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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88)화 (88/161)

88화

아델리아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서 황태자 궁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여기서 오른쪽은 마차. 왼쪽은!’

[신전!]

예에에! 리그하르트가 아델리아보다 더 신이 나서 소리쳤다.

‘좋았어. 내가 오늘 훈련을 얼마나 기다렸다고.’

[드디어 제 반쪽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건가요?! 이게 다 누님의 계획이었단 거죠?!]

‘물론이지!’

아델리아는 자신의 훈련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드레스가 아닌 훈련복을 입고 당당하게 출입할 수 있는 날이잖아!’

은밀한 잠입을 위해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는 불필요했다. 투기장에서도 그랬지만, 역시 잠입에는 이 훈련복만 한 것이 없다.

아델리아는 얼마 전, 황태자 집무실에서의 대화를 엿듣기 위해 숨었던 정원 수풀로 향했다.

‘저쪽 수풀에 검은 망토를 숨겨 놨지.’

[햐! 역시 철두철미하시네요! 옛날부터 그랬죠! 잠입하면 에스테르 경이었죠!]

그럼 그럼. 아델리아가 자랑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풀로 향해 몸을 돌린 그때.

“에스테르 영애.”

히익—! 놀란 리그하르트가 아델리아 대신 소리를 질렀다.

‘하……. 깜짝이야.’

리그하르트의 목소리에 더욱 놀란 아델리아가 빠르게 몸을 돌렸다.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려는 사람처럼, 재빠르고 민첩한 행동이었다.

“아, 아스틴 경?”

아델리아를 불러세운 사람은 아스틴이었다.

‘전하와 작별 인사를 나눌 때 보이지 않길래 토라져서 먼저 들어간 줄 알았는데.’

아델리아가 동그래진 눈으로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아델리아 앞에 서서 평소와 같이 무뚝뚝한 말투로 말했다.

“배웅하겠습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대답 대신 양쪽 눈썹을 높게 들어 올렸다. 마치, 기대하지도 않은 호의를 받은 얼굴이었다.

아델리아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응시하자 아스틴이 멋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 ……오늘 대련으로 제가 배운 게 많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도, 한 번 더 할 겸…….”

아하, 그제야 아델리아가 미소 지었다.

“에이, 배우고 가르치고 할 게 뭐가 있어요. 원래 대련이라는 건 그런 거죠. 격렬한 대련 끝에 불현듯 찾아오는 깨달음! 뭐 그런 거 아니겠어요?”

“…….”

천진하게 웃는 아델리아를 보며 아스틴도 옅게 웃음을 터트렸다.

‘오? 아스틴도 웃을 줄 아네?’

그러자 리그하르트 역시 신기한 구경을 한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게요. 예전에도 웃는 건 못 본 것 같은데.]

툴툴대거나 짜증 내고 화를 냈으면 냈지.

리그하르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아델리아는 아스틴을 저지하듯 그의 앞으로 손바닥을 펼쳐 내밀었다.

“그리고 오늘은 배웅하지 않아도 돼요.”

아스틴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아……. 하긴, 제 실력이 영애보다 떨어지는데 제 호위가 필요하진 않으시겠지요.”

아스틴이 시무룩하게 말하자, 아델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뒤끝 봐라.’

[이해해 줘야죠. 일곱 살한테 호되게 당했으니.]

으흠, 아델리아가 목을 가다듬고서 말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스틴 경. 믿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그리고 시선으로 아스틴의 왼쪽 발목을 쳐다보았다. 대련이 중반으로 접어들며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힌 아스틴은 발목을 살짝 접질렸다.

그 때문에 후반으로 갈수록 다리의 움직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아델리아가 시선으로 발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왼쪽 발목. 아까 대련하면서 삐끗하신 거 같던데.”

그러자 아스틴이 자신의 왼쪽 발을 슬쩍 내려다보다, 슬그머니 오른쪽 발 뒤로 숨겼다.

“크게 다친 건 아니…….”

“크게 다치든, 작게 다치든. 방치하면 심각해지는 건 한순간이에요. 그러니까 당장 가서 치료하세요, 덧나기 전에. 황태자 전하의 호위 기사가 절뚝거리며 다닐 순 없잖아요.”

“…….”

“그리고 전, 신전에 가서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그러니까 배웅은, 그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델리아가 아스틴의 변명을 싹둑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아스틴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 습니다…….”

아스틴은 꾸벅 인사를 건넸다.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이틀 뒤에 뵙겠습니다.”

평소보다 길어진 아스틴의 인사에 아델리아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대답했다.

“네, 그때 봐요! 그리고 발목, 꼭 치료받으시고요!”

“예, 그러겠습니다.”

아스틴이 아델리아를 잠시 응시하다 몸을 돌려 황태자 궁으로 걸어갔다.

‘확실히 대련 전보다 어투가 부드러워졌어.’

대련한 보람이 있는걸?

돌아서 가는 아스틴의 등을 바라보며 아델리아가 흐뭇하게 웃었다.

‘아, 맞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서두르자. 해가 지기 전에 되찾고 돌아가야지.

