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카르세스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그대는 그 아이를 알고 있었어.”
창밖을 보고 있던 카르세스가 아델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투기장을 엎었던 이유가, ……그 사내아이 때문이었나?”
“예?”
아델리아가 황당해하며 되묻자, 카르세스의 보랏빛 눈동자가 한층 날카로워졌다.
“그게 아니면? ……단순히 영웅 노릇이 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 테고.”
“네에?!”
아델리아가 화들짝 놀라 소리치듯 말했다.
“설마요! 절대 싫은데요! 영웅이라니! 그 끔찍한…….”
그 끔찍한 길을 또 가라고?! 아델리아가 펄쩍 뛰자 마차가 한차례 흔들렸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뭘 그리 흥분해?”
“아.”
“…….”
“…….”
아델리아는 뒤늦게 자신이 너무 흥분했음을 깨닫고 흠흠 헛기침을 했다.
“……생각하신 것처럼, 전 이미 그 아이를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그대는 아카데미 시험을 보기 전까지 에스테르 공작령을 떠난 적이 없어. 그런데 어떻게 바라크와 아는 사이라는 거지?”
“정확히는 바라크를 아는 게 아니라 바라크의 부족을 알고 있었어요.”
“리티카야 부족?”
“네.”
아델리아는 양심이 조금 찔리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책에서 읽었거든요. 태양 같은 황금색 눈동자와 불길 같은 붉은 머리카락. 그 아름답고 강렬한 부족에 관심이 있었어요.”
“……그런 외모를 좋아했나?”
“……네?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요?”
“키 큰 사람이 취향이라더니.”
“……취향?”
아, 그러자 예전에 카르세스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키 큰 사람이 영애의 취향인가?
-취향이요?
-그럼 먹어야겠네. 영애의 취향에 맞춰 크려면 말이지.
-제가 외모에 홀딱 넘어가는 그런 사람은 아니거든요.
푸하하, 아델리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걸 기억하고 계셨어요?”
“외모에 넘어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했었지. 이제 보니 거짓말이었군.”
“사실이거든요! 전 외모는 크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투기장을 엎을 정도면, 넘어갔다고 볼 수 있지.”
“아, 아니라고요! 제 취향은 검…….”
검은색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 아델리아가 급히 입을 다물고 카르세스를 바라보았다.
‘취향?’
딱히 이상형이라든가, 취향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은 없다.
그래서 더욱 이상했다. 취향을 묻는 말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카르세스를 떠올린 자신이.
아델리아가 말을 급히 멈추자, 카르세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검?”
“거, 검을 잘 쓰는……. 저보다 검을 잘 쓰는 사람이라고요.”
크흠, 흠, 흠. 아델리아가 헛기침하며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그런 사람이 있긴 할까? 그대 실력을 누가 따라간다고.”
“있어요. 그렇게 될 사람이…….”
“모호한 대답이군.”
“어쨌든!”
아델리아가 팔짱을 끼며 뾰족한 시선으로 카르세스를 쏘아보았다.
“전 바라크가 아니라, 리티카야 부족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리티카야 부족이 광산에 대해 잘 아는 부족이라고도 덧붙였다. 또 다른 오해가 생기기 전에 말이다.
“광산에 관심이 있었나.”
카스세스는 아델리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을 이어 갔다.
“보석보다는 광석인가 본데.”
어……? 아델리아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그걸 어떻게…….”
“그대는 보석에 관심이 없을 것 같았어. 차라리 무기나 방어구를 만들 광석이면 몰라도.”
아델리아의 눈이 또다시 커졌다.
‘이젠 무섭네. 사람을 꿰뚫어 보고 있어.’
[과거로 돌아온 건 누님이 아니라 황태자인 거 아니에요?]
리그하르트가 낄낄거렸다.
잠시 고민하던 카르세스가 자신의 턱 끝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래, 광산이었단 말이지…….”
“뭐가요?”
되묻는 아델리아의 말에 카르세스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훈련은 이틀 뒤.”
“날짜가 정해졌군요! 맞다,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저 아스틴 경과 대련하기로 했어요.”
카르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어. 그것도 이틀 뒤에 하도록 하지.”
“네!”
“그리고.”
카르세스는 여전히 창밖을 응시한 채 말했다.
“보내 준 약. 고마웠어, 영애.”
“…….”
아……. 펠슨이 만든 약. 아델리아는 그의 옆선을 그리듯 바라보다 작게 웃었다.
“별말씀을…….”
마차가 조용히 굴러갔다. 밤하늘을 가르는 회색 구름이 환한 달 위를 스치듯 지나쳤다.
***
이틀 뒤, 황태자 궁은 평소보다 조금 소란스러웠다.
“다시 생각해.”
“뭘요?”
황태자 궁의 연무장. 아스틴은 몸을 풀고 있었다. 그런 아스틴에게 루드가 경고했다.
“봤잖아? 에스테르 영애 실력은 우습게 볼 게 못 돼.”
“저도 강합니다. 어디 가서 대련을 져 본 적도 없고요.”
“상대는 일곱 살이야.”
“그런데 그 일곱 살 걱정은 하지 않고 제 걱정만 하시네요?”
크흠. 루드가 헛기침을 했다. 아스틴이 흥, 작게 콧방귀를 꼈다.
“이참에 실력만 믿고 까부는 귀족 영애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겠습니다. 실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 줄 필요가 있어요.”
“…….”
루드는 말리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이미 눈동자가 맛이 갔어.’
