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아델리아는 너무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급히 몸을 돌려 바라본 곳에는 카르세스가 서 있었다. 카르세스의 손에는 채도 낮은 녹색 가방이 들려 있었다.
아델리아의 눈동자가 그 가방과 카르세스를 빠르게 오고 갔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따라와, 영애.”
“네…….”
아델리아는 카르세스의 뒤를 졸래졸래 쫓았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걸었다.
황태자 궁으로 들어가 집무실까지. 계속되는 침묵에 가슴이 조금 답답해졌다.
집무실에 들어서자,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어?’
루드가 테이블 위로 간식거리를 올려놓고 있었다. 허리를 펴고 자세를 곧게 한 루드가 아델리아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에헤헤…….
“또, 뵙네요…….”
아델리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작별 인사까지 해 놓고 얼마 있지 않아, 그것도 붙잡혀 온 모양새였으니 민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소파로 걸어간 카르세스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앉지.”
“네, 전하.”
아델리아가 애써 웃으며 소파로 얌전히 걸어가 앉았다.
한동안 적막이 이어졌다.
“교사는 구했나?”
먼저 입을 연 것은 카르세스였다. 아델리아가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예? 교사요?”
“일전에 교사를 구하기로 하지 않았나.”
아아, 그 교사.
아델리아가 카르세스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냐며 추궁할 줄 알았는데.’
혹시 눈치채지 못하신 걸까?
‘뭐, 이렇게 주제를 돌려 주시면 나야 감사하지.’
아델리아가 카르세스의 눈치를 살피며 속으로 안도했다.
아델리아의 대답이 늦어지자, 카르세스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배우고 싶은 게 많다며. 그래서 공작에게 교사를 구해 달라 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네! 맞습니다, 전하! 교사를 구하고 있죠!”
그러다 아델리아는 조금 민망해하며 작게 웃었다.
“그런데 쉽지 않나 봐요. 아무래도 제 소문 때문인 것 같아요.”
“소문?”
“네, 소문…….”
일곱 살이 되도록 제대로 된 예법을 배운 적도 없고, 수업은커녕 검을 들고 설친다는 소문.
귀부인들이 어린 귀족 아가씨의 교사로 일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명예였다. 자신이 가르친 아이가 사교계에서 자리 잡고 나아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까지.
그들에게는 작위만큼이나 중요한 자존심 싸움이 되기도 했었다.
“부채보다 검을 더 많이 들고, 드레스보다 훈련복을 입고 다니는 날이 더 많거든요. 그런 여자아이를 사교계에 어울릴 만한 아이로 가르치는 건 사실상 모험에 가깝죠.”
그러다 사교계에서 사고라도 치는 날이면 자신의 명성이 깎일 테니 그 누구도 쉽사리 나서지 못할 것이다.
아델리아가 시무룩해하자, 카르세스가 턱 끝을 살짝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 정도는 아닌데.”
“네?”
아델리아가 제대로 듣지 못했다며 되물었지만, 카르세스는 대답 대신 외투의 안쪽 주머니에서 서신을 꺼내었다.
“그대와 잘 통할 것 같은 사람들로 몇 명 추려 놨어.”
“예? 뭘요?”
“교사.”
그의 말에 놀란 아델리아가 서신을 건네받아 펼쳤다. 그 서신에는 처음 들어 보는 귀부인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카르세스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네리안느 백작 부인은 자수에 능통해. 그리고 라리스 후작 부인은 피아노와 외국어, 셀다 백작 부인은 춤과 음악을 잘 가르치지.”
“…….”
서신을 내려다보던 아델리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멍하니 카르세스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런 기특한 생각을…….
‘전하께서 날 위해!’
아델리아의 붉은 눈동자가 감격에 일렁거렸다. 그러나 감격도 잠시.
다시 시무룩해진 아델리아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 귀부인들이 원치 않을 텐데요.”
자신의 명성이 깎일 짓을 누가 하겠어…….
그러나 카르세스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미리 언질은 해 뒀어. 모두 반기는 분위기더군.”
예? 반겨요?
“저, 정말요?!”
카르세스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했잖아. 그대와 잘 어울릴 만한 사람들을 찾았다고. 직접 만나 보고 정해. 오히려 그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땐 다른 사람 찾아봐도 되고—”
“그럴 리가요!”
아델리아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절대 그럴 리 없을 거예요!”
암요! 누가 구해 준 사람들인데요!
‘전하께서 아무나 붙여 줄 리 없잖아?’
[감시용으로 붙인 사람이면 어쩌려고요?]
‘트집 잡힐 게 없는데 뭐가 걱정이야?’
아델리아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저, 진짜 열심히 배워 볼게요!”
“그래.”
가볍게 대답한 카르세스가 다리를 꼬며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아델리아는 서신을 소중하게 접었다.
‘주머니에 넣어야…….’
그러다 둘둘 말아서 옆자리에 올려 둔 검은색 망토가 시야로 들어왔다.
‘헉.’
맞다. 저거 때문에 끌려왔었지!
검은 망토와 두건이 아무렇게나 말려 있었다. 흡사 공처럼 동그랬다.
