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87)화 (87/161)

87화

“지독합니다.”

“…….”

몇 시간째 이어지는 대련을 바라보며 클리프가 혀를 끌끌 찼다.

“말려야 하는 게 아닙니까, 전하?”

그의 질문에 카르세스와 루드는 침묵했다.

‘벼르고 있었네.’

‘예, 작정하신 거 같습니다.’

루드는 연민의 눈빛으로 초주검 직전의 아스틴을 바라보았다.

‘에스테르 영애를 대하는 언행이 퉁명스럽긴 했지만, 크게 무례를 범한 적은 없던 것 같은데…….’

루드는 아스틴이 대체 어디서, 어떤 식으로 아델리아의 미움을 샀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미움을 사지 않으면 저렇게 몰아세울 리 없어.’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대련은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아니, 끝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델리아가 끝을 내지 않고 있기도 했고, 아스틴 역시 쉽게 항복을 외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자존심 때문이겠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자신이 패배한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으니까.

그들의 대련을 바라보던 루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때, 카르세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클리프에게 물었다.

“어때? 폐하께서 내 스승으로 붙여 줄 만하지 않나? 가르치는 데도 소질이 있어 보이는데.”

“저도 놀라는 중입니다. 아스틴의 부족한 부분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카르세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련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세스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대련이 단순한 대련이 아니라는 것을.

아델리아는 이 대련을 통해 아스틴에게 부족한 부분을 알려 주고 있었다.

기사의 나쁜 습관과 버릇은 전장 위에서 죽음과 직결되기도 한다.

아스틴에게는 오늘의 이 대련이 기회가 될 것이다.

몸에 배어 버린 나쁜 습관을 고칠 수 있는 기회, 나아가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

두 사람의 대련을 주시하던 클리프가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 검술입니다.”

카르세스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황실 기사단과는 결이 완전히 다른 검술이다.”

숲에서 암살자들을 처리하던 것과는 또 달랐다. 클리프가 아델리아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말했다.

“근본 없이 마구 휘두르는 것 같으면서도 견제와 방어, 공격까지. 그 어디에도 빈틈이 없습니다.”

클리프의 말에 카르세스의 눈매가 갸름해졌다. 철저히 살상용으로 만들어진 검술이라는 걸 카르세스는 알 수 있었다.

“저렇게 몸으로 직접 알려 주는 게 먹히는 사람도 있지. 아스틴처럼.”

카르세스는 팔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에 느슨히 몸을 기대었다.

두 사람의 대련은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자신 있어 하던 체력마저 바닥을 보이자, 짜증이 치솟은 아스틴이 어금니를 짓씹으며 더욱더 거세게 공격했다.

“빌어먹을!”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깨닫고 내뱉은 자조적인 말이었다.

아델리아는 그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며 눈썹을 들썩였다.

“어머나. 숙녀 앞에서 욕이라뇨. 내 앞에서 욕을 했던 기사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려 드려요?”

그러자 괜히 뜨끔해진 아스틴이 변명했다.

“여, 영애께 한 게 아닙니다. 저 자신에게 한…….”

“알아요.”

아델리아가 다 알고 있다는 듯 싱긋 웃으며 아스틴에게서 한 걸음 훌쩍 물러났다.

‘체력은 정말 좋네.’

[그래도 이제 슬슬 지쳐 보이는데요. 누님은 괜찮으세요?]

‘응. 난 멀쩡해.’

오러를 체력 쪽으로 분배했거든!

깔깔, 아델리아가 속으로 웃었다.

[……불공평한 거 아니에요? 상대는 오러도 발현되지 않은 기사라고요.]

그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리그하르트가 타박하자 아델리아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체격 차이를 봐. 대체 누구더러 불공평하다는 거야?’

[그래도 누님은 제국의 영웅이셨고…….]

‘은퇴했는데?’

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하냐며, 아델리아는 아스틴의 공격을 피한 뒤 몸을 틀어 그의 팔꿈치를 찔렀다.

그러자 윽, 작게 신음하던 아스틴이 팔을 더욱 높게 들어 올리며 공격을 이어 갔다.

‘이제 조금 상대할 만하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스틴의 공격은 제법 날카로워졌다. 지친 기색과는 반대로 공격 하나하나가 위협적이었다.

‘스스로 깨닫지는 못했을 거야.’

아델리아를 상대하는 시간 동안, 자신에게 생긴 변화를.

아스틴의 공격을 몇 차례 더 받아 내던 아델리아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만 마무리할까요?”

사실, 하늘이 어두워질 때까지 붙잡고 대련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계획해 두었던 일정이 틀어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대련을 끝내고 신전도 가야 하니까.’

아델리아는 자신의 체력이 바닥나는 것도 경계하고 있었다.

마무리라는 말에 아스틴의 눈이 조금 커다래졌다. 아쉽다는 것인지, 안도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러한 표정이었다.

그런 아스틴의 표정이 재밌다는 듯, 아델리아가 작게 웃더니 곧장 아스틴의 검을 전에 없이 강한 힘으로 비껴쳤다.

따악—! 그러자 아스틴의 손에서 검이 떨어져 나오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아!”

아스틴이 짧게 소리쳤다. 그의 목검이 허공에서 휘휘 돌다 연무장 바닥으로 처박혔다.

승부는 순식간에 갈렸다.

