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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66)화 (66/161)

66화

하늘이 어둑해질 무렵.

후작저의 연회장에서 이어진 티파티는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카를리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와인을 돌아가는 영애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색다른 티파티였어요, 카를리나.”

“맞아요. 태어나 처음 보는 광경이었어요. 즐거웠어요, 로즈힐 영애.”

상품이 걸린 시합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고들 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주신 차도 정말 특별했어요.”

“그러게 말이에요. 우리가 또 언제 황태자 전하께서 주신 차를 마셔 보겠어요?”

영애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와인을 하나씩 받아 든 영애들은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카를리나는 마지막 배웅까지 최선을 다했다.

“즐거우셨다니 다행이네요.”

“다음에도 또 초대해 주세요.”

“물론이죠.”

후작저를 떠나는 사람들 모두가 티파티 중간에 벌어질 뻔했던 참사에 대해서는 잊은 듯 보였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말이다.

[드디어 끝이 났네요.]

‘그러게. 뭔가…….’

상상하던 잔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티파티였지만.

‘그래도 잘 끝났어. 나름, 복수도 했고.’

[보석을 손에 넣으시려고.]

‘……복수라고.’

[네네. 그렇다고 치죠, 뭐.]

‘아니, 그렇다고 치자니. 진짜 복수…….’

아델리아가 리그하르트와 티격태격하는 사이, 누군가가 다가와 아델리아를 불렀다.

“저어, 에스테르 영애.”

“응? 아…….”

아델리아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붉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영애였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과 콧잔등의 자잘한 주근깨가 몹시도 귀여웠다.

그러니까, 맞은편에 앉았던 영애였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쥴리아노 백작가의 올리비아!]

‘아아, 그래!’

아델리아가 싱긋 웃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쥴리아노 영애?”

그러자 올리비아가 화색이 묻어난 얼굴로 물었다.

“저, 저를 기억하세요?!”

“물론이죠.”

[사기꾼.]

‘시끄러워.’

그러자 올리비아의 두 뺨이 화르르 타올랐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에스테르 영애께서 나서 주지 않으셨다면…….”

올리비아가 침울한 얼굴을 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올리비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곤경에 처한 레이디를 돕는 건 당연한 일이랍니다.”

“…….”

올리비아가 일렁이는 눈동자로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너무, ……멋져.’

또래 여자아이일 뿐인데도 늠름하고 믿음직스러워.

올리비아가 손끝을 꼼지락꼼지락하다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혹시, 예전에 계단에서 절 구해 주신 것도 기억하세요?”

응? 계단?

[초면이 아닌가 본데요?]

‘기억나는 거 없어?’

[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나도 모르겠는데?’

으으음……. 아델리아가 한참 동안 생각하자 올리비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의상실 계단에서 제가 떨어진 적이 있어요. 그때, 절 받아 주시고는.”

올리비아가 머리에 꽂고 있던 머리핀을 떼어 내며 내밀었다.

“이걸 주워 주시면서 이 머리핀이 아니어도 충분히 아름다우니 속상해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올리비아는 제 입으로 다시 말을 하자니 민망했던 것인지, 뺨이 더욱 붉어졌다.

“아!”

[아!]

아델리아와 리그하르트가 동시에 소리쳤다.

‘생각났어!’

[저도요!]

데릭과 함께 들렀던 의상실이었다.

장신구를 사기 위해 3층으로 향하던 도중, 계단에서 떨어지는 어린아이를 받아 준 기억이 났다.

“와! 이런 인연이!”

아델리아가 반가워하며 환하게 웃었다.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다니, 너무 신기해요!”

“저도 이곳에서 에스테르 영애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냥 아델리아라고 불러요!”

“그럼, 저도 올리비아라고 불러 주세요.”

“그럴게요, 올리비아!”

“네! 아델리아!”

해맑은 아델리아를 보며 올리비아도 살포시 미소 지었다.

“미리 말해 주지. 그럼 더 많은 대화를 나눴을 텐데요.”

