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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83)화 (83/161)

83화

뒤를 졸래졸래 쫓아오던 아스틴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스틴 경은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거든요.”

“…….”

예전에도 그랬다. 아델리아가 황태자의 호위 기사로 임명받았던 그날.

-전하! 제가 더 열심히 보필하겠습니다! 이런 신입 티도 제대로 벗지 못한 기사한테 호위라니요!

아스틴은 처음부터 아델리아를 못마땅해했다.

-그럼 대련을 해 보든가. 대련에서 승리하는 쪽의 뜻을 들어주지.

카르세스는 단순하지만 확실한 방식으로 서열을 정하도록 했다.

당연하게도 대련은 아델리아의 승리였다.

-난 널 인정하지 않아.

-결과에 승복하기로 하지 않았어?

-……그런데, 너 왜 반말이야?

-먼저 했잖아.

-야, 나는 너보다 나이가 많…….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에서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난, 나보다 약한 사람한테 존대하지 않아.

-…….

마지막 말이 충격이었던 건지, 아스틴은 그 뒤로 아델리아의 어투를 트집 잡지 않았다.

‘그만큼 욱하는 성질은 있었지만, 체념과 납득이 빠른 사람이었지.’

기사와 귀족 영애 신분으로 만나, 지금은 서로 존대하고는 있지만 허물없이 지내던 과거가 그립기도 했다.

물론 황태자가 아델리아를 경계하고 의심 중이니, 그의 수하들 역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전하께서 조금씩 마음을 열고 계시니까 루드와 아스틴도 바뀔 거야.’

아스틴이 아델리아의 뒤를 따라 걸으며 뺨을 긁적였다.

‘너무 티를 냈나.’

아스틴은 저 어린 귀족 아이를 아직 믿을 수 없었다.

제 덩치의 곱절이 넘는 기사를 쓰러트리지 않나, 그러고서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에는 식은땀이 다 났다.

고작 일곱 살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저 아이가 쓰는 검술은 살상력에 치중한 검술이었다.

카르세스를 따라다니며 그 모든 것을 목격하고 나서는 더더욱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에스테르 가문이라 해서 무조건 믿어 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라고.’

아스틴이 자그마한 뒤통수를 쏘아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오해이십니다. 그런 생각한 적 없습니다. 제가 감히, 에스테르 공작가의 사람에게 그런 마음을 품을 리 없지 않습니까.”

그래. 내가 그런 티를 냈다 하더라도 꼬맹이 주제에 뭐 어쩔 거야? 황태자 전하의 호위 기사인 나를 때려눕히기라도 할 거야?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흥. 아스틴이 속으로 콧방귀를 꼈다.

그때.

휙—! 아스틴의 얼굴로 연분홍 레이스 손수건이 날아들었다. 아스틴이 재빨리 그 손수건을 낚아챘다.

“어……? 영애?”

놀란 아스틴이 하늘하늘 화사한 손수건과 아델리아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델리아는 처음과 다름없는 다정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말했다.

“결투를 신청합니다, 아스틴 티에르고 경.”

“……예?!”

무뚝뚝하게 굳어 있던 아스틴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를 올려다보는 아델리아의 눈매가 호선으로 휘었다.

아스틴은 백번 말로 타이르고 설득하는 것보다 단 한 번 몸으로 가르치는 것이 더 잘 먹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과거처럼 직접 알려 주는 수밖에.’

아스틴이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영애,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헤헤, 아델리아가 웃었다.

“맞아요. 결투는 농담이었어요. 그럼, 결투 말고 대련은 어때요?”

“……왜 해야 하는 겁니까?”

“기사들끼리는 대련을 통해 친해지기도 하잖아요?”

“영애께서는 기사가 아니십니다.”

“하지만 우린 말보단 검으로 하는 대화가 더 잘 통할 것 같은데요?”

그러자 아스틴의 미간이 더욱 구겨졌다.

‘지금 내가 일곱 살 어린아이랑 무슨 대화를 하는 거야. 나 참.’

아스틴이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긁적이고 있자, 아델리아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지금 당장 하자는 건 아니에요. 황태자 궁 연무장에서, 전하와 루드 경만 데려와 놓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일은 없을 거예요.”

아스틴 경이 내게 졌다는 사실이.

