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마탑주 휴시안.
갑작스럽게 그의 이름이 등장하자, 아델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휴시안이 왜 디크레드에 갔지?’
하필 그 사건을 며칠 앞두고.
‘우연의 일치일까?’
[마탑주라는 건 원래 아무 계획 없이 움직이지 않잖아요.]
‘그렇지. 게다가, 이 방문객 목록에 적힌 직업도 거짓이야.’
마탑주이면서 명단에는 당당히 신입 광부라고 되어 있었다.
광부면 광부지, 신입 광부는 또 뭐야?
게다가 직업은 거짓으로 기록해 놓고서 이름은 실명 그대로라니.
‘하긴, 마탑주의 진짜 이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 숨길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르지.’
이름뿐인가. 마탑주의 진짜 얼굴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마탑주는 외형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디크레드 영지가 철저한 신분 확인 절차를 거쳤다 하더라도 마탑주의 진짜 신분을 알아낼 순 없었을 것이다.
-어? 여기사네? 그것도 은발이네?
휴시안과는 전장에서 만났다.
그러니까 일종의 전우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성검의 선택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일어났고 아델리아는 성검의 기사로서 그 전장의 선두에 섰다.
그때 제국군과 연합한 세력이 마탑이었다.
음침하고 음흉한 마법사들이었기에 대충 신입 마법사 서너 명 보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마탑주인 휴시안이 직접 나왔다.
-의외로 우리 합이 잘 맞는 거 같지 않아? 그러지 말고 마탑으로 와. 언제까지 황제의 개 노릇이나 할 거야? 내가 더 잘해 줄게.
다소 언행이 상스럽긴 했지만, 마탑이 그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독자적인 세력인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아델리아는 전쟁 내내 휴시안과 붙어 다녔다. 그는 기존에 알고 있던 마법사와는 조금 달랐다. 음침하거나 음흉하지 않았다.
‘오히려 뒤끝 없고 쾌활한 쪽이었지.’
그래서 더욱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매번 전장에서 그와 마주치며 신뢰는 더욱 두터워졌다.
그러다 아델리아가 은퇴를 하게 되고 오두막에 숨어 살게 되면서 휴시안과는 만날 일이 없어졌다.
아델리아가 출입객 명단 위, 휴시안의 이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번 생에서는 얽히지 않을 줄 알았는데, 종이 위 그의 이름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감회가 새로웠다.
‘이 명단에 이름이 있는 이상, ……만나러 가야만 하겠지.’
마탑 위치가 어디였더라.
전장에서만 마주치고 직접 찾아간 적이 없었던 탓에 당장 그를 만나러 가려니 막막하기도 했다.
아델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다시 한참 더 넘겼다. 천천히 목록을 살펴 내려가던 아델리아가 다시 한번 멈칫했다.
“어?”
[왜 그러세요, 누님?]
아델리아가 손끝으로 이름 하나를 가리켰다.
‘……이 사람.’
[그 사람도 아는 사람이에요? 누군데요?]
‘우리 가문의 가신이 되고 싶어 하던 사람이긴 한데…….’
[그럼 우리 편이네요?]
그러나 아델리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절대 아니야.’
모티반스 넬로체 백작.
모티반스는 자처하여 에스테르 공작가의 가신이 되고자 찾아왔었다. 물론, 테오스는 그런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티반스는 테오스가 전장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공작저를 찾아와 귀찮게 굴었다.
그러나 테오스는 가신을 들일 생각이 없었다. 전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가신 가문을 관리할 여유가 없었던 탓이었다.
‘게다가 모티반스는 귀족 사이에서 평판도 나쁜 편이었어.’
하루는 데릭이 모티반스 백작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것은 많지만 영양가는 없고, 욕심은 많은데 도량마저 좁은 사람이야.
테오스의 거절에도 모티반스는 에스테르 공작가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 주기 위해 수시로 선물을 보내왔다.
그래서 처음에는 모티반스의 존경심이 진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빠랑 오빠가 죽고 나서 가장 먼저 등을 돌린 사람이 그 모티반스였어.’
[뭐라고요?!]
리그하르트가 기가 막힌다며 들썩거렸다.
아델리아가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정신없이 살아가던 어느 날이었다.
성년식을 며칠 앞두고 모티반스의 서신이 공작저에 도착했다.
<에스테르 영애. 오해하지 말고 들어 주십시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모두 영애를 위해 하는 말입니다.>
안부 인사 하나 없이 시작된 서신은 곧장 더러운 속내를 드러냈다.
