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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77)화 (77/161)

77화

“프레이르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루드가 집무실로 들어와 말했다. 카르세스는 보고 있던 책을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안으로.”

“예, 전하.”

날이 밝자마자 악시덤은 황궁을 찾아 황제를 알현했다. 그리고 알현실에서 나온 악시덤은 곧장 황태자 궁으로 찾아왔다.

카르세스는 악시덤이 들어오자 의자를 밀어내고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숙부.”

“……오랜만입니다, 전하.”

악시덤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집무실로 들어온 악시덤은 소파에 앉지 않았다. 그저 느릿한 걸음으로 집무실 안을 천천히 배회할 뿐이었다.

그러다 루드와 아스틴을 바라보며 미간을 구겼다.

“차분히 대화를 나누기엔 주위가 너무 번잡스럽군요.”

아랫것들을 내보내라는 소리였다. 에둘러 말하기는 했지만, 경멸을 숨기지 않은 강압적인 어조였다.

카르세스가 악시덤을 잠시 쳐다보다 루드와 아스틴을 향해 말했다.

“모두 나가라.”

그러자 루드와 아스틴이 카르세스를 쳐다보았다.

‘안 됩니다, 전하.’

‘전하!’

그러한 그들의 걱정이 들리는 듯했다.

그들과 조용히 눈을 마주친 카르세스가 옅게 미소 지으며 담담히 말했다.

“차를 준비해 와, 루드. ……아스틴, 너도 루드를 도와라.”

그러자 루드가 별도리 없이 대답했다.

“예, 전하. ……분부 따릅니다.”

루드와 아스틴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다가 어쩔 수 없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쿠웅— 문이 닫히고 카르세스가 책상을 돌아 나오며 악시덤에게 말했다.

“숙부. 거기 서서 그러지 말고 일단 앉으시죠.”

그러나 악시덤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집무실 책장 앞으로 걸어가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뽑았다.

“많이 바쁘신 모양입니다, 전하.”

투욱, 툭— 악시덤이 빼낸 책을 성의 없이 훑어보다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바닥에 하나둘 쌓이는 책을 내려다보며 카르세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숙부만 하겠습니까.”

카르세스는 악시덤의 행패를 못 본 척하며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그래, 오늘은 또 어떤 가르침을 위해 오셨습니까?”

그의 말에 집무실 구석구석을 둘러보던 악시덤의 시선이 카르세스에게로 향했다.

“가르침이라. 가르침을 드리고 싶어도 전하께서 워낙 허약하셔서 말입니다.”

“송구합니다. 이상하게 체력이 좀처럼 붙지를 않는군요.”

“혹시, 지금 훈련 방식이 전하와 맞지 않는 게 아닙니까? 그런 거라면 제가 폐하께 말씀드려 전하의 훈련을 다시 봐 드리겠습니다.”

예전처럼 말이지요. 하며 악시덤이 다정하게 웃었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충고는 겸허히 듣겠습니다.”

카르세스가 고요히 대답했다. 그런 카르세스를 쳐다보던 악시덤은 금세 흥미가 식었다는 얼굴로 말했다.

“세월이 참 빠릅니다. 전하를 처음 뵈었던 날로부터 벌써 7년이 흘렀습니다.”

“그렇군요.”

카르세스가 담담하게 대답하자, 악시덤의 심기가 순간 뒤틀렸다. 책장 주위를 서성이던 그의 걸음이 조금씩 카르세스를 향했다.

“눈만 마주쳐도 벌벌 떠시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하하, 카르세스가 낮게 웃었다.

“그래서 서운하십니까?”

“서운하다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뿌듯합니다. 조금씩 황족다운 황족이 되어 가시는 듯하여.”

악시덤의 가느다란 시선이 카르세스를 응시했다.

“오랜만에 대련 어떻습니까?”

“…….”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저와의 대련이 두려운 것은 아니실 테고.”

악시덤이 소파에 앉아 있는 카르세스의 뒤에 섰다.

“아니면.”

그리고 카르세스의 왼쪽 어깨를 다정하게 움켜쥐더니 이내 힘을 주어 누르기 시작했다.

“아직도 이쪽 어깨가 다 낫질 않으셨습니까?”

카르세스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목울대가 크게 꿀렁거렸다.

그 반응에 악시덤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

[악시덤은 지금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고 있어요!]

‘뭐?! 왜!’

[잠시만요! 대화 소리가 작아서 잘 안 들려요.]

아델리아는 황태자의 집무실과 조금 떨어진 정원에 있었다.

작은 잎사귀가 가득 달린 키 낮은 정원수 아래 몸을 웅크린 채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분발해! 너 성검이잖아!’

[성검이 만능은 아니잖아요!]

아델리아는 황태자 궁 근처의 정원에 자리 잡고 리그하르트를 집무실 창가로 던져두었다.

간신히 리그하르트와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아직도 안 들려?’

[어……. 음. 가르침을 드리고 싶……, 허약?]

‘뭐라는 거야.’

[자, 잠시만요. 악시덤이 황태자더러 훈련해야 한다고 그러네요? 예전처럼 자기가 봐주겠다고요.]

‘훈련?’

뭐야, 그럼. 예전에는 진짜 황태자 전하의 검술 훈련을 도왔다는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 아델리아가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이자, 리그하르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누님, 악시덤이 황태자를 처음 본 게 7년이나 되었대요.]

‘음, 오래됐네.’

그만큼 오랜 시간을 시달렸다는 거겠지.

그때, 리그하르트가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 어어?]

‘왜 그래?’

[지금 누렁이가 황태자한테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뭐?’

[어깨! 어깨를 잡았어요! ……어? 이상한데요? 황태자가 고통스러워하는 거 같아요. 다쳤나?]

