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아델리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잊고 있었다. 황태자 카르세스도 자신 못지않게 고집스럽다는 것을.
“이참에 공작을 만나 상황 설명도 하고.”
“아버지는 지금 황궁에 계실 텐데요…….”
“에스테르 경은?”
“오빠도 황궁에…….”
“…….”
카르세스가 잠시 입을 다물고 아델리아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들어가지.”
“네?! 전하!”
“왜? 걷기 힘든가? 또 안아 줘?”
그에 화들짝 놀란 아델리아가 보란 듯이 성큼성큼 걸어 카르세스를 앞질러 지나갔다.
“아니요?! 보세요! 완전 잘 걷는데요!”
아델리아의 뒷모습에 카르세스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까맣게 타 버린 드레스를 팔랑거리며 씩씩하게 걸어 나가는 모습이 어쩐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시간이 흘러,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때쯤, 테오스와 데릭이 공작저로 돌아왔다.
예상보다 빠른 귀가였다.
황궁으로 달려간 루드를 통해 대략의 상황을 전해 듣고 곧장 돌아오는 길이었다.
응접실로 들어온 테오스는 곧바로 소파에 앉아 있던 아델리아에게로 향했다.
“다친 곳은 없느냐.”
테오스가 아델리아의 시선 높이를 맞춰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전 멀쩡해요, 아빠.”
테오스가 아델리아의 뺨으로 손바닥을 갖다 대며 미간을 찌푸렸다.
“레널드를 불러 진료하라 해야겠다.”
그러자 뒤에 있던 카르세스가 말했다.
“이미 하고 갔습니다, 공작.”
그러자 테오스가 몸을 일으켜 카르세스를 돌아보며 인사를 건넸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는 길에 대충 들었습니다. 아이를 구해 주셨다고요.”
“마침 지나가던 길이라.”
카르세스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테오스가 아델리아를 내려다보며 아이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은혜를 입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전하.”
카르세스는 아델리아를 향해 싱긋 웃었다.
“황실 또한 에스테르의 도움을 받았으니, 이 또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데릭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델! 괜찮아?!”
그러다 카르세스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넨 뒤, 다시 아델리아에게로 향했다.
“다친 곳은 없어?”
데릭이 아델리아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응, 괜찮아. 다치지 않았어.”
데릭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델리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많이 놀랐을 텐데 쉬지 않고 왜 깨어 있어…….”
“아빠랑 오빠를 기다렸지. 전하께서 같이 기다려 주셔서 괜찮았어.”
“같이 갈걸…….”
“여동생 티파티에 따라가느라 기사단 행사를 참석 못 했다는 게 알려지면 웃음거리가 되었을 거야.”
“차라리 그게 낫지.”
데릭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테오스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전하. 손님방을 내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카르세스는 거절했다.
“아닙니다, 공작. 내가 나온 것을 황궁에서 아직 모른다고 하지만, 어디서 말이 새어 나갈지 모릅니다.”
카르세스는 에스테르 공작가에서 황태자가 하루를 묵었다는 사실이 새어 나가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냐며 작게 웃었다.
“비록 어린 나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엮이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에스테르 영애의 평판에도 좋지 못할 거고요.”
그의 말에 테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데릭을 불렀다.
“데릭.”
“예, 아버지.”
“전하를 황궁까지 모셔다드려라.”
“네.”
데릭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아델리아를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카르세스는 문으로 걸음을 옮기다 아델리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푹 쉬도록 해. 검술 훈련은 한동안 미룰 테니까.”
“그치만 전하, 전 정말 괜찮…….”
아이고, 이놈의 주둥이. 아델리아는 제 의지와는 달리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는 자신의 입술을 손끝으로 찰싹찰싹 때렸다.
“알아. 알겠으니까, 그냥 쉬어. 황태자로서 내리는 명령이야.”
그러다 옅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영 몸이 근질거려서 안 되겠거든, 놀러 와.”
그의 말에 아델리아가 입술을 비죽거리며 대답했다.
“……네.”
카르세스는 데릭과 함께 공작저를 떠났다.
테오스는 그들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다 아델리아에게로 돌아왔다.
“아빠, 저…….”
“쉬이.”
테오스는 아델리아의 말을 막으며 아이를 품에 안아 들어 올렸다.
“어……?”
“방까지 데려다주마.”
