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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78)화 (78/161)

78화

집무실 안, 카르세스와 악시덤의 고개가 문을 향했다.

거칠게 열린 문 사이로 두 뺨을 붉게 물들이고 헥헥, 숨을 내쉬는 아델리아가 서 있었다.

‘뭐야…….’

아델리아의 붉은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 집무실 분위기를 살폈다.

‘악시덤이 황태자 전하를 괴롭히고 있다며! 그런데 이 조용한 분위기는 뭐야!’

위급한 상황이라며, 릭!

아델리아가 타박하자, 리그하르트가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어, 아, 아닌데……. 정말 어깨를 쥐어짜고 있었는데…….]

아델리아는 흐트러졌던 머리카락을 재빨리 손질한 뒤,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저, 소, 손님이 계셨군요.”

아델리아가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드레스 중간을 살짝 잡아 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공 전하.”

그러자, 악시덤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악시덤의 엄중한 목소리가 아델리아를 향했다.

“에스테르 영애.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오……. 에스테르 영애께서 다른 영애들이 배우는 예법에 무지하단 소리는 익히 들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괜찮습니다.”

그때, 카르세스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악시덤의 말을 막았다.

“다소 무례한 부분이 있었으나, 아직 일곱 살이 아닙니까, 숙부?”

카르세스의 물음에 악시덤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불쾌함이 가득한 시선으로 대꾸했다.

“여기가 어딥니까, 전하? 황태자 전하의 집무실입니다. 아무나 이렇게 들어올 수는—.”

“아무나가 아닙니다.”

다시 카르세스가 악시덤의 말허리를 잘랐다. 카르세스는 아델리아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다.

“저의 동기이자, ……친우입니다.”

카르세스의 대답에 악시덤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지금, ……친우라고 하셨습니까?”

“예.”

카르세스는 아델리아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에 놀란 것은 악시덤만이 아니었다.

‘친우……, 라고?’

카르세스가 저를 친우라고 부르자, 아델리아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카르세스가 지어낸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카르세스의 말이 이어졌다.

“소식 못 들으셨나 봅니다, 숙부. 에스테르 영애와 제가 함께 검술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친우라고 하시니…….”

“벗을 삼는 것에 성별과 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카르세스가 악시덤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 갔다.

“검술 훈련에 매진하느라 황궁 예법을 익히는 데 다소 미진한 부분이 있긴 하나, 그 또한 앞으로 배움을 통해 차차 나아질 겁니다. 그러니 오늘 일은 숙부께서 너그러이 넘어가 주시지요. ……아직 일곱 살이지 않습니까.”

그러자 악시덤이 카르세스에게서 아델리아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델리아를 위아래로 훑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아무래도 더 이상 대화를 나눌 분위기는 아닌 듯하니.”

“그러시죠.”

“물러갑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악시덤이 몸을 홱 돌려 집무실을 빠져나가려다 아델리아 앞에서 잠시 멈췄다.

그의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아델리아를 노골적으로 훑었다.

그에 질세라, 아델리아는 일부러 더 천진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가세요, 대공 전하!”

그러자 악시덤의 미간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는 쯧, 혀를 차며 아델리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악시덤이 사라지고 때마침 루드와 아스틴이 나타났다.

“아니, 문이 왜…….”

뒤늦게 차와 디저트를 준비해 온 루드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너덜거리는 문을 흘깃거리며 중얼거렸다.

흡사 얼마 전 에스테르 공작가의 마차 문이 덜렁거리던 것과 겹쳐 보였다.

그러다 아스틴이 아델리아를 발견하고 루드에게 속삭였다.

“에스테르 영애가 오셨는데요?”

“그러게. 그런 것 같네.”

아델리아가 멋쩍어하는 표정으로 루드와 아스틴에게 차례차례 인사를 건넸다.

카르세스는 아델리아를 소파에 앉도록 했다. 차와 쿠키가 나오고 루드와 아스틴이 카르세스의 곁에 섰다. 그리고 한동안 카르세스는 침묵했다.

아델리아는 이 침묵이 묘하게 불편했다.

‘문을 차고 들어와서 화가 나신 걸까…….’

역시, 그건 예법에 어긋난 일이긴 했지.

아델리아가 카르세스의 눈치를 살피고 있자니, 리그하르트가 주눅이 든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누님. 제가 괜히 호들갑을 떨어서…….]

‘아니야, 릭. 위급한 상황인 줄 알아서 그런 거잖아. 잘했어.’

