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빨랫감을 가지고 세라가 방을 나가자, 혼자 남은 아델리아는 제 손바닥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확실히, 단검보다 좋더라.’
[그렇죠?! 제가 딱 누님의 맞춤이라니까요?!]
아델리아는 크기와 모습을 바꾼 리그하르트를 쥐고 괴한들을 상대했던 일을 떠올렸다.
적당히 흘러나오는 신력과 손에 꼭 맞는 검을 휘두르고 있자니, 다시 과거의 전성기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기도 했다.
‘네 반쪽만 찾으면 계속 그 상태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거잖아?’
[그렇죠! 제 말이 바로 그 말이었습니다! 그럼 신전은 언제 쳐들어갈까요!]
‘성검이 신전에 쳐들어간다고 말해도 돼?’
[……그럼, 잠입?]
‘…….’
정문으로 들어간다는 선택지는 아예 없구나?
아델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누군가가 아델리아의 방으로 찾아왔다.
“아델, 들어가도 돼?”
어? 오빠다.
아델리아가 몸을 세우며 말했다.
“응, 들어와!”
문이 열리자, 데릭이 들어왔다. 데릭의 뒤로 노베트도 함께였다.
“노베트?”
데릭과 노베트가 아델리아를 향해 걸어왔다.
“노베트가 선물이 있대서.”
데릭이 눈짓하자, 노베트가 나무 상자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열어 보십시오.”
아델리아가 상자를 열자, 푸른 벨벳 위로 조심스레 올려진 물건이 시야로 들어왔다.
“이거, 전에 제가 부탁드렸던 그 단검이에요?!”
아델리아가 노베트를 쳐다보며 물었다.
“맞습니다, 아가씨.”
노베트가 푸근하게 미소 지었다.
“와아! 세상에! 너무 예뻐요!”
아델리아가 단검을 덥석 쥐고서 들어 올렸다.
검집은 어두운 회색 바탕에 금색의 불꽃 모양 조각이 장식되어 있었다. 손잡이 역시 검집과 통일된 외형이었다.
그리고 눈물방울 모양의 붉은 루비 세 개가 손잡이와 금색 가드 부분에 장식되어 있었다.
아델리아가 보석과 검집을 손끝으로 쓸어 보다가 검집에서 검을 빼내었다.
쨍, 맑은 소리가 났다. 예리한 검날을 훑으며 아델리아가 감탄하듯 말했다.
“정말 대단해요, 노베트!”
은빛의 검날은 성검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성스럽게 빛났다.
[뭐라고요?!]
리그하르트가 발끈했지만, 아델리아는 검날을 햇살에 비춰 가며 감탄했다.
‘역시, 노베트야!’
예리한 검날도 검날이었지만, 손잡이가 손바닥에 찰싹 달라붙는 느낌도 좋았다.
‘릭, 이 단검도 내 손에 딱 맞는데?’
이렇게 되면 신전에 가서 네 반쪽을 찾을 필요 없는 거 아니야?
[…….]
아델리아가 짓궂게 웃으며 검집에 다시 단검을 집어넣었다.
“고마워요, 노베트.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다행입니다.”
노베트가 안도한 얼굴로 웃었다.
그때, 데릭이 말했다.
“데오나가 돌아오면 노베트와 함께 지낼 집도 마련되었어.”
“고마워, 오빠. 정신없었을 텐데 신경 써 줘서.”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 아델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맞다! 노베트!”
“예, 아가씨.”
“데오나 만나러 가실래요?”
“……데, 데오나를 말입니까?”
“네! 신관들이 지내는 건물 안까지는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대강당에서 만날 수는 있거든요!”
그러자 노베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래도, 될까요?”
“되죠!”
“잠깐 아델리아.”
“응?”
“아버지께 여쭤봐야지.”
“당연하지! 지금 가서 여쭤보려고.”
“아버지는 지금 집에 안 계셔.”
“응? 어디 가셨는데? 황궁?”