아델리아는 아스틴을 향해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녀의 말에 아스틴이 눈썹을 끌어 올렸다.

‘뭐야, 내가 진다는 소리야?’

아델리아는 싱글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보통은 명예나 목숨을 걸고 결투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같은 편이니까 굳이 그런 위험한 결투는 할 필요 없을 것 같고.”

같은 편? 언제부터? 아스틴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대련에서 이긴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건 어때요?”

“소원…… 이라고요?”

“네! 소원! 아, 그리고 아스틴 경이 이기면 황태자 전하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다는 조건도 하나 더 걸게요!”

어때요? 하고 아델리아가 천진하게 물었다.

“…….”

아스틴의 미간이 좁혀 들고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착각이 아니었다.

‘이 아이, 정말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하, 아스틴이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아델리아는 마차를 향해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내디디며 말을 이어 갔다.

“대신 내가 이기면, 내 소원도 무조건 하나 들어줘야 해요. 목숨을 걸고서라도.”

아스틴의 눈매가 갸름해졌다.

무슨 놈의 소원에 목숨까지. 뭐,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기는 것은 나니까.’

아스틴이 턱을 악다물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다른 소리 하기 없습니다.”

“물론이죠! 그럼 날짜는 황태자 전하께서 정하시는 걸로 하고, 연락 기다리고 있을게요!”

“……좋습니다.”

어린아이라고 봐주고 넘어가려 했더니, 이참에 저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어린 영애의 콧대를 꺾어 줘도 좋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어느새 마차 앞에 도착했다.

아스틴이 열어 준 마차에 올라탄 아델리아는 창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그럼 곧 다시 만나요, 아스틴 경!”

“…….”

아델리아가 천진하게 웃으며 아스틴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스틴은 묵묵하게 서서 마차가 떠나는 것을 본 뒤에야 몸을 돌렸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뒤늦게 자괴감이 몰려왔다.

하아……. 황태자 궁으로 향하던 걸음을 세우고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일곱 살짜리 여자아이를 상대로 이게 무슨 짓이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황태자 궁으로 걸어가던 아스틴은 다시 걸음을 멈춰 섰다.

‘아니! 열받게 하잖아! 쬐끄만 애가 먼저 도발을 해 오는데 어떻게 참아!’

그러다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그래도 내가 연장자답게 조용히 타일렀어야 했…….’

연장자는 개뿔!

일곱 살짜리 여자아이랑 대련이라니. 이게 소문이라도 나면 내 체면은 뭐가 되냐고!

‘아! 이젠 정말 모르겠다!’

엇갈리는 자아의 충돌로 아스틴의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웠다.

‘에이!’

아스틴은 바닥의 돌멩이 하나를 발끝으로 힘껏 걷어찬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도록 카르세스에게서는 서신이 오지 않았다.

***

아델리아는 카를리나와 함께 모티반스에게서 구매한 광산을 찾아갔다.

광산 입구에 에스테르 공작가의 깃발을 걸어 두고 주인이 바뀌었음을 공표했다.

“이제 시작이에요.”

아델리아가 지도의 광산 표시를 훑으며 찾아갈 순번을 정했다.

카를리나는 아델리아의 손을 잡고 마차로 향하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광부들을 모으지 못했어요.”

“괜찮아요. 이미 생각해 둔 사람이 있거든요.”

“아는 광부가 있어요?”

“아뇨. 광부를 잘 아는 사람을 알아요.”

마차에 올라탄 카를리나가 맞은편의 아델리아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거예요?”

“네!”

“어디로 갈까요?”

그러자 아델리아가 지도를 꺼내어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영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수도에서 서쪽으로 달리다 보면 여기, 데르아 영지가 나오거든요.”

“알아요, 어딘지. 그 영지로 가면 되나요?”

아델리아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그 영지에 ‘빌로체’ 보육원이 있어요. 그 보육원으로 가 주세요!”

아델리아가 목적지를 정하자 카를리나가 마부에게 전했다. 이내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아델리아는 산을 타느라 뻐근해진 허벅지 근육 위를 주먹으로 통통 두드리며 스쳐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강해지면. 다시 만날 수 있어?

투기장 감옥에서 마주쳤던 황금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어쩐지 애처롭던 목소리까지.

‘……지금 갈게, 바라크.’

얼마나 강해졌는지, 한번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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