“저, 걸을 수 있어요.”
“알고 있다. 누구보다 씩씩하게 걸을 줄 안다는 걸.”
“…….”
“방까지만. 그래야 놀란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진정될 것 같구나.”
아빠……. 아델리아는 테오스의 목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따뜻해…….’
아델리아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크게 다친 곳도 없고, 크게 놀라지도 않았기에 정말 괜찮을 줄 알았는데.
‘사실, 나……. 괜찮지 않았던 거구나.’
이 온기 때문인지, 그저 아빠라는 존재 때문인지.
있는지도 몰랐던 긴장이 한순간에 몸에서 빠져나가며 피로가 빠르게 밀려들었다.
아델리아는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조금 전, 숲속에서의 상황을 떠올렸다.
리그하르트가 아니었다면, 카르세스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정말 또 그렇게 죽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정말 죽을 뻔했어…….’
순간, 발목을 붙들었던 괴한의 목소리와 눈빛이 떠오르며 소름이 돋았다.
아델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테오스를 더욱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반쯤 잠기운이 묻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실, ……무서웠어요.”
그러자 테오스의 걸음이 일순 멈췄다. 아델리아는 두 눈을 온전히 감으며 말을 이어 갔다.
“다시 아빠랑 오빠를 보지 못할까 봐…….”
테오스의 옷깃을 거머쥐고 있던 아델리아의 손끝이 천천히 느슨해졌다.
“이제 겨우……. 알게 되었는데…….”
아빠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걸.
아이의 목소리가 서서히 느릿해지더니, 이내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테오스는 아델리아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아이를 고쳐 안았다.
테오스는 다시 아델리아의 침실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턱이 이유 모를 분노로 불뚝거렸다.
그 밤, 가을의 입구에서 불어온 밤공기는 유난히도 서늘했다.
***
내리 이틀이 지났다.
이틀 동안 무조건 안정을 외치던 데릭 덕분에 아델리아는 방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지내야 했다.
침실로 올라오는 음식을 먹고, 소파나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가끔 창가에서 정원을 내려다보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왜요, 아가씨?!”
“아, 응? 아니야.”
자신도 모르게 나온 혼잣말에 세라가 말했다.
“전 데릭 도련님의 결정이 옳다고 생각해요!”
그러자 창틀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던 아델리아가 몸을 돌렸다.
“뭐라고? 내가 이렇게 갇혀 있는 게?!”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그런 걸 우리는 휴식이라고 부르기로 했거든요?”
“휴식은 내가 편해야 휴식이지!”
“자신의 몸 상태도 제대로 모르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셨던 건 아가씨였어요! 그러다 결국 쓰러지기도 하셨고 앓아눕기도 하셨고. ……게다가.”
세라의 표정이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큰일 날 뻔도 했다고요.”
세라의 축 내려간 눈꼬리를 보며 아델리아가 속으로 탄식했다.
‘하긴, 세라에게도 그날 숲속에서의 일은 충격이 컸을 거야…….’
세라는 아직도 그날의 일이 꿈속에서 나온다고 했다.
새벽에 몇 번이고 벌떡벌떡 일어나 아델리아의 방으로 달려오기도 했었으니, 세라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었다.
아델리아가 세라에게로 쪼르르 달려가 세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 살아 있어, 세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러자 세라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세라는 아델리아의 작은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네, 아가씨……. 그렇지만 아가씨께서 조금만 더 자신을 아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델리아가 세라의 품에서 얼굴을 들어 올려 세라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있는데?”
그러자 세라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더요! 지금보다 열 배는 더!”
“열 배나?!”
뭐야, 그게. 아예 나서지 말라는 소리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눈을 땡그랗게 뜨던 아델리아가 잠시 생각하다 활짝 미소 지었다.
“응. 그럴게.”
세라가 눈썹을 들썩이다가 눈을 갸름하게 떴다. 순순히 대답하는 아델리아가 수상했던 탓이다.
“정말요? 이렇게 쉽게?”
“쉽게라니. 우리 세라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려고 노력하겠다는 거지.”
“정말이죠?”
“응!”
그리고 아델리아는 생각했다.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지, 뭐!’
좋아! 이제는 신전이다, 릭! 네 반쪽을 찾으러 가 보자!
[예에에에!]
리그하르트가 모험을 앞둔 소년처럼 신나서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