에서는 꽃이 가득 그려진 접시와 찻잔, 그리고 꽃무늬 식탁보가 정원의 꽃을 대신했다.

눈과 입이 모두 즐거울 수 있는, 신경 써서 준비한 자리라는 것이 느껴졌다.

“저분이 황태자 전하라고요?!”

한쪽 테이블에 둘러앉은 영애 중 한 명이 작게 속닥였다.

생각지도 못한 손님에 영애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연회장으로 들어오니 이미 황태자 카르세스가 기다리고 있었던 탓이었다.

영애들은 카르세스의 맞은편 테이블에 둘러앉아 그를 힐끔거리며 작게 소곤거렸다.

“세상에, 병약해서 황태자 궁에서는 잘 나오지도 않으신다면서요?”

“공식 석상에서도 뵐 수 없는 분이라던데, 정말 황태자 전하가 맞긴 해요? 병약하다기엔, ……너무 건장하시고, 또.”

영애 한 명이 뒷말을 머뭇거리자, 다른 영애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을 이어받았다.

“되게 잘생기셨네요……?”

“그, 그렇죠?”

영애들은 티파티에 난입한 사내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기보다, 아름다운 예술품을 감상하듯 감상을 늘어놓았다.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 머리카락에 가느다란 눈매 사이로 은은하게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에서 황족 특유의 위압감과 품격이 느껴졌다.

그때, 입구를 막아서 있던 영애들 틈을 가르고 카를리나가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저, 전하!”

그녀는 놀란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한쪽 테이블을 통째로 차지한 카르세스 앞으로 다가갔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여신의 가호 속에서 평온하시기를.”

그러자 카르세스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숙녀분들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카를리나가 손을 내저었다.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뵙는 일인데, 그 누가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

카를리나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오셨…….”

황태자가 나타난 이유를 물으려던 그 순간. 때마침, 아델리아가 입구로 들어섰다.

카를리나와 카르세스의 고개가 연회장 입구로 향했다.

들어오던 아델리아가 놀라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섰다.

‘어?! 전하다!’

카를리나가 멍하게 서 있는 아델리아에게 이리 와서 인사하라며 눈짓했다.

그에 아델리아가 조심스레 걸어와 카르세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델리아 에스테르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여신의 가호 속에서 평온하시기를…….”

인사를 마친 아델리아가 슬쩍 시선을 올렸다.

그러자 카르세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여유롭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아델리아가 눈을 크게 뜨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니, 왜 여기에 계세요!’

시선으로 보낸 물음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카르세스는 말없이 어깨를 들썩이다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반대편 테이블의 영애들을 바라보다 루드에게 고갯짓했다. 그러자 보좌관 루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황궁에는 귀한 차들이 종종 들어옵니다. 오늘도 좋은 찻잎이 들어왔는데, 때마침 황태자 전하와 대련 중이었던 에스테르 경이 로즈힐 후작가에서 티파티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하지 뭡니까.”

오빠가?

데릭이?!

아델리아와 카를리나가 동시에 눈썹을 들어 올렸다.

카르세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드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에스테르 경께서 직접 오고 싶어 했는데, 하필 일이 생겨 오지 못하고 전하께서 직접 오셨습니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입을 열었다.

“티파티가 영애들의 시간이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절친한 친우의 부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것이니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카르세스가 눈꼬리를 내리며 웃자, 영애들의 표정이 또다시 느슨해졌다.

“세상에나……. 아끼는 기사를 위해 무려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움직이시다니.”

“얼굴만 잘생기신 줄 알았더니, 마음마저 어여쁘시네요.”

“그러게요. 저렇게 잘생기시고 건장하신데, 어쩌다 병을 얻으셔서는…….”

영애들이 속닥속닥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카르세스가 아델리아를 쳐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앉아, 영애.”

카르세스는 왜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냐며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거기에 앉으라고요?”

아델리아가 다른 테이블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안 들려. 그리고, 저쪽 테이블은 이미 만석인 것 같은데.”

장난기 가득한 얼굴에 아델리아는 어쩔 도리 없이 카르세스 옆자리로 걸어갔다.

루드가 적절한 타이밍에 의자를 빼 주었다.

“고마워요, 루드.”

카를리나도 쭈뼛거리며 아델리아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아델리아가 카르세스와 나란히 의자에 앉자, 반대편 테이블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쏟아졌다.

