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늦다니?”
“네. 황태자 전하의 검술 훈련 동기에다, 전하께서 직접 친우라고도 하셨는데 이 이상 어떻게 얽히지 않겠어요?”
아델리아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묻자, 카르세스는 입술을 벙긋거리다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조금 전 대공 앞에서 훈련 동기라느니, 친우라느니,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던 까닭이다.
끙, 카르세스가 침음하자 아델리아가 헤헤, 눈매를 접어 웃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전하. 그래 봤자 대공께서는 당장 저를 어쩌지 못하실 거예요. 지금 제국의 영웅은 우리 아버지니까요.”
그랬다. 아직은 에스테르 공작가의 권세가 하늘에 있었다.
2년 뒤, 로샤크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테오스와 데릭이 죽지만 않는다면, 한동안 그 영웅 자리는 에스테르의 차지일 것이었다.
그 영웅 자리가 가질 수 있는 명예와 권력, 재력과 위상까지도.
그랬기에 아델리아는 당장 악시덤이 어찌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확신이 아델리아의 행동에 힘을 실어 주었다.
아델리아가 주먹을 불끈 쥐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에스테르가, 아니. 제가 전하를 꼭 지켜드릴 테니까요!”
아델리아가 해맑게 웃자, 카르세스도 덩달아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든든하군.”
카르세스의 보라색 눈동자가 맞은편에 앉은 여자아이에게로 향했다.
일곱 살짜리 여자아이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영웅처럼 당당하고 위엄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지켜 주겠다며 꽉 틀어쥔 주먹이 몹시도 작고 하얘서 또 웃음이 났다.
어쩐지 이 아이 앞에서는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고민들이 죄다 하찮고 부질없게 느껴졌다.
카르세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알았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
“벌써요?”
아델리아가 발긋한 뺨을 부풀리며 물었다.
표면상이긴 해도 친우가 된 기념으로 깊은 대화도 좀 더 나누고 대공 욕도 같이 하려 했는데.
아델리아가 아쉽다는 표정을 짓자, 카르세스가 말했다.
“내가 오늘은 좀. ……피곤해서 그래. 내일 보도록 하지.”
“아…….”
하긴……. 악시덤을 상대하느라 진이 빠지셨는지도 모르지.
카르세스가 아스틴에게 명령했다.
“아스틴, 마차까지 영애를 배웅하도록.”
“예, 전하.”
아스틴이 아델리아의 곁에 섰다.
“가시죠, 영애.”
“네.”
아델리아는 소파에서 훌쩍 내려와 우아하게 드레스를 들어 올렸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전하.”
“그래.”
황태자 궁에서 나온 아델리아는 잠시 멈춰 서서 고요한 황태자 궁을 돌아보았다.
‘정말 어디 다치신 건 아니겠지?’
[겉으로는 멀쩡하긴 한데요……. 분명 어깨 쪽에 문제가 생긴 걸 거예요!]
‘내가 그걸 아는 척할 수도 없고…….’
아까 대공이 어깨를 누르지 않았냐고, 그래서 상처가 생긴 건 아니냐고 물어볼 수 없었다.
‘훔쳐본 게 들키기라도 하면…….’
으으, 아델리아가 소름 끼친다며 어깨를 떨었다.
‘됐어. 그냥 내일 와서 상태를 보면 되겠지.’
아델리아는 황태자 궁을 향했던 시선을 힘겹게 거두고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날 저녁.
훈련이 미뤄졌다는 황태자의 서신이 공작저로 도착했다.
***
다음 날, 아침.
아델리아는 아침부터 펠슨 선생을 찾아가 상처 치유에 효과적인 약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자유롭게 연구하라더니! 그냥 필요할 때마다 부려 먹으려고 가둬 둔 게 아닙니까!
투덜대는 펠슨을 향해 아델리아가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에이, 펠슨 선생. 주위를 둘러봐요. 문을 걸어 잠근 것도 아니고 지키는 사람조차 없어요. 나가시려면 걸어서 나갈 수 있다고요?
이런 걸 누가 가뒀다고 하냐며 되묻는 아델리아의 말에 펠슨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약을 만들어 던져 주었다.
-상처를 직접 보지 못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지만, 어지간한 상처들은 빠르게 아물 겁니다. 이 약으로도 낫지 않으면 차라리 데려오세요. 직접 눈으로 봐야 제대로 된 치료를 할 수 있으니까.
-네, 그럴게요! 고마워요, 펠슨 선생! 선생은 천재예요!
-큼, 크흠, 크흐흠!
아델리아가 펠슨의 손을 붙잡고 붕붕 흔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유리병에 든 약을 조심스레 끌어안고 방으로 돌아오니, 세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라는 공작저에 손님이 찾아왔다고 했다.
“누가 왔다고?”
아델리아가 작은 가방에 약병을 챙겨 넣으며 세라에게 물었다.
그러자 세라가 가방을 건네받아 매듭을 지으며 대답했다.
“모티반스 넬로체 백작님이요.”
