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집으로 돌아온 아델리아는 저녁을 급히 먹고 방으로 올라왔다.
“이건 다 뭐야, 세라?”
아델리아가 테이블 위로 쌓여 있는 편지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세라가 감격에 겨운 눈동자를 일렁이며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티파티 초대장이요!”
“또?”
“또라뇨! 이게 다 사교계에서의 아가씨의 입지를 말해 주는 거라고요!”
아직 사교계 데뷔도 하지 않았는데 이 정도의 관심이라니!
세라는 테이블 위로 쌓여 있는 편지를 보며 몹시도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아델리아는 썩 기쁘지 않았다. 대충 눈짐작만으로도 초대장의 개수가 스무 개는 넘어 보였다.
이걸 언제 다 가? 아니, 간다고 하더라도…….
카를리나의 티파티를 떠올리자, 벌써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좀 추리자, 세라. 이걸 다 갈 순 없어.”
아마 난 영애들 기 싸움 속에서 말라 죽을지도 몰라.
그러자 세라가 놀란 눈을 뜨고 말했다.
“네? 아가씨, 이것도 추린 건데요.”
“응?”
지금 사교계에서는 아델리아의 이야기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소문 속 에스테르 영애를 직접 보고 싶어 하는 귀족 가문의 영애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초대장을 보내왔다.
“온종일 초대장 분류만 한 것 같아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의 스무 배는 넘게 도착했었다고요.”
세라가 자신의 어깨를 주먹으로 토닥거리며 말했다.
“그러니 이 초대장의 티파티는 직접 답장을 쓰시고 꼭 참석하셨으면 좋겠어요. 사교계에서도 영향력이 큰 가문만 추려 놨거든요.”
세라는 분명 귀족 영애들과 친해지는 일에 큰 도움이 될 거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 그, 그래? 그럼 가야지…….”
아델리아가 힘없이 대답했다.
귀족 영애의 길이란, 쉬운 게 하나 없구나.
검만 안 들었을 뿐, 우아하리라 여겼던 티파티는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연 내가 이 전쟁터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델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아니지, 첫 파티부터 난 절친을 만들었잖아!’
아델리아는 올리비아를 떠올리며 히죽거렸다. 게다가 카를리나와의 관계 역시 진전이 있었다.
수확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란 소리였다.
‘물론, 모든 티파티가 카를리나의 티파티처럼 칼부림이 나진 않겠지.’
차라리 카를리나의 티파티처럼 대련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델리아가 가장 적응되지 않았던 것은, 영애들 사이에서 오묘하게 흐르는 기 싸움이었다.
사람을 평가하듯 오르내리던 부채 너머의 눈동자와 은근히 가시를 품은 어투들이 더욱 거슬렸다.
‘그렇다고 영애들 얼굴에다 장갑을 집어 던지며 결투를 신청할 순 없잖아.’
사내였다면 그렇게 승부를 봤을 텐데, 여자들은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걱정과는 별개로, 다른 가문의 티파티는 또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리고 또 어떠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지 솔직히 기대되기도 했다.
“좋아, 세라! 그런데 내가 답장을 다 적어야 해?”
나 좀 바쁜데. 되게 되게 바쁜데?
그러자 세라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겠어요, 아가씨. 제가 이번만큼은 답장을 다 보내 드릴게요.”
“진짜?!”
“네, 대신! 다음 티파티에서는 위험한 일에 참견하지 않기. 약속.”
세라가 새끼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델리아는 세라의 얼굴과 새끼손가락을 번갈아 보다 느릿하게 제 손가락을 걸었다.
“그럴게.”
헤헤, 아델리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손가락은 걸 수 있지만, 지킬 생각은 없는 아델리아였다.
***
오늘도 공작저의 밤이 깊어졌다.
답장 쓰는 일을 끝낸 세라도 돌아가고 공작저 고용인들의 대부분이 잠에 빠져든 그 시각.
“후우, 쓰읍, 후우, 쓰읍, 후우—.”
아델리아는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어때요? 뭔가 달라진 느낌이 들어요?!]
‘으음. 잘 모르겠어.’
아델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심장에 모아 두었던 오러를 꺼내었다.
따뜻한 온기가 심장에서 흘러나와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한없이 자유롭게 퍼져 나가던 오러를 단박에 끌어당겨 다시 심장 속으로 가두었다.
아델리아는 오러를 완벽하게 감추기 위해 몇 시간째 훈련을 반복 중이었다.
다시 아델리아가 오러를 전신으로 흘려보냈다.
평소라면 백금색의 화려한 빛이 몸 주위로 일렁거려야 했지만, 지금은 그 어떠한 빛도 보이지 않았다.
오러의 빛과 색을 감추는 것은 일단 성공인 듯 보였다.
‘어때, 지금은?’
아델리아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리그하르트가 대답했다.
[실패인 것 같아요. 누님의 오러가 느껴져요.]
후우. 아델리아가 깊게 들이마신 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 오러를 심장으로 끌어모았다.
아델리아는 감고 있던 두 눈을 뜨고서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역시, ……뭐든 단시간에 되는 건 없나 봐.’
내일 황태자 궁으로 몰래 잠입하기 위해서는 오러를 완벽하게 숨겨야만 했다.
‘심장에 가둬 두면 어느 정도 기운을 숨길 수 있지만, 악시덤이나 황태자 전하는 티파티의 영애들과는 다른 수준이야.’