아델리아가 수풀 속에서 망토를 말아 넣어 놓았던 가방을 찾았다.

‘히히.’

잠시 뿌듯해하는 시간을 가진 아델리아가 은색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질끈 묶었다.

그리고 서둘러 망토를 두르고 후드까지 단단히 뒤집어썼다.

‘어때? 누가 봐도 에스테르 사람은 아니지?’

[네, 누님! 누가 봐도 암살자예요!]

좀, 키가, 많이 작은?

‘그래! 그럼 됐지, 뭐!’

아델리아는 몸을 최대한 숙인 채로 정원 수풀 사이사이로 숨어들며 신전을 향해 전진했다.

황궁의 하늘은 조금씩 노을로 물들기 시작했다.

***

신전 지하의 유물 창고.

유물 창고를 담당하고 있는 베리언 신관은 오늘도 무료하게 흘러가는 하루에 하품을 연거푸 내쉬고 있었다.

“흐아아암—!”

“입이 찢어지겠습니다, 베리언 신관.”

마침, 유물 창고 입구로 내려온 요르히 신관이 웃으며 말했다. 베리언은 촉촉해진 눈가를 손끝으로 훑었다.

“신관의 언행이 어찌 그리 경박하십니까? 입이 찢어지겠다니요.”

베리언이 입술을 삐죽거리자 요르히가 또 웃었다.

“찢어질까 봐 걱정해 줘도 그러십니다.”

능글맞은 요르히의 말에 베리언이 그를 흘겨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여기까지는 어쩐 일입니까?”

그러자 요르히가 눈꼬리를 내리며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흔들어 보였다. 제법 두께가 있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반년에 한 번 하는 점검이요.”

“아아, 벌써 그리되었습니까?”

“시일이 조금 더 남긴 했는데, 며칠 뒤면 건국제 준비로 바빠질 것 같다고, 대신관께서 미리 당겨서 하자 하셨습니다.”

베리언이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크게 켜며 말했다.

“건국제도 벌써 돌아오는군요. 아, 맞다. 듣기로 올해는 사냥제도 한다던데.”

베리언이 유물 창고의 자물쇠에 열쇠를 갖다 끼우며 말했다. 그에 요르히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신관들은 신전 제단이 한동안 풍요로워질 거라고 기대하는 눈치더라고요.”

“그러면 좋겠습니다. 귀족파들 눈치를 보느라 공물로 올라오던 특산품들도 다 끊어지고……. 우리 신전이 어쩌다 이리 힘들어졌는지.”

베리언이 열쇠를 돌리자, 자물쇠가 철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요르히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에스테르 공작가 덕분에 배를 곯지는 않아 다행이지요.”

“그건 그렇습니다. 공작께서 영웅이 되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점점 나아질 겁니다.”

“그래야죠. 암요, 그래야 하고 말고요.”

베리언이 한숨을 내쉬며 자물쇠를 제거한 유물 창고의 철문을 어깨로 힘껏 밀었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힘을 주기를 두어 번. 드디어 묵직한 철문이 열렸다.

“둘러보십시오. 수백 년간 그 자리, 그대로일 겁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에 주먹을 내리치며 말했다.

“아, 성검은 자리가 바뀌었습니다. 일전에 소란이 일어난 뒤로 조금 더 깊은 곳으로 자리를 이동했거든요.”

“네, 이야기 들어 알고 있습니다.”

“성검부터 보여 드리겠습니다. 나머지는 천천히 확인하시고요.”

“네.”

두 사람이 유물 창고의 끝으로 함께 이동했다.

그 모습을 몰래 숨어 바라보고 있던 아델리아가 열린 철문 안으로 빠르게 들어왔다. 그리고는 커다란 석상 뒤에 몸을 숨겼다.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멀어지는 두 신관을 바라보았다.

‘저 두 사람이 나가기 전에 찾아야 해.’

저 두꺼운 철문이 닫히고 바깥에서 자물쇠가 잠기게 되면 아델리아는 갇혀 버리게 될 것이다.

‘반년에 한 번 확인차 들른다는 걸 보면, 여기에 갇히는 순간 굶어 죽게 될 거야.’

아델리아가 리그하르트를 재촉했다.

‘어디에 있어? 빨리 말해.’

으으음. 흐으으음. 으음.

‘릭!’

아델리아가 다시 리그하르트를 불렀다.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옷 속에서 꿈틀거렸다.

[저를 꺼내 보세요, 누님!]

아델리아가 빠르게 리그하르트를 꺼내었다. 그러자 목걸이 줄에 걸려 있던 리그하르트가 공중으로 부웅— 떠올랐다.

푸른빛이 은은하게 감돌던 리그하르트가 말했다.

[제가 가리키는 곳으로요!]

작은 검 모양의 펜던트 끝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알았어!’

아델리아가 소리 죽여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검은 망토에 정체를 숨긴 아델리아가 창고 문 안으로 사라지자, 그녀를 조심스레 따라오던 또 다른 인영이 문 앞에서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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