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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80)화 (80/161)

80화

‘내 기억들이 죄다 흐리멍덩한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렴풋이라도 떠올릴 줄 안다니까?!’

[그게 기억 못 하는 것과 뭐가 다르죠?]

‘시끄러.’

아델리아가 싱긋 웃으며 모티반스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넬로체 백작님.”

그러자 소파에서 일어나 있던 모티반스의 안색이 환해졌다.

“공녀께서 저를 기억하고 계셨다니, 영광입니다.”

아델리아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기억하다마다요. 처음 공작저에 오셨을 때 제게 인형을 선물로 주셨지요. 동방에서 유행한다는 인형이었어요. 아직도 제 방에 고이 보관 중이랍니다.”

아델리아가 무구한 미소를 짓자, 모티반스의 웃음도 한층 더 밝아졌다.

‘이것 봐라? 공녀가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잖아?’

단 한 번 만난 것뿐인데 공녀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 첫 번째 만남에서 꽤 많은 호감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가신으로 받아 달라는 청을 매번 거절하던 공작과는 달리, 공녀 쪽은 제법 쉬워 보였다.

‘이번이 고작 두 번째 만남이긴 하지만, 이 호의를 허투루 넘길 순 없지.’

아델리아는 초승달처럼 접은 눈을 하고 앞에 앉은 백작을 살폈다.

투기장에서 모티반스의 얼굴을 한눈에 알아보지 못할 만도 했다.

고압적이고 거만하던 투기장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자세를 한껏 낮춘 모습이었다. 그때보다 눈매도 많이 처진 것 같고.

그러다 아델리아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왔다.

모티반스는 적갈색의 머플러를 하고 있었다.

아델리아가 걱정된다는 얼굴로 눈꼬리를 내리며 물었다.

“실내가 추운가요?”

“예?”

아델리아가 모티반스가 목에 두르고 있는 머플러를 쳐다보자, 그가 머플러 위를 손끝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보기 흉한 상처가 있다 보니…….”

“어머, 그랬군요. 제가 괜한 소리를 했네요.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공녀님.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연한 것을요.”

아델리아는 머플러 속에 감춰진 상처를 떠올리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아직도 안 나았나 보네. 얕게 찔렀었는데.’

그를 협박하며 검을 갖다 댔던 부위였다. 힘주어 누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머플러로 가린 것을 보니 생각보다 깊게 베인 것 같았다.

‘하긴 명예로운 상처는 아니니까.’

아델리아가 탐색하는 기색을 숨기고서 천천히 백작을 훑었다.

‘그나저나 저 백작이 투기장 주인일 줄은 몰랐네.’

그저 과거 자신을 정부 취급하며 무례하게 굴었던 귀족 하나를 쫓아낼 생각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이토록 깊은 인연을 가진 자가 왔을 줄이야.

‘백작이 투기장 주인이라는 걸 알게 된 이상 쫓아내는 것만으로는 성에 안 차.’

적어도 카를리나의 티파티에서 검투사를 손봐 준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모습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렇지.’

어떻게 혼쭐을 내 주지? 또 암살자인 척 찾아가야 하나?

아델리아가 고민하던 사이, 응접실의 문이 다시 열렸다. 테오스였다.

“가, 각하!”

아델리아보다 모티반스가 더욱 빠르게 반응했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모티반스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테오스에게 허리를 굽혔다.

테오스는 모티반스를 슬쩍 쳐다본 뒤, 곧장 아델리아에게로 향했다.

“왜 내려와 있는 것이냐.”

“아빠, 오셨어요? 하필 아빠가 한창 바쁘실 때 백작님이 오셨길래, 차를 대접하고 있었어요! 오빠도 황궁으로 들어갔으니 응당 제가 해야 할 일이잖아요?”

그러자 테오스의 날카로운 시선이 모티반스를 향했다.

크, 크흠. 모티반스가 이유 모를 냉기에 헛기침했다.

‘어느 부분에서 심기를 거스른 거지?’

아침부터 찾아온 거? 바쁘다는데 굳이 기다리겠다고 한 거? 아니면…….

‘어린 공녀에게 차 대접을 받고 있는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가…….’

테오스가 아델리아 옆에 앉으며 테이블 위를 느릿하게 훑었다.

“내가 분명 기다리지 말고 돌아가라 했을 텐데.”

테오스의 음성은 여전히 낮고 서늘했다. 모티반스는 악시덤과는 또 다른 섬뜩함을 느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꼬,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각하께 은밀히 전해야 할 말이기도 하고, 부탁도……, 있고 해서…….”

모티반스가 어린 공녀를 흘깃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아델리아가 있는 자리에서는 꺼내기가 조금 곤란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테오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말하시오. 아이 앞에서 하지 못할 말이거든, 나 역시 듣지 않겠소.”

“…….”

테오스의 말에 모티반스의 눈이 잠시 커졌다. 그리곤 퍽 난처한 얼굴을 했다.