<여자의 몸으로 혼자서 가문을 일으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지요. 내 정부 자리 하나가 비어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기꺼이 영애를 내 사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나는 내 사람의 불행을 두고만 보지 않지요. 제가 책임지고 공작가의 불명예를 씻어 드리겠습니다.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그 말에 눈이 뒤집혀 검을 빼 들었던 기억이 있다.
과거를 회상하던 아델리아가 주먹을 불끈 쥐며 음산하게 웃었다.
‘릭……. 아무래도 복수해야 할 곳이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아.’
[…….]
낄낄, 이번에는 리그하르트가 아닌 아델리아의 웃음이었다.
***
며칠 후, 공작저로 카를리나가 찾아왔다.
“오랜만이야, 데릭.”
“어서 와.”
카를리나를 맞이한 것은 데릭이었다. 공작저로 들어오며 카를리나가 물었다.
“아델리아는?”
“…….”
그러자 데릭이 카를리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카를리나가 그런 그의 시선을 맞받아치며 말했다.
“왜 그렇게 봐?”
“네가 우리 집에 와서 아델을 먼저 찾는 건 처음이라서.”
“……그랬나.”
“응, 그랬었어.”
데릭이 옅게 웃었다.
“아델은 응접실에 있어. 아침부터 들떠 있더라. 네가 온다고.”
“그, 그래……?”
큼, 카를리나가 헛기침하자 데릭이 나직이 말했다.
“티파티에서 좋은 추억을 만들게 해 줘서 고마워.”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초대해 줬잖아.”
“그거야…….”
“그 누구도 우리 아델에게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어. 그것 때문에 한동안 울적해 있었거든.”
데릭은 매일 아침 1층으로 내려와 자신에게 온 초대장이 있는지 확인하던 아델리아를 떠올렸다.
기대감과 실망감이 차례차례 아이를 흔들고 지나갔다.
그게 사뭇 마음이 아팠다. 티파티라는 영역이 자신의 힘으로 어찌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네 티파티를 다녀온 이후로 초대장이 늘었어. 네 덕분이야, 카를.”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었어. 오히려 도움을 받은 건 나였고.”
카를리나가 귀 끝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데릭이 그런 그녀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우리 아델, 잘 부탁해.”
카를리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데릭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에 도착하니, 아델리아가 응접실 소파에서 일어나 카를리나를 반겼다.
“언니!”
아델리아는 냉큼 달려와 카를리나의 손을 꼭 붙잡았다.
“어서 와요, 기다렸어요.”
카를리나는 아델리아에게 잡힌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 작게 미소 지었다.
소파에 마주 앉은 세 사람은 차를 마시며 간단하게 안부를 물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데릭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빠는 이제 나가도 돼.”
“응?”
데릭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왜?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도 있어?”
그러자 아델리아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눈치 없긴. 숙녀들끼리 특별히 나눌 이야기가 있는 법이야.”
저러니까 아직 연애를 한 번도 못 해 봤지. 아델리아가 타박하자 데릭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 그래?”
“응. 그러니까 나중에 부르면 그때 와.”
데릭이 카를리나와 아델리아를 번갈아 보다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알았어.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
“알았어, 오빠.”
데릭이 소파에서 일어나고 문으로 걸어 나갈 때까지, 카를리나의 시선이 그에게 박혀 있었다.
그 모습에 아델리아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아쉬워도 참아요. 어차피 결혼하면 매일 볼 얼굴인데, 뭐.”
그러자 카를리나가 고개를 휙 돌려 아델리아를 쳐다보았다.
“겨, 결혼이라뇨?!”
아델리아는 어깨를 들어 올리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왜 그렇게 놀라요? 우리 오빠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아, 아델리아……!”
카를리나는 혹여나 데릭이 들을까 봐 그가 나갔던 문을 힐끔거렸다.
“뭐, 다들 아는 이야기인걸.”
카를리나는 아니라고 반박도 하지 못하고 얼굴만 벌겋게 붉히고 있었다.
푸히히, 아델리아가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항상 도도하고 이성적이던 카를리나에게 저토록 소녀 같은 면이 있다는 게 재밌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그래서 놀려 주고 싶기도 하고.’
뜨거운 차를 벌컥벌컥 마시고 내려놓은 카를리나가 후우, 짧게 숨을 돌렸다.
얼굴빛이 제 색을 되찾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아델리아는 느긋하게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아델리아는 거침없어요.”
“제 장점이죠.”
“맞아요.”
카를리나가 아델리아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그게 부럽기도 하고, 나랑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어요.”
어……?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고?
‘뭐지? 티파티에서 너무 나섰나? 그래서 절교 선언? 뭐 그런 거 하러 온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