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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75)화 (75/161)

75화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부단장께 안부 전해 주십시오. 얼른 돌아오라고도 전해 주시고요.”

“네! 꼭 전해 드릴게요!”

황태자 궁과 조금 떨어진 황궁의 정원.

아델리아는 황실기사단의 제복을 입은 기사 두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사들이 떠나자, 그들을 지켜보고 서 있던 아델리아가 중얼거렸다.

“기사들 진짜 입이 무겁네.”

[결국 알아낸 건 하나도 없어요.]

‘응, 내일 악시덤이 황태자 궁으로 찾아온다는 것 말고는.’

아델리아는 조금 전 기사의 말을 떠올렸다.

-내일은 대공 전하께서 황태자 궁을 찾아오시는 날입니다.

-대공 전하께서 황태자 궁을요?

-예. 대공 전하께서 검술을 알려 드리는 것 같았습니다. 기사들이 무척 부러워하곤 합니다. 제국의 영웅이었던 대공 전하가 아닙니까? 로시안트 제국의 기사라면 누구나 그분의 검술을 배우고 싶어 하죠.

이상했다. 카르세스에게는 검술 스승이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악시덤에게 검술을 배운다고?

‘다른 이유가 있어. 황태자 전하를 찾아오는 이유.’

[그게 뭘까요?]

‘모르지.’

그때였다.

“여기서 뭐 해?”

아델리아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어? 아델리아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하?”

카르세스가 팔짱을 낀 채로 아델리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델리아는 반가운 마음에 카르세스 앞까지 뛰어가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야, 영애.”

카르세스가 작게 웃더니 기사들이 사라졌던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는 기사들인가?”

아, 보셨나? 아델리아도 카르세스의 시선을 따라 정원 끝을 힐끔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 그게.”

“거짓말할 생각 말고. 그대는 머리를 굴릴 때마다 ‘아, 그게.’로 시작하는 버릇이 있거든.”

“우와 제가요?”

“그래.”

“별걸 다 기억하시네요.”

하하, 아델리아가 멋쩍은 듯 웃었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사고를 쳤길래 기사들까지 만난 거지?”

“사고라뇨.”

아델리아가 자신은 떳떳하다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오빠의 안부를 묻길래 대화를 조금 나눴을 뿐인걸요?”

“에스테르 경?”

“네!”

카르세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그래, 뭐. 그렇다고 치고.”

그러자 아델리아의 눈이 갸름해졌다.

“다른 영애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하세요?”

“이런 식?”

“저한테 너무 말을 편하게 하시는 것 같아서요!”

사고를 쳤다니. 내가 뭘 얼마나 사고를 쳤다고. 아델리아의 시선이 뾰족해지자, 카르세스는 오히려 자신이 황당하다며 맞받아쳤다.

“영애만큼 나한테 말을 편하게 하는 사람도 없는데, 나도 좀 편하게 하면 안 되나?”

“……아.”

불현듯 찾아온 깨우침에 아델리아가 탄식을 터트렸다.

‘맞네. 예전 버릇 때문에 나도 모르게 전하한테 편하게 까불고 있었어.’

카르세스가 아델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른 영애들과는 대화 자체를 하지 않아.”

주로 명령하거나 통보를 하지.

“그런 걸 대화라고 할 수는 없어.”

“그건, 그렇죠…….”

아델리아의 대답에 카르세스가 작게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런데 어딜 가는 길이었지? 날 보러 오던 길이었나?”

그러자 아델리아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전하. 보여 드릴 게 있어서요! 여기는 좀 그렇고, 집무실에서 건네 드릴게요.”

카르세스는 아델리아가 꼭 끌어안고 있는 두툼한 서류 봉투를 잠시 바라보다 황태자 궁을 향해 턱짓했다.

“가지.”

“네, 전하.”

아델리아와 카르세스는 함께 집무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집무실은 여전했다. 카르세스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녹아나 단정하고 아늑했다.

소파에 앉은 카르세스가 물었다.

“차?”

“달콤한 주스로 주세요.”

“단 걸 정말 좋아하는 거 같아.”

“네! 단 걸 먹으면 고민도 사라지는 기분이에요.”

“고민이 있나?”

“많죠! 일곱 살이라 해도 생각은 하고 사는걸요.”

“알지, 그건…….”

짧게 안부를 묻고 대답하는 시간이 흘렀다. 루드가 준비해 온 디저트와 과일 주스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어? 이건 푸딩 아니에요?”

“응, 루드에게 사 오라고 그랬어. 푸딩을 굉장히 좋아하는 거 같아서.”

그러자 아델리아가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푸딩 접시를 슬쩍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헤헤, 제가 그렇게 티를 냈어요?”