그 망토를 잠시 쳐다보던 아델리아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르세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보라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팔짱을 낀 채 아델리아를 주시하고 있던 그의 눈동자가 일순 반질거렸다.
그리고는 투욱—.
카르세스가 녹색 가방을 테이블 한편에 올려놓았다. 짤그랑— 그에 디저트 접시들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래, 내 할 말은 끝이 났고. ……이제 이 가방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면 하는데.”
그의 음성이 난데없이 낮아졌다. 조금 전 교사를 구해 주고 다정하게 대답해 주던 황태자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델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뭐, 뭐야……. 그냥 넘어가 주는 거 아니었어?!’
대화의 주제가 바뀌는 것 같아서 안심하고 있었더니, 카르세스는 이대로 덮어 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아델리아가 테이블 위 녹색 가방과 카르세스의 표정을 번갈아 쳐다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어,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지…….”
그러자 카르세스의 목소리는 더욱 서늘해졌다.
“내가 아는 것에 맞춰 꾸며 낼 생각하지 말고, 영애부터 털어놔.”
“…….”
아델리아가 저를 응시하는 보라색 눈동자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아아, 저 눈빛을 안다.
결단을 위해 상대를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결단은 아마도.
‘죽이느냐, 살리느냐겠지.’
[이야……. 살벌하네요. 마치, 처음 만났을 때로 다시 돌아간 거 같아요.]
‘매번 이런 식이지! 신뢰를 얻을 만하면 일이 터져!’
하아, 아델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어째, 전하 앞에서는 매번 시험대 위에 올라간 쥐가 된 기분이야…….’
이제 겨우 표면상이긴 해도 친우라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섣불리 거짓을 말할 수는 없어.’
가방을 발견했다는 건, 어쩌면 신전으로 숨어들어 간 것까지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거짓말을 하는 순간, 나를 적이라 판단하실지도 몰라.’
카르세스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위태로운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위험인자를 곁에 둘 리 없다.
[어쩌시려고요?]
리그하르트가 물었다. 그러나 아델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잠시 침묵했다.
잠깐 생각하던 아델리아가 말아 놓았던 망토를 천천히 풀고서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휘적거리던 아델리아가 투박하게 생긴 돌덩이 하나를 꺼내어 테이블 위로 올렸다.
“돌?”
카르세스가 묻자, 아델리아가 그를 흘깃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성석…….”
그러자 카르세스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성석이라…….”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물었다.
“성석을 훔치기 위해 신전의 유물 창고로 숨어들어 간 거였나?”
그러자 아델리아의 눈이 잠깐 커다래졌다.
‘역시, 다 보고 있었던 거야.’
아델리아가 눈동자를 잠시 굴리다가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성석이 꼭 필요했습니다, 전하.”
“왜?”
“성석에 깃든 신력이 필요했거든요.”
“그러니까 왜. 그대는 오러 발현자다. 신력이 왜 필요하다는 거지?”
아델리아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하아……. 별수 없네.’
어차피 오러도 드러낸 마당에, 이게 뭔 대수라고.
[누님……. 설마?]
‘아빠한테 혼나더라도 황태자 전하의 손에 죽는 것보단 낫잖아.’
[지금이라면 누님이 이기실 텐데요!]
‘제국의 황태자를 죽이고 이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 나 때문에 가문이 망하는 꼴을 보라고?’
내가 과거에 우리 가문을 살리려고 얼마나 개고생했는지 기억 안 나?!
아델리아가 타박하자 리그하르트가 조용해졌다.
‘난 전하를 믿어. 내가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하셨다면 여기까지 데려오지도 않으셨을 거야. 변명할 기회를 주신다는 건, 아직 날 죽일 생각은 없다는 거지.’
아델리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숨겨 놓았던 목걸이를 빼내어 테이블 위로 올렸다.
카르세스가 목걸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건 또 뭐지?”
그러자 아델리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릭, 원래 모습으로.”
[네, 누님!]
그 순간, 검 모양의 펜던트에서 엄청난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루드가 놀라 검을 뽑아 들고 카르세스를 호위하기 위해 달려왔다. 그러나 카르세스는 오히려 차분히 두 눈을 감고 고개를 조금 돌릴 뿐이었다.
짧은 시간이 흐르고 광채가 사라지자, 카르세스의 고개가 다시 돌아왔다.
테이블 위, 크기를 키운 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은빛 검날과 은빛 손잡이. 온통 은빛으로 빛나는 검신에서 푸른빛의 청명한 검기가 흘러나왔다.
그 검을 알아본 루드가 입을 쩍 벌렸다.
“저, 전하……. 저 검은…….”
얼마 전, 카르세스에게 보고했던 기억이 있다. 신전에서 사라진 성검.
그 보고서에 그려져 있던 성검과 똑같은 검이 집무실 테이블 위에 나타난 것이다.
그 검을 가만히 바라보던 카르세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카르세스는 골치 아픈 일과 엮였다는 듯 구겨진 미간을 문지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대가 성검의 주인. ……제국의 영웅이라는 소리군.”
집무실에는 뜻하지 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