“아니, 황궁은 아니라고 하셨어. 저녁 식사는 같이하겠다고 하셨으니, 그 전에는 오실 거야.”
“아…….”
아델리아가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아빠가 오시면 여쭤보고 일정을 잡아야겠네.”
“그러는 게 좋겠지?”
“노베트. 일정이 정해지면 말할게요.”
“예, 아가씨.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데릭과 노베트가 다시 방을 빠져나갔다.
잠시 단검을 어루만지고 있던 아델리아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아빤 어디 가신 거지?’
전장과 황궁밖에 모르던 사람이라 마땅히 가실 만한 곳은 없으실 텐데.
창밖 하늘로 새하얀 구름이 잔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
“일을 쳤더구나.”
분노를 애써 가라앉힌 악시덤의 목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악시덤의 맞은편에 앉은 비올라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말아 씹었다.
“너답지 않았다. 항상 이성적으로 행동하던 네가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
“……죄송합니다.”
비올라는 시선을 내린 채 담담하게 대꾸했다.
악시덤은 그런 딸아이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황제의 주치의를 끌어들여 황제에게 약을 먹이고, 그 약을 구하는 경로와 뒷수습까지 빈틈없이 계획해서 알려 주던 사람이 바로 딸아이, 비올라였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허점을 드러내다니. 내가 이 아이를 너무 과대평가했던가.’
악시덤이 혀를 차며 말했다.
“로즈힐 후작가와는 어울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카를리나가 가업을 이어받아 직접 가주가 되려 하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로즈힐 가문의 재산은 황실에서 환수하지 못하게 되죠.”
비올라가 눈꼬리를 내리며 악시덤을 바라보았다.
“전 그냥, 황제가 되신 아버지의 손에 로즈힐 가문의 재산을 쥐여 드리고 싶었어요.”
그러자 악시덤이 고개를 저었다.
“성급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여자가 가주라니. 이 로시안트 제국에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건 너 역시 잘 알고 있지 않느냐?”
“…….”
비올라의 눈썹이 짧게 꿈틀거렸다.
악시덤은 미간을 잔뜩 구긴 채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말을 이어 갔다.
“에스테르 공작이 다녀갔다.”
그에 비올라의 눈매가 갸름해졌다.
“뭐라고 하던가요?”
비올라의 물음에 악시덤이 시선을 들어 올려 비올라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조심하라는 말을 전하러 왔다더군.”
“조심하라고요……?”
아침이 밝아 오기 무섭게 테오스가 대공가를 찾아왔다.
두 사람은 응접실에 마주 앉았다.
테오스는 악시덤이 건네는 차를 무뚝뚝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르젤 숲에서 귀족 마차를 노리는 괴한들이 있었습니다.
찻잔을 들어 올리던 악시덤의 손끝이 잠시 멈칫했다.
-대공가와 네르젤 숲이 크게 멀지 않으니 조심하시라는 말을 전하러 왔습니다.
-……그랬군. 우리 대공가까지 신경 써 주어 고맙소. 배후는 알아내셨소?
-증거는 아이의 증언뿐이니 그것으로 범인을 잡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테오스의 말에 찻잔 뒤로 가려진 악시덤의 입술이 슬쩍 올라갔다.
-그것참, 안타깝게 되었소.
-예, 그러나 그들을 찾아내어 에스테르 공작가의 아이들을 건드린 책임을 지게 할 생각입니다.
-어렵지 않겠소? 증거가 없다면서.
-어려운 일을 해내는 것이 우리 에스테르가 아니겠습니까?
-…….
테오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투를 다시 걸쳤다.
-모쪼록 대공께서도, ……공녀께서도 조심하십시오.
그의 말에 악시덤이 시선을 들었다. 마주친 붉은 눈동자가 어째서인지 서늘하기까지 했다.
-에스테르 공작가를 공격할 정도로 대담한 괴한들이라면, 프레이르 대공가라고 해서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테오스는 곧장 대공가를 빠져나갔다.