어깨? 리그하르트의 말에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델리아가 물었다.

‘……혹시 왼쪽 어깨?’

[오! 맞아요! 왼쪽이에요!]

‘그건 황태자 전하의 고질병 같은 거였어. 치료 시기를 놓쳤다고 들었—.’

잠깐. 그럼 그 상처가 성년이 된 이후에 생긴 상처가 아니라는 소리야?

카르세스가 그 상처에 대해 털어놓지도 않았고 아델리아가 캐물을 이유도 없었던 탓에 그 상처가 어디서 어떻게 생겼는지도 들은 바가 없었다.

‘막연히 성년이 되고 난 뒤 전장에서 생긴 줄로만 알았지…….’

아델리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정원수 나뭇잎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집무실 창문을 바라보며 리그하르트를 불렀다.

‘릭, 또! 또 뭘 하고 있어? 위험해 보이진 않아?!’

[누님! 왼쪽 어깨! 악시덤이 그런 게 맞나 봐요!]

리그하르트가 악시덤을 흉내 내며 묵직하고 늘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이쪽 어깨가 다 낫질 않으셨습니까, 라고 하는데요?]

‘허!’

아델리아가 울컥하자, 리그하르트의 말이 다급히 쏟아졌다.

[누님! 어깨를 아주 쥐어짜듯이 움켜쥐고 있어요! 황태자가 아주! 매우!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뭐?! 치사하게 아픈 상처를 또 건드려?!’

이씨! 순간, 더는 참지 못한 아델리아가 정원수에서 빠르게 튀어 나갔다.

‘릭! 가자!’

[넵!]

아델리아가 명령하자, 창틀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리그하르트가 빠르게 아델리아를 향해 날아왔다.

***

“이런. ……너무도 태연하길래 다 나으신 줄 알았습니다.”

악시덤이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움켜쥔 손아귀에 힘을 더욱 실었다. 그리고 카르세스의 핏대 선 목덜미를 서늘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가 뭐라 그랬습니까. ……애쓰지 말라 하지 않았습니까? 3년이 지났는데도 이런 상태라면, 포기하는 게 나을 텐데요.”

쯧쯧, 혀를 차던 악시덤이 말을 이어 갔다.

“장차 황제가 되실 분께서 이런 상처라니.”

그의 말에 카르세스가 어금니를 꽉 다물며 자신의 왼쪽 어깨를 움켜쥔 손을 내려보았다.

처음 악시덤을 만났던 날이었다.

그가 제국의 영웅이라 불리기 시작하고 대공의 작위를 받게 된 그날.

-내가 조카님에게 한 수 알려 주려고 왔소.

카르세스 나이, 고작 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황태자의 검술 스승 자격으로 왔다던 악시덤은 무자비하게 검을 휘둘렀다.

카르세스가 제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전성기를 맞이한 제국의 전쟁 영웅 앞에서는 발톱이 죄다 뽑힌 맹수 새끼에 불과했다.

-끄아아악!

악시덤의 검에 왼쪽 어깨가 관통당했다. 어깨를 부여잡고 연무장 바닥으로 쓰러진 카르세스의 머리 위에서 겨울 바다보다 차가운 음성이 떨어졌다.

-쯧, 황실의 하나뿐인 후계자께서 이런 공격 하나 못 피해서야 되겠습니까? 이곳이 전장이었다면, 전하의 목이 수백 번도 넘게 떨어져 나갔을 겁니다. ……일어나십시오, 이제 시작입니다. 그 나약해 빠진 정신상태를 제가 고쳐드리겠습니다.

그 뒤로도 악시덤은 주기적으로 카르세스를 찾았다.

왼쪽 어깨의 상처가 아물 만하면 다시 헤집어 놓고 떠났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악시덤의 그러한 행동들은 그저 분풀이였던 것 같았다. 자신은 가질 수 없었던 정통성을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질 수 있었던 카르세스를 향한.

그러다 상황이 바뀐 것은 3년 전부터였다.

에스테르 공작이 영웅 자리에 오르고 악시덤이 물러나자, 황제가 카르세스의 훈련을 다른 이에게 맡긴 것이다.

덕분에 지난 3년간은 어깨 치료에 집중할 수 있었다.

‘다 나은 줄 알았더니…….’

악시덤이 상처를 강하게 누르자 옛 고통이 다시금 떠올랐다.

“황궁 폐쇄령을 명한 사람이 황태자 전하라 들었습니다. 괜한 짓을 하셨더군요. ……내가 그리 죽은 듯 살라 하였거늘.”

“…….”

그러자, 카르세스가 어깨를 짓누르던 악시덤의 손을 덥석 거머쥐었다.

“제가 행한 일 중 제국법에 어긋난 부분이 있었습니까?”

“…….”

“그리고.”

카르세스가 힘주어 악시덤의 손을 떼어 내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제가 언제까지고 여섯 살에 머물러 있을 거로 생각하셨던 것은 아니겠지요.”

그의 말에 악시덤이 하……. 작게 탄식을 터트렸다.

카르세스는 악시덤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 몸을 돌리더니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숙부. 나는 더 이상 숙부가 두려워 벌벌 떨던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그러니 앞으로는 황태자 궁을 찾아오시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악시덤이 말없이 카르세스를 쳐다보자, 카르세스가 단단한 음성으로 다시 한번 말했다.

“제 허락 없이는, 황태자 궁으로 들어오지 말라 했습니다, 숙부.”

악시덤의 턱이 불뚝거리고 이마에는 핏대가 섰다.

“지금, 감히 내게…….”

악시덤의 눈동자에 분노가 일었다. 그의 손이 허리춤에 있는 검으로 향했다.

그 순간.

콰앙—!

집무실 문이 굉음을 내며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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