아델리아는 다른 디저트들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푸딩 접시부터 번쩍 들어 올렸다.

“라즈베리 콩포트가 올라간 푸딩이네요!”

“맘껏 먹어.”

“잘 먹겠습니다!”

뽀얗고 매끈한 푸딩을 위에서부터 스푼으로 가르자, 윤기가 줄줄 흐르는 붉은색의 라즈베리 콩포트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콩포트와 푸딩을 한 번에 뜬 스푼을 입안으로 밀어 넣자, 입 속에서 고소한 우유의 풍미와 콩포트의 새콤하고 달콤한 맛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와!”

아델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진짜 맛있어요! 전하도 드셔 보세요.”

“이미 먹어 봤어.”

“또 드세요.”

“내 입엔 맞지 않았어.”

“저번에는 잘 드셨으면서.”

“그거야.”

카르세스가 잠시 멈칫하다 말을 이어 갔다.

“에스테르 공작가의 파티시에 솜씨가 좋았던 거지.”

“아아, 그럼 공작저로 놀러 오세요. 또 대접해 드릴게요. 아니다. 훈련 올 때 가지고 올게요.”

그러자 카르세스가 옅게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마음대로 해.”

“네!”

아델리아는 씩씩하게 대답한 뒤, 푸딩을 먹으며 카르세스를 흘깃거렸다.

찻잔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고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는 모습이 무척이나 우아했다.

‘아, 이거 참…….’

조금 전 기사들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아델리아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내일 악시덤은 왜 오는 걸까? 궁금은 한데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절대 검술을 가르치러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몇 년째 괴롭혀 오던 사람이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었을 리 없고.’

그러나 아델리아는 악시덤이 카르세스를 어떻게 괴롭혔는지 정확히 들은 바가 없다.

‘전하께서는 자신과 관련된 일을 거의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 만약, 정신적인 압박으로 끝난 게 아니라…….’

학대에 가까운 일이 일어났다면?

[사실 그런 일이 진짜 있었다고 해도 선뜻 말하기란 쉽지 않았을 거예요.]

‘맞아. 게다가 상대는 제국에서 영웅으로 떠받드는 대공이니까.’

제국의 영웅이 조카를 학대했다?

증인도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카르세스의 말을 과연 그 누가 믿어 줬을까.

어린 황태자가 입을 닫아 버린 이유가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깨달아 버린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거라는 걸.

‘악시덤은 선대 황제 폐하의 사생아였어.’

[예전에도 정통성에 예민하게 구는 이유가 그거였죠.]

‘그렇지.’

그러나 선대 황제는 악시덤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악시덤에게 황가의 성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 어떠한 유산도, 작위도 내리지 않았다.

그런 악시덤에게 대공의 작위를 내린 사람은 지금의 황제, 켄드릭 바레티안이었다.

황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 온 동생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비록, 그게 배다른 형제였다 할지라도.

대공이라는 자리가 황위 계승권을 가지는 자리라는 걸 생각하면, 지금의 황제가 악시덤을 얼마나 아꼈는지 엿볼 수 있었다.

‘폐하께서는 악시덤을 친형제로 여기셨던 거야.’

그런 황제의 선의를 기만하고 형제의 자식을 교묘하게 괴롭혀 온 것을 생각하면,

‘성격이 진짜 음흉한 거 같아.’

“보여 줄 게 있다며?”

회상에 빠져 있던 아델리아가 카르세스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이걸 드리려고요. 디크레드 영지에서 자료가 도착했어요.”

아델리아는 두툼한 서류 봉투를 카르세스에게 건넸다.

“변방의 영지라 방문객이 적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유동 인구가 많군.”

카르세스가 명단을 대충 살피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아델리아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더 안 보시고요?”

“나중에.”

잠시 카르세스의 눈치를 보던 아델리아가 입을 열었다.

“검술 훈련은 언제부터 나오면 될까요? 내일은 어떠세요?”

그러자 카르세스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내일은 안 돼.”

“왜요?”

“선약이 있어.”

“아, 그러시구나.”

아델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대공이 온다는 게 사실인가 봐요.]

‘그런가 봐…….’

아델리아의 표정이 얼핏 굳었다.

“이틀 뒤로 하지.”

“네…….”

아델리아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두고 보실 거예요?]

리그하르트가 묻자, 아델리아가 대답했다.

‘아니. 릭, 내가 이런 걸 그냥 넘어갈 사람으로 보여?!’

[물론 아니죠!]

‘그래. 우린……. 내일 온다.’

대체 악시덤이 황태자 전하께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야겠어!

은색 스푼을 쥔 작은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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