아스틴의 눈동자는 이미 승부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런 아스틴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훈련복을 입고 나타난 아델리아는 해맑기 그지없었다.
“오셨습니까, 영애.”
“네, 오랜만이에요! 루드!”
아델리아는 루드의 뒤에서 준비 중이던 아스틴을 보면서도 인사를 건넸다.
“아스틴 경, 좋은 아침!”
“……네, 뭐. 어서 오십시오.”
심드렁한 인사였지만 아델리아는 개의치 않았다.
‘내가 아스틴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스틴은 정 많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이번 삶이라고 해서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아직 나에 대해 잘 모르니까 저렇게 냉랭한 거지.
‘투덜거리면서도 부탁 하나 거절하지 못하던 사람이니까.’
황태자 궁 연무장에 카르세스와 루드, 그리고 황태자의 스승인 클리프 에일러블 백작까지 자리했다.
클리프가 시원시원하게 웃으며 아델리아를 향해 말했다.
“에스테르 영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넙죽 인사를 받으며 해맑게 웃었다.
“기대에 부응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연무장 한가운데, 아델리아와 아스틴이 서로 마주 보고 섰다.
“봐 드리지 않습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싱긋 웃었다.
“그동안 나한테 그런 말을 했던 사람 중, 나를 이긴 사람은 없어요. 아스틴 경.”
“…….”
아스틴이 미간을 설핏 구겼다. 고작 일곱 살이, 어디서 저런 여유가 나오는 거지?
짜악—! 그때, 연무장 한편에 서 있던 카르세스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승부는 단 한 번이다. 먼저 검을 놓치거나 바닥에 등이 닿는다면 패한 것으로 치겠다. 시작하지.”
그러자 아델리아와 아스틴이 목검을 고쳐 잡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옮기는 발걸음에 긴장이 스몄다.
연무장 바닥을 치고 가장 먼저 튀어 나간 사람은 아스틴이었다.
목검의 끝이 곧장 아델리아를 향해 날아왔다.
‘음.’
아델리아가 그의 검을 가볍게 흘려보냈다.
황실 기사단의 검술, 그 자체였다. 그러나 황실 기사단의 검술을 질리도록 상대해 왔던 아델리아에게는 퍽 단조롭고 심심한 공격이었다.
따악— 어렵지 않게 아스틴의 검을 쳐 낸 아델리아가 아스틴의 힘을 역이용하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황실 기사단 검술의 정석이네요.”
그러자 아스틴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델리아가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칭찬 아니에요.”
“……네?”
아델리아는 아스틴과 마찬가지로 황실 기사단의 검술을 사용하여 그를 상대했다. 그러다 한순간에 검술의 형태가 달라졌다.
아델리아의 목검이 아스틴의 급소를 향했다. 그러자 아스틴이 적잖게 당황하는 듯 보였다.
‘이게 무슨…….’
아슬아슬하게 비껴들어 오는 검날이 목검이라 하더라도 무척이나 예리하고 비열했다. 손목과 발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검 끝에선 살기가 뻗쳐 나오고 있었다.
“하체에 힘이 없네요. 이러면 아무리 강한 검술을 익혔다 하더라도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죠.”
“뭐, 뭐라고요?”
하체에 힘이 없어?! 내가?!
“그러니 저 같은 일곱 살에게도 검이 막히는 거 아니겠어요?”
아델리아가 씨익 웃으며 어깨와 팔을 향해 목검을 휘둘렀다.
타악, 딱, 따악— 겨우 아델리아의 공격을 막아 낸 아스틴이 뒤로 물러섰다.
‘이상하다. 처음 보는 검술인데, 빈틈이 없어.’
규칙도 없고 허술하며 위태로워 보이는 검술인데도, 아델리아에게서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다시 아델리아의 검이 날아들었다.
“어깨에는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 있고.”
탁, 목검의 넓은 면이 아스틴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윽!”
“허리는 쓸데없이 굳어 있고.”
툭— 옆구리를 스친 검날은 곧장 뒤로 빠져나가 아스틴의 가슴으로 향해 찌르고 들어갔다.
아스틴이 방어를 위해 목검을 재빨리 들어 올렸다.
그러나, 토옥—!
아델리아의 목검이 빈틈으로 파고들어 그의 심장 위를 가볍게 찔렀다.
어……? 놀란 아스틴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동작이 크니 빈틈도 많죠. 이게 실전이었으면 경은 죽었어요.”
아스틴은 자기 가슴을 한번 내려다본 뒤 미간을 구겼다.
‘뻔히 보이는데 막을 수가 없었어…….’
체구가 작아 민첩하다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실전에서만큼은 우위에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델리아의 앞에서는 그마저도 먹히지 않았다.
스윽. 아델리아가 아스틴의 가슴을 찌르고 있던 검을 거두며 말했다.
“아시겠죠? 자, 다시 해 보죠.”
그러자 아스틴이 눈을 댕그랗게 떴다.
“예? 저, 방금 졌는데요……?”
“전하께서 하신 말씀을 잊었어요? 검을 놓치거나, 바닥에 등이 닿거나.”
“…….”
아델리아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눈매를 접어 웃었다.
가느다랗게 접힌 눈매 사이로 반짝거리는 붉은 눈동자가 언뜻 보였다.
“그 전까지, 대련 끝낼 생각 마세요. 아스틴 경.”
아스틴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 그 눈빛이 사악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악마를 마주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