“그게, 저도 오늘 너무 정신이 없어서…….”

아, 하긴. 프레이르 공녀에게 지목당한 뒤로는 한동안 얼이 나가 있었지.

‘게다가 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로는 황태자 전하까지 나타나서 더 어수선했었어.’

아델리아가 눈꼬리를 내렸다.

“아쉽다.”

그에 올리비아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편지를 보내도 될까요?”

“편지요?”

이거 설마,

또래 영애들끼리 일상을 공유하며 아침에 일어나 무엇을 먹었는지, 또는 점심 먹기 전에 어떤 활동을 했으며 점심 메뉴와 간식, 저녁 메뉴까지 모조리 나열한다는 그 친목 편지?

세상에, 그건 절친끼리나 하는 거잖아?! 그걸 나랑 하자고?!

‘릭! 내가 첫 티파티에서 절친을 만들었어!’

[누님……. 절친은 그렇게 간단히 생기는 게 아니…….]

아델리아가 희열에 가득 찬 눈빛을 하고서 올리비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럼요!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올리비아는 집으로 돌아가는 즉시 편지를 적겠다며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손님들의 배웅을 끝낸 카를리나가 아델리아에게로 다가왔다.

카를리나는 아델리아의 옆에 나란히 서서 떠나가는 올리비아의 마차를 함께 바라보았다.

“많이 난처해질 뻔했어요. ……오늘 일은, 꼭 은혜를 갚을게요.”

“에이, 은혜라고 할 게 뭐가 있어요.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상품은 제가 다 휩쓸었는걸요? 전 말이 탐나서 호위 기사를 내보냈을 뿐이고 보석이 탐나서 제가 직접 나섰을 뿐이에요.”

카를리나는 조용히 웃으며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정말 고마웠어요, 아델리아.”

아델리아……? 아델리아가 달라진 호칭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델리아라고 불러 달라던 부탁에도 꿋꿋이 ‘에스테르 영애’라며 거리를 두던 카를리나였다.

카를리나의 미소가 아름다웠다. 조금 전 자신이 들은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따뜻하고 다정한 미소였다.

‘와……. 나 오늘, 티파티에 참석하길 진짜 잘한 것 같아!’

아델리아도 카를리나를 올려다보며 화답하듯 미소 지었다.

***

작별 인사를 나눈 뒤, 마차에 올랐다.

“아으……. 삭신이야.”

“고생하셨어요, 아가씨…….”

“……나보다 세라가 더 고생한 것 같은데?”

아델리아는 마주 앉은 세라를 바라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저야 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는걸요.”

아가씨가 위험에 빠지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요……. 하며 세라가 울상을 했다.

“세라, 날 봐. 나 안 다쳤어. 무사하다고.”

“네……. 그래도 그 무섭게 생긴 기사 앞에 나서셨을 땐 정신을 잃는 줄 알았다고요.”

세라가 퉁퉁 부어 잘 떠지지도 않는 눈가를 소매 끝으로 훔치며 말했다.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어, 세라. 피곤했을 텐데 눈 좀 붙여.”

“아가씨 걱정에 제가 제명에 못 살…….”

“알았어, 알았다고. 조금이라도 자 둬.”

아델리아는 겨우 세라를 달래 놓고 자신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리그하르트 역시 잔소리를 덧붙였다.

[세라 님 말이 맞아요!]

세라 님? 아델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너 언제부터 세라를 세라 님이라고 불렀어?’

[좋은 분이시더라고.]

‘뭐?’

[누님께서 절 풀어 놓으실 때마다 깨끗한 수건으로 구석구석 잘 닦아 주셨어요.]

아, 옆구리는 좀 간지럽더라고 전해 주시겠어요? 라며 리그하르트가 키득거렸다.

‘…….’

[향긋한 향유도 발라 주셨고요.]

‘쇳덩이에 향유를 발랐다고?’