미세하게나마 오러가 흘러나온다면 그들은 단박에 알아차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급하게 훈련을 반복했다.
‘누가 나더러 천재래.’
이런 것도 한 번에 못 해내는데.
[다른 기사들 앞에서는 그런 말씀 마세요. 돌 날아와요.]
흥.
아델리아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침대 아래로 내려온 아델리아는 욕실로 갔다.
훈련이 제법 힘들었던 탓인지, 얼굴이며 잠옷이 땀에 젖어 있었다.
아델리아는 물을 틀어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다. 수건에 얼굴을 닦으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좋아. 아직 날이 밝으려면 시간이 남았어. 조금 더 해 보자!’
결의를 굳힌 눈동자가 반짝였다.
***
아침이 밝았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던 아델리아는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아델, 도착했어. 눈 좀 떠 봐.”
“어? 으응……. 하아암!”
아델리아가 잠기운에 취한 얼굴로 길게 하품했다.
“빨리 왔네.”
아델리아는 데릭과 함께 황궁으로 들어왔다. 때마침 데릭 역시 기사단에 복귀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마차는 먼저 신전 앞에 섰다. 아델리아는 데릭에게 데오나를 만나러 신전으로 간다고 했다.
‘거짓말한 건 마음에 걸리지만, 그렇다고 황태자 궁으로 잠입하러 간다고 말할 순 없잖아?’
사실대로 말했다면 데릭이 펄쩍 뛰었을 것이다. 아니, 데릭의 성격상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할지 모른다.
‘황실기사단의 부단장을 잠입에 투입시킬 순 없지.’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린 아델리아가 자신을 따라 내린 데릭을 향해 해맑게 웃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오빠.”
“당연한 일인걸.”
데릭이 아델리아의 뺨을 살짝 튕기듯 꼬집었다. 아델리아가 헤헤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이제는 주말에만 보겠네?”
그러자 데릭이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델, 그리 신날 건 또 뭐야? 오빠랑 떨어지게 생겼는데 서운하지도 않아?”
“무슨 소리야, 오빠. 당연히 서운하지. 오빠가 없으면 공작저가 텅 빈 느낌일 거야.”
“아델…….”
데릭의 눈꼬리가 아래로 쳐졌다.
아델리아는 일렁거리는 데릭의 눈동자를 바라보다 기운 차리라며 데릭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작은 손이 데릭의 등허리를 차분하게 토닥거렸다.
“아침마다 연무장을 돌며 손을 흔들어 주던 오빠도, 식사하자고 부르러 오던 오빠도. 그리고 함께 푸딩을 먹어 주던 오빠도 이젠 없는 거잖아.”
그러자 데릭이 아델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 더 함께 있을까? 지금 들어가서 단장님께 말씀드리면…….”
데릭의 말에 아델리아가 휙 떨어져 나가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냉정해진 아델리아의 음성에 데릭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렇게 빨리 복귀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의 말을 아델리아가 끊었다.
“빨리라니, 오빠가 기사단을 떠나 공작저에 온 게 언제인 줄 알아? 벌써 한 달은 족히 넘었다고. 이렇게 오래 기사단을 떠나 있는 부단장이 세상에 어딨어?!”
황실기사단의 기강이 언제 이렇게 해이해진 거야?!
‘나 때는 말이야, 어? 기사단을 일주일만 빠져도 바로 퇴출이었어!’
은퇴 전 황실기사단의 부단장이었던 아델리아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델리아가 뾰족한 눈빛으로 데릭을 쏘아보았다. 데릭은 매서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아니, 아델. ……지금은 급한 출정도 없고 네가 아직 다 나은 것 같지도 않—.”
“됐거든요, 오라버니? 나 이제 아픈 곳 하나도 없거든? 자자, 농땡이 부릴 생각은 그만하고. 이제 들어가, 어서.”
아델리아가 데릭을 다시 마차에 밀어 넣었다.
“아, 아델.”
“내 걱정은 이제 그만 접어 두시라고요.”
“하지만…….”
데릭은 여전히 걱정을 거두지 못했다.
아델리아의 몸속 오러도 걱정이고 아직 힘을 숨기고 있는 성검이라는 놈도 걱정이었다.
그러나 아델리아가 단호하게 밀어붙이자, 못 이기는 척 마차에 올랐다.
데릭이 마차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정말 혼자 괜찮겠어?”
“물론이지. 데오나만 잠깐 보고 바로 돌아갈 거야. 걱정하지 마, 오빠.”
“아데엘…….”
아델리아는 마부에게 외쳤다.
“출발!”
마차가 황실기사단의 건물이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델리아는 손을 흔들며 데릭을 향해 말했다.
“종종 찾아갈게!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오빠! 주말에 봐!”
“조심해, 아델!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고.”
“알았어!”
씩씩한 아델리아의 대답에도 데릭은 창문에 매달린 채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마차가 서서히 멀어졌다.
데릭의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리그하르트가 말했다.
[그래도 형님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응, 오빠 덕분에 떳떳하게 들어올 수 있었어.’
여차하면 몰래 잠입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들켰을 때 일이 커지긴 하겠지만.
아델리아는 신전 건물을 슬쩍 흘겼다가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황태자 궁이 이쪽이었지.’
전하! 제가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