아델리아가 리그하르트를 다독였다.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악시덤이 카르세스에게 위해를 가하는 상황에서 앞뒤 재 가며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아델리아는 과거, 카르세스의 호위 기사였고 지금도 악시덤에게서 그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었으니까.

아마, 아델리아는 시간을 되돌려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래도 사과는 해야겠지?’

아델리아가 입술을 달싹거리려던 그때, 카르세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훈련은 내일이라고 했을 텐데.”

카르세스는 다리를 꼬고 앉아 시선을 테이블 위에 둔 채로 말했다.

“어째서 온 거지? 그리고 문을 부순 이유는 또 뭐야?”

카르세스는 조용히 물었다. 화가 나거나 당황한 사람 같지 않았다. 그의 담담한 반응에 아델리아는 조금 안도하며 대답했다.

“날짜를 헷갈렸다고 하면…….”

카르세스가 시선을 올려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그 보라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아델리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꿰뚫어 보는 눈이야.’

시험대 위에 상대를 올려놓고 가늠하기 위한 시선이었다. 겉은 담담하지만, 그것은 그저 포장에 불과했다. 카르세스는 머릿속으로 이미 수많은 가정을 세워 두고 아델리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델리아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카르세스 앞에서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그동안 쌓아 온 신뢰마저 무너트리는 일이 될 거라고.

아델리아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걱정, 되어서요…….”

그러자 카르세스의 한쪽 눈매가 일그러졌다.

“걱정? 내가?”

“네…….”

“대체 뭐가?”

“오늘 선약이 있어서 훈련을 미루겠다고 하셨을 때. ……전하의 표정이 많이 안 좋으셨거든요.”

“…….”

그러자 카르세스의 눈빛이 더욱 매서워졌다.

감정을 숨기며 살아온 지, 여러 해였다.

물론, 제아무리 감정을 숨긴다고 하더라도 빈틈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고작 일곱 살짜리 아이가 그 미세한 변화를 느꼈다고……?’

그래서 걱정되어 찾아왔다고?

“그럼 문은 왜 부순 거지? 숙부께는 그대가 일곱 살이니 이해하라 설명했지만, 내가 아는 그대는 그 정도의 예의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야.”

으음, 작게 침음하던 아델리아가 입을 열었다.

“바, 반가워서?”

“…….”

그러자 카르세스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아, 정말……! 아델리아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그 또한 걱정되어서 그랬습니다!”

“걱정되어서 문을 발로 차고 들어왔다?”

“네!”

아델리아는 둘러대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이미 황태자가 자신의 대부분을 파악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안에서 위험한 일이 생겼을까 봐 걱정되어서요!”

아델리아는 황태자 궁을 찾았다가 루드와 아스틴이 심각한 표정으로 집무실을 빠져나오는 걸 보았다고 설명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표정이었다고요! 그래서 문을 두드리고 대답을 기다렸다 들어갈 생각조차 못 했어요! 그냥 당장 뛰어들어야 할 것 같고! 그래야! ……그래야!”

“……그래야?”

아델리아가 슬며시 눈을 떴다. 시선을 테이블로 내린 뒤 슬픈 얼굴로 중얼거렸다.

“전하께서 다치지 않을 거 같아서…….”

“…….”

다시 집무실에는 적막이 흘렀다.

루드와 아스틴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특이하단 말이지.’

루드가 아델리아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카르세스의 최측근인 자신들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악시덤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 영웅이었던 업적을 떠올리며 존경을 표했다.

‘그런데 에스테르 영애는 뭘 알려 준 것도 없는데 대공이 전하께 해를 끼칠 거라고 느낀 것 같아.’

전하께서 언질을 주셨나. 아니지, 알게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렇게 허술한 분은 아니시지.

루드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카르세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오지 말아야 했어.”

아델리아가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곤란해지셨어요? 저 때문에?”

그러자 카르세스가 시선을 내린 채 고개를 저었다.

“곤란해지는 건 그대야. 내가 아니라.”

“제가요? 에이……. 아까 전하께서 그러셨잖아요. 저 일곱 살이라고. 대공께서도 고작 일곱 살짜리의 실수 정도는 너그럽게 넘어가 주실 거예요.”

“숙부에게는 그대가 일곱 살이라는 게 중요하지 않아. 에스테르라는 게 중요하지.”

카르세스는 아델리아를 응시하며 말을 이어 갔다.

“영애. 숙부와는 최대한 얽히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니…….”

잠깐 침묵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와 얽히지 않는 게 좋아.”

카르세스의 말에 눈을 깜빡거리던 아델리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미 늦었어요,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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