[원래 무쇠 같은 건 기름을 좀 먹여 둬야 녹슬지 않는다고요.]

‘넌 그냥 둬도 녹슬지 않잖아.’

무쇠도 아니고 말이야.

[그 향유 덕분에 제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나니까 덩달아 기분도 좋아졌어요!]

‘……그래서 세라 님이 된 거야? 깨끗하게 닦아 줬다고?’

[향유도 발라 주셨다니까? 절 그렇게 소중하게 다뤄 주신 분은 세라 님이 처음이라고요.]

‘나도 널 소중하게 생각하거든?!’

크흠, 헛기침을 한 번 한 리그하르트가 말을 이어 갔다.

[어쨌든! 오늘은 무모하셨어요. 오러도 사용할 수 없고, 저를 사용하지도 못하는데 목검 하나 달랑 들고 검투사랑 대결이라뇨!]

‘이겼잖아. 그리고 나, 오러 사용했는데?’

[……네?]

언제요? 어떻게?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

아무것도 못 느꼈다고? 그럼 대성공이네? 아델리아가 작게 웃었다.

‘다리에만 썼어. 속도를 더 올려야 했거든.’

아델리아는 신전에서 악시덤과 마주친 날 이후로, 오러와 오러 큐브를 단련하기로 했다.

훈련은 그렇게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오러를 꺼내었다가 다시 집어넣는 것을 반복했다.

핵심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해야 한다는 거였다.

‘신체 부위별로 오러를 보내는 건 어느 정도 익숙해졌어.’

소리나 빛, 기운을 감추고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도달했다.

‘문제는…….’

아직 전신으로 오러를 보냈을 때, 여전히 제어가 힘들다는 거였다.

[아……. 밤에 침대에 누워서 계속 오러를 꺼냈다가 넣었다 하셨던 이유가 훈련 때문이었군요!]

‘맞아. 이번에 그 검투사를 상대하면서 다리 쪽에만 오러를 보냈어.’

검투사와 상대하기 위해서는 빠른 속도가 필요했고 지치지 않는 움직임이 필요했다.

‘혹시 제어에 실패하더라도 드레스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을 거고.’

손에도 오러를 휘감았으면 더 빨리 쓰러트렸을 텐데, 혹시라도 제어에 실패할까 봐 그것만큼은 참았다.

그래서 쓰러트리는 데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검투사의 체구가 큰 만큼 체력과 맷집이 좋았던 탓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오러를 제어하는 데 조금 더 수월해진 것 같았다.

‘훈련도 됐고 말이야.’

[검투사를 상대로 훈련을 했다고요?! 그러다 들키면 어쩌시려고요!]

‘원래 실전만큼 효과 좋은 훈련은 없는 법이야. 게다가 영애들은 오러에 대해 알지 못하니까 알아보지도 못했을 거고, 검투사는 멍청해서 오러를 못 알아봤을 거야.’

기껏해야 오러를 알아보는 사람은 각 가문의 기사들일 텐데, 거리가 제법 있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되지도 않았다.

‘그 대결 덕분에 오러 제어가 한결 더 편해졌어.’

데프는 꽤 쓸 만한 말을 한 마리 얻었고 아델리아의 손에는 초월석이 들어왔다.

게다가 카를리나와 올리비아까지.

‘사람들이 티파티, 티파티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

아델리아는 수확이 꽤 많은 티파티였다고 흐뭇해했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는 정말 왜 오신 거야?’

-나중에 보지.

검술 훈련 일정이 정해졌나?

‘곧 연락 주시겠지.’

하아암. 아델리아는 의자에 등을 깊이 묻으며 하품을 했다.

어느새 에스테르 공작가의 마차는 로즈힐 후작가와 에스테르 공작가 사이에 있는 네르젤 숲속으로 들어섰다.

고요한 숲속, 에스테르 공작가의 문양이 찍힌 마차는 막힘 없이 숲길을 내질렀다.

그때, 꽈앙—!

“꺄악!”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마차가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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