아델리아와 아스틴 사이로 적막이 흘렀다.

짝짝— 카르세스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손뼉을 두 번 쳤다.

“거기까지. 에스테르 영애의 승리다.”

카르세스의 말에 아델리아는 목검을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 끼우고서 아스틴에게 손을 내밀었다.

“즐거웠어요, 아스틴 경.”

무릎 위를 짚고 숨을 돌리고 있던 아스틴이 아델리아가 내민 손을 쳐다보다 고개를 올렸다.

“많이……. 배웠습니다. 에스테르 영애.”

아스틴은 아델리아의 손을 잡았다가 놓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래서 소원이 뭡니까?”

“으음.”

아델리아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아스틴은 긴장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보나 마나 까칠하게 굴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겠지.

‘어쩌면 전하의 호위를 그만두라고 할지도 몰라. 꼴도 보기 싫을 테니.’

보통 귀족 영애들이 그러하다 들었다. 제멋대로에다 막무가내인 성격이라고.

자신에게 친절하지 않은 사람을 불편하게 곁에 두느니, 차라리 눈앞에서 치워 버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지.

‘싫은데……. 진짜 전하 곁에서 사라지라고 그러면 어쩌지.’

아스틴이 초조하게 아델리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깐 생각하던 아델리아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아스틴 경은 수많은 전장에 나서겠죠?”

아델리아의 질문에 아스틴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내 소원은.”

소원은?

아스틴이 아델리아를 응시했다. 아델리아가 한껏 심각해진 눈빛으로 아스틴을 쳐다보며 말했다.

“앞으로 날 이길 수 있을 때까지 흑마법사와 마주치면 무조건 도망치기.”

“…….”

“…….”

“……예?”

아스틴이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아델리아는 태연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게 내 소원이에요.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소원.”

“…….”

“전장에 흑마법사가 나타났다! 라는 소리가 들리면 비겁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좋으니까 일단 물러서요. 특히, 북동쪽 세네르타 영지 쪽이라든가. 세네르타 영지에서도 비타르 마을이라든가.”

아델리아의 말이 이어질수록 아스틴은 더욱 황당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지금 아스틴 경의 실력이라면 흑마법사한테 당할 건 뻔하잖아요?”

“……아니, 소원이 너무 구체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들어주기 싫다는 거예요?”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정말, 이걸로 끝이라고?

‘더는 시비 걸지 말라든가, 눈도 마주치지 말라든가. 아예 황태자 전하 앞에서 사라져 버리라든가……. 그런 게 아니라?’

아스틴이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자, 아델리아가 다시 한번 물었다.

“내 소원이 뭐라고 했죠?”

아델리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아스틴이 얼결에 대답했다.

“흑마법사를 만나면 도망, 가라고…….”

“그게 다가 아니잖아요?”

“영애를 이길 수 있을 때까지, 흑마법사와 마주치면 물러서기……. 특히 세네르타 영지, 거기에서도 비타르 마을.”

미간을 찌푸린 채 듣고 있던 아델리아가 그제야 얼굴 근육을 풀고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잘 기억하시네요. 꼭, 꼭이에요. 알겠죠? 아, 이왕이면 신전에서 흑마법을 방어할 수 있는 목걸이도 하나 장만하셔도 좋고요.”

“…….”

아델리아가 헤헤, 천진하게 웃었다.

‘됐어. 목숨 걸고 지키라고 했으니까 한동안은 안전하겠지.’

[그걸 소원으로 하기엔 아깝지 않으세요?]

리그하르트의 물음에 아델리아가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그것으로 아스틴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싸게 먹힌 거지.’

제국의 북동쪽 세네르타 영지. 그리고 그 영지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전쟁은 흑마법사들이 일으킨 전쟁이었다.

그리고 아스틴은 그곳에서 흑마법에 당해 목숨을 잃는다.

‘나 때문인지 몰라도, 미래는 바뀌고 있어. 그것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그러니까 아스틴의 죽음이 앞당겨질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미리 말해 뒀으니 조금은 조심하겠지. 내친김에 신전에서 목걸이도 사 주자. 보니까 내 말을 안 들을 것 같기도 해.’

[누님……. 이렇게 다정하신 면모가 있으셨군요.]

‘…….’

리그하르트가 어쩐지 감격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욕이야, 칭찬이야? 조금 헷갈리는 아델리아였다.

그날의 훈련은 아스틴과 대련을 마무리하며 끝이 났다.

“훈련 시간을 이렇게 날려 버려서 어쩌죠?”

아델리아가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날렸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도록.”

오히려 아스틴이 깨우침을 얻었으니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손해를 보는 시간은 아니었다.

카르세스가 아델리아를 향해 옅게 웃었다.

“이틀 뒤에 다시 보지.”

“네, 전하. 그리고.”

작별 인사를 건네던 카르세스를 향해 아델리아가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제 부탁이 무례했을지도 모르는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이틀 뒤에 뵙겠습니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래, 조심해서 가.”

카르세스는 인사를 건넨 뒤 루드와 함께 돌아섰다.

카르세스가 황태자 궁 안으로 모습을 감추자, 아델리아도 몸을 돌렸다.

그러자 저 멀리, 새하얀 신전 건물이 시야로 들어왔다.

신전을 바라보던 아델리아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이제는 신전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