“넬로체 백작?”
세라의 입에서 낯설지 않은 이름이 나오자, 디크레드 영지에서 보내온 명단이 생각났다.
그때, 리그하르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누님! 그놈이에요! 옛날에 누님더러 자기의 정부나 하라고 서신을 보냈던 그놈이요!]
아델리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기억하고 있어.’
디크레드 영지의 출입객 명단도 명단이지만, 과거 모티반스에게 받았던 서신 내용이 함께 떠올랐다.
딱 한 번 마주친 게 전부라, 얼굴은 흐릿하지만 서신의 내용만큼은 선명했다.
아델리아의 턱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래서 세라, 지금 그 백작은 어디에 있어? 돌아갔어?”
세라가 아델리아의 가방을 협탁 옆에 조심스레 옮겨 놓고 대답했다.
“아니요, 응접실에 계세요.”
응접실에? 아델리아가 의아하다는 듯 다시 물었다.
“아버지는 지금 기사단 훈련 중이시잖아.”
테오스는 한번 훈련에 들어가면 반나절 이상은 연무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넬로체 백작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는데…….’
세라는 화장대 앞에 앉아 있는 아델리아에게로 걸어오며 대답했다.
“네, 그래서 돌아가시라 했는데도 굳이 끝나실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거예요.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흐음, 그렇단 말이지. 잠시 생각하던 아델리아가 세라에게 물었다.
“혹시 응접실에 차가 이미 들어갔어?”
“아직 준비 중이에요, 아가씨.”
“잘됐다!”
아델리아가 짝짝 손뼉을 치며 무해하게 웃었다.
“그 차. 내가 가지고 들어갈래!”
“아가씨께서요? 왜요?”
되묻는 세라의 말에 아델리아가 떳떳하게 가슴을 펴고 말했다.
“가주께서 손님을 맞이할 상황이 아니니, 나라도 나서야지. 에스테르 공작가의 사람이 냉혹하고 예의를 모른다는 소문이 나면 어떡해?”
“…….”
그러자 세라의 눈썹이 천천히 올라갔다.
“세상에.”
아가씨! 세라가 아델리아를 꽉 끌어안았다.
“윽! 세, 세라!”
“정말, 어쩜 이리 의젓하신지. 마냥 사랑스럽고 어리신 줄 알았더니, 어느새 이리 자라셔서 가문을 생각하실 줄도 아시고!”
“그, 그야 뭐.”
괜히 뜨끔해지는 아델리아였다.
***
테오스를 기다리며 느긋하게 응접실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모티반스가 놀라 물었다.
“에스테르 공녀께서 온다고?”
“그렇습니다.”
이야기를 전달한 하녀가 응접실을 빠져나가자, 모티반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니, 공녀가 왜……?’
올해 나이가 몇이라고 했더라. 여섯? 일곱?
기사단 훈련에 돌입한 공작은 언제 나올지 기약이 없는데, 이제는 어린아이 비위까지 맞춰야 한다니.
쯧. 모티반스의 미간이 옅게 구겨졌다.
그때, 응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티반스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응접실로 들어오는 작은 아이가 보였다.
크흠, 답답함을 느낀 모티반스가 목에 감고 있던 머플러를 슬쩍 당기며 아델리아를 주시했다.
‘그래. 이제야 기억이 나는군.’
처음 만났을 때도 맑고 화사한 은빛 머리카락에 보석 같은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지.
‘그때는 분명 같은 붉은 색이지만 공작보다는 유약하다 느꼈던 것 같은데…….’
어쩐지, 오늘 마주친 아이의 붉은 시선은 예전의 것보다 한층 더 단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매섭다고 해야 하나.’
마치, 에스테르 공작을 보고 있는 듯했다.
아델리아는 응접실로 들어와 백작을 향해 걸어왔다. 그녀의 뒤로 세라와 하녀들이 쟁반을 들고 따라왔다.
‘그래, 날 정부로 앉히려던 작자가 어떤 얼굴인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봐 주겠어.’
아델리아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백작은 긴장한 듯 소파에서 일어나 아델리아를 향해 몸을 돌린 채 서 있었다.
크흠, 목을 가다듬으며 머플러를 만지작대는 모습에서 초조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러다 불현듯, 모티반스의 얼굴을 알아본 아델리아가 걸음을 멈칫했다.
‘어?’
그러자 리그하르트도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우와아악! 누님! 저, 저놈!]
리그하르트 역시 모티반스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아델리아가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호들갑스러운 리그하르트와는 달리 아델리아는 평소처럼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게 웬 횡재야?’
아델리아의 입가로 숨기지 못한 미소가 고였다.
‘내가 그랬지, 릭? 분명 어디서 본 적 있는 얼굴이라고.’
[그러셨죠!]
그래,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아델리아는 겉으로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 꽤나 흥분된 상태였다.
눈앞의 모티반스 넬로체 백작이라는 사내의 얼굴이 퍽 낯익었던 탓이다.
바로 투기장 2층에서 마주쳤던 그 투기장의 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