악시덤은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테오스가 손도 대지 않은 찻잔 속 찻물을 쳐다보며.
그것은 조용한 경고였다.
이미 프레이르 대공가가 범인이라 확신하고 내뱉는 말이었다.
‘괘씸한…….’
아침의 일이 떠오르자, 악시덤은 다시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악시덤은 회상에서 빠져나와 비올라를 쳐다보았다.
‘복수를 하겠다는 경고를 들은 이상, 비올라를 로시안트 제국에 남겨 둘 순 없다.’
혹여라도 공작에 의해 죽기라도 한다면, 보르데어 제국의 7황자와 했던 거래도 깨지게 될 것이다.
‘영리한 아이라 조금 더 곁에 두려 했건만.’
악시덤이 구겨진 미간을 문지르며 비올라를 불렀다.
“비올라.”
“예, 아버지.”
“이제 되었다. 이만하면 나머지는 이 애비가 다 할 수 있다. 너의 공로를 잊지 않겠다.”
“…….”
그러자 비올라가 말없이 악시덤을 쳐다보았다.
악시덤은 품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어 테이블 위로 던졌다.
“이제, 청혼을 받아들이거라. 나이가 더 들기 전에 말이다.”
비올라의 시선이 테이블 위 서신으로 향했다. 그 서신에 새겨진 초록색 직인을 알아본 비올라가 턱을 단단히 굳혔다.
‘보르데어 제국……. 7황자…….’
오래전부터 비올라와 혼인 이야기가 오고 가던 사내였다.
‘첫 번째 황자비를 잃고 홀로 지내는 중이라던가.’
다정하고 온화한 성격에 외모도 말끔하고 훤칠한 편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비올라는 그 사내가 다정하다거나 잘생겼다거나 그런 것 따위에 관심 없었다.
애초에 비올라는 얼굴도 모르는 사내에게 팔려 가듯 해야 하는 결혼 자체를 경멸했다.
‘난……. 물건이 아니야.’
비올라는 솟구치는 울분을 조용히 삭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비올라.”
비올라는 처연하게 미소 지었다.
“아버지, 지금은 머리 하나라도 더 맞대야 하는 시기예요. 그래야 에스테르 공작가를 처리할 수 있어요.”
악시덤이 흠, 침음하며 소파에 등을 묻었다. 비올라가 말을 이었다.
“황제는 어차피 죽습니다. 그러나 황제가 죽는다고 해서 아버지께서 곧장 황제 자리에 오르실 수는 없어요. 황제파 귀족의 큰 주축인 에스테르가 살아 있는 한, 그들은 황태자를 지지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정통성에서…….”
콰앙—! 악시덤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참고 있던 화가 폭발했다. 정통성이라는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든 탓이다.
“입조심하거라. 황제고 황태자고 모두 죽어 버리면 그 누가 정통성 따위를 거론하겠느냐!”
“하지만, 아버지. 황태자를 처리하는 건 나중의 일이에요. 당장 죽여야 하는 건 황제와 에스테르 공작이죠.”
황제가 죽으면 당연히 황태자가 황제 자리에 올라야 한다.
하지만 지금 카르세스는 성년식을 치르지 못했다.
그것을 빌미로 악시덤은 황태자가 성년이 될 때까지만 황제 자리에 오른다는 조건을 걸어 황제가 될 계획이었다.
물론, 다시 돌려줄 생각은 없었지만.
비올라의 말에 악시덤이 심호흡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후우……. 지금 이 제국의 영웅은 에스테르 공작이다. 황제의 수족이며 제국민들이 떠받들고 있는 가문이지.”
“…….”
악시덤이 조용히 말을 이어 갔다.
“그들을 처리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거다.”
그러자 비올라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렇다고 살려 두어서도 안 되는 가문이죠.”
“그럼, 어쩌자는 것이냐?”
“에스테르 공작은 전쟁 영웅이에요.”
미소를 머금은 비올라가 말을 이어 갔다.
“그런 그가 전장 위에서 죽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