잠시 고민하던 모티반스가 실은……, 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광산이 있는데, 급히 골드가 필요하여 그 광산을 팔려고 합니다. 그런데 팔려는 그 광산이 너무 좋은 광산이다 보니 아무에게나 팔 수 없어서요.”

모티반스는 기다렸다는 듯 품에서 지도를 꺼내어 펼쳤다. 아델리아가 흥미롭다는 듯 지도를 쳐다보았다.

‘에계, 이게 뭐야? 뭐 이런 허접한 지도를 가져왔어?’

항상 보아 오던 군용 지도에 비하면 허술한 데다 허점투성이였다.

그나마 광산의 위치 정도는 정확하다 볼 수 있었다.

‘내 기억 속 광산 위치가 전부 표시되어 있지 않아.’

[아직 발견되지 않은 걸까요?]

그러자 아델리아가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겨우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그거지. 아직 아무에게도 귀속되지 않은 광산이 많다는 것!’

와, 저걸 내가 다 미리 선점하면…….

‘달달하겠네.’

주머니가.

[곧 누님의 먹이가 되겠네요.]

‘어허. 먹이라니, 상스럽게. 모두 대의를 위해서야.’

[누님 명의로.]

‘어허!’

그때 모티반스가 서북쪽 산맥에 있는 광산 표시를 손끝으로 짚었다.

“바로 이 광산입니다, 각하.”

테오스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그러나 아델리아가 고개를 쭉 빼내고 눈을 반짝거렸다.

“J.T?”

광산 옆에는 소유주의 이니셜이 적혀 있었다.

“아, 제 아내의 이니셜입니다. 아실지 모르지만, 공식적으로 발표되는 광산 소유주의 이름은 이니셜로도 대체할 수 있습니다.”

아델리아는 카를리나에게 들은 바가 있었던 까닭에 고개를 끄덕였다.

모티반스는 무감한 테오스의 표정을 살피다, 흥미를 보이는 공녀를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역시, 공녀 쪽을 공략해야겠어.’

귀족 영애 아니랄까 봐, 어린 나이에도 보석이라면 욕심이 나는 모양이다.

이 ‘아셰트’ 광산은 모티반스의 재산을 절반가량 집어삼키고 적자만 안겨 준 재수 없는 광산이었다.

‘이 광산에 대공 전하의 투자금도 들어갔지…….’

아직 악시덤에게 보고를 올리진 않았다.

갱 안에 길을 뚫는 일과 채굴하고 그 돌과 흙 속에서 보석을 찾아내는 일 또한, 적잖은 골드가 소모되었다.

‘200미터나 파냈는데도 값어치 나가는 보석은 나오지 않았지. 그 사실을 대공께서 아시면 당장 내 목을 베어 내실 거야.’

거기에다 하필 투기장 일까지 겹치며 차마 보고할 수가 없었다.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붓는 것과 같으니까.

그래서 에스테르 공작에게 광산을 팔고 그 판매금을 악시덤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투기장 때문에 생긴 손해 금액도 어느 정도 갚을 수도 있고 말이지.’

다행히 공녀 반응을 보니 어렵진 않을 것 같았다. 그때, 테오스가 입을 열었다.

“나는 광산 따위…….”

“아빠! 이거 사 주세요!”

그러나 테오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델리아가 말을 끊고 불쑥 소리쳤다.

테오스가 조금은 놀란 듯한 얼굴로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꺄아! 아델리아가 어린아이처럼 말갛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아빠, 아빠! 보석 광산이래요! 저, 이 광산이 가지고 싶어요!”

“…….”

“아빠! 네? 제 생일도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생일 선물로 미리 사 주시면 안 되어요? 네에? 넹? 네엥?”

아델리아가 소파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테오스의 팔을 끌어안고 떼를 썼다.

그런 아델리아를 내려다보던 테오스의 눈동자가 설핏 흔들렸다.

딸아이가 이렇게까지 눈을 반짝이며 부탁을 해 오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 없었다.’

눈치를 살피며 겨우 입을 열거나 시선을 피하면 피했지, 이토록 원하는 바를 강렬하게 요구해 온 적은 없었다.

테오스가 다시 모티반스를 쳐다보았다.

“거래하지.”

“예. ……예?!”

이렇게 간단히? 공녀의 말 몇 마디로?

“와아! 감사합니다, 아빠!”

아빠 최고! 아델리아가 테오스의 팔을 끌어안고서 뺨을 비비적거렸다.

다정한 부녀의 모습에 놀란 모티반스가 입을 뻥긋거리자, 그를 향해 아델리아가 말을 덧붙였다.

“아, 광산 거래는 로즈힐 가문을 통해 하고 싶어요. 저희가 신뢰하는 가문이거든요.”

그러자 모티반스가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 고, 공녀님. 그 광산은 처음 발견 당시 소유주를 확인해 주던 상단과 거래 중이라서…….”

“광산을 판매하는 일에는 상관없다고 들었는데요?”

아델리아가 동그란 눈으로 반문하자, 모티반스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아이가 별걸 다 알고 있군.’

그때 테오스가 아델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없던 일로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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