아델리아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카르세스만 들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여기 계시는 거예요?”

“말했잖아. 좋은 차가 들어왔다고.”

“정말 오빠 부탁으로 차를 가지고 온 거라고요?”

그에 카르세스가 하하, 낮게 웃었다.

“아니, 그건 거짓말이었어. 차는 가지고 온 게 맞지만, 에스테르 경은 내가 여기 온 줄도 몰라.”

허? 아델리아가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신 건데요?”

“이유 없이 오면 이상하잖아.”

“아니, 애초에 안 오시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지만 보고 싶었는걸?”

“……네? 뭐, 뭐가요?”

“영애의 첫 티파티.”

순간 할 말을 잃은 아델리아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 놀릴 거리 없나? 하고 오신 거네요?”

그러자 카르세스가 또 웃음을 터트렸다.

“가만 보면 영애가 가는 곳마다 일이 터지는 것 같아.”

아델리아의 고개가 그에게로 향했다.

“이, 일이 터지다뇨?”

아델리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설마. 그걸 다 봤다는 건 아니겠지?

‘잠깐, 내가 뭐 실수한 거 없었겠지?’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리그하르트가 튀어나와 말했다.

[누님, 실수하신 건 없습니다!]

‘휴우, 그렇지?’

아델리아가 속으로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리그하르트의 대답이 이어졌다.

[네! 평소처럼 하셨어요! ‘뒈졌어.’ 라든가, ‘죽어! 죽어!’ 라든가, 또는…….]

아아, 할 건 다 했네.

아델리아가 탄식하며 리그하르트를 말렸다.

‘……됐어. 그만해.’

[예에? 아직 많이 남았는데요?]

‘조용히, 릭.’

[치이…….]

아델리아가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그때, 반대편 테이블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와 에스테르 영애가 굉장히 친해 보이네요.”

부채로 입가를 가린 영애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파란색 드레스를 입은 영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무리 아끼는 기사를 위해서라지만, 황태자 전하께서 찻잎을 주려고 티파티까지 오셨다는 게 조금 이상하긴 하죠?”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의혹이 조금씩 커졌다. 그러자 다른 영애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가? 그러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고.

그녀들은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한 말이었지만, 아델리아와 카르세스는 생각보다 듣는 귀가 밝은 편이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카르세스가 웃으며 말했다.

“맞는 말이지. 특별한 사이라는 건.”

카르세스의 발언에 놀란 아델리아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오늘따라 전하까지 왜 이러시는 거야?’

맞은편 테이블의 영애들도 숨을 들이켰다.

카르세스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검술 훈련 동기인데,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검술 훈련 동기라고?!

영애들의 시선이 단박에 아델리아를 향했다.

카르세스는 체력을 키우기 위해 훈련을 시작했고 때마침 에스테르 가문과 인연이 닿아 아델리아와 함께 훈련받게 되었다고도 덧붙였다.

영애들은 잠깐 놀란 눈을 했으나, 어쩐지 곧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하긴, 조금 전 그 대결을 봐서 알잖아요. 에스테르 영애 실력이 엄청나다는걸.”

“그랬죠. 황태자 전하와 검술 훈련을 같이 받을 만도 해요.”

정원에서 있었던 일 덕분인지, 모두가 아델리아에게 유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병약하시다는 말은 헛소문 아니에요?”

“하긴……. 병약은커녕, 다른 열두 살 영식들보다 훨씬 건장해 보이시고…….”

영애들이 다시 카르세스를 살피기 시작했다. 카르세스가 한쪽 눈썹을 들썩이다, 팔꿈치로 루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자 루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이런, 황태자 전하. 이제는 돌아가셔야 합니다. 황궁에서 빠져나온 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돌아가셔서 약도 드셔야 하고요, 지금도 체력적으로 무리하신 상태이십니다. 이러다 또 쓰러지시면…….”

“그렇군.”

카르세스가 맞장구치며 이마를 짚었다.

“어쩐지 머리가 아프더라니.”

카르세스는 몸을 일으키며 영애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전해야 할 물건도 전했고 이만 가 보겠습니다.”

카르세스는 아델리아를 향해 웃어 보이며 작게 속삭였다.

‘나중에 보지.’

짧게 말한 뒤, 루드와 함께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응? 나중에 보자고? ……언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