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영웅.
성검의 주인.
형태는 존재하지 않지만, 아델리아에게는 그 무엇보다 무거운 족쇄인 호칭이었다.
아델리아가 시선을 내리며 조용히 말했다.
“그런 거, ……하고 싶지 않았어요.”
“…….”
아델리아의 말이 이어졌다. 그것은 일곱 살 아델리아가 아니라, 스물일곱 살에 죽음을 맞이했던 아델리아의 말이었다.
“전 성검의 주인도, 제국의 영웅도 하기 싫었다고요…….”
강한 힘이 주어지면 그만큼 책임감의 크기도 커진다.
제국민들의 기대와 영웅으로서 능력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은 항상 아델리아의 숨통을 조여 왔다.
‘가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영웅 노릇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델리아는 그 누구보다 그 자리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카르세스가 그런 아델리아를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일곱 살짜리 어린 여자아이의 작은 어깨 위로 보이지 않는 무게가 느껴졌다.
태산과 같은 고뇌가 실린 목소리는 애처롭기까지 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카르세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 마.”
아델리아가 고개를 들어 카르세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하기 싫은 건 하지 말라고.”
검은 흑발 사이로 보라색 눈동자가 아델리아를 조용히 응시했다.
“적어도, 내가 이 자리에 있는 한 그대가 원하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해 줄 테니까.”
“…….”
아델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공표될 것을 각오하고 꺼내 놓은 거였는데…….’
그런데 카르세스의 말은 마치, 아델리아의 비밀을 숨겨 주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혹시, 이 일을 덮어 주시겠다는 말씀이세요?”
“그래. 밝히고 싶지 않은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어째서? 아델리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카르세스를 바라보았다.
카르세스가 그 눈빛에 대답하듯 말했다.
“일곱 살 귀족 영애가 성검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봤자, 제국 안팎으로 소란스럽기만 할 테지. 난 그걸 원하지 않아. 이제 겨우 검술 훈련이 재개되었는데 훈련 동기가 다른 일로 바빠지는 것도 싫고.”
“…….”
아델리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러니까 원하는 대로 해. 내가 먼저 나서서 비밀을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없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아델리아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물론, 자신이 보아 왔던 황태자는 수하의 약점을 잡아 협박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성검의 주인이 나타난 일을, 이 중차대한 일을 태연하게 묻어 주겠다고 말했다.
‘자신의 입지를 단단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날리는 거잖아.’
성검의 주인이 황태자의 손에 들어왔다는 건, 그가 악시덤보다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는 확률이 높아졌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걸 전하께서 모르진 않으실 텐데…….’
그런데 이 기회를 이렇게 덮겠다고?
황당한 마음이 컸으나, 한편으로는 감격스럽기도 했다.
‘나를 위해서구나…….’
이 일이 공표되는 순간, 가장 정신없이 바빠지고 위험해지는 것은 성검의 주인인 아델리아였다.
황태자의 힘이 되지 않도록 여기저기에서 위협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테오스와 데릭도 오러나 성검에 대해 공표하는 것을 한동안 미루자고 했었다.
최대한 숨길 수 있을 때까지.
‘물론, 난 그렇게 오래 숨길 생각은 없어.’
아델리아는 언제고 이렇게 들키는 상황이 올 거라고, 미리 각오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황태자 전하께 털어놓을 줄은 몰랐지만…….’
카르세스가 루드를 불렀다.
넋이 나가 있던 루드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다가왔다.
“차가 식었다. 다시 내어와. 영애 것도.”
“아……. 예, 전하. 빠르게 준비하겠습니다.”
루드가 테이블 위를 재정비하는 동안 딸그락거리는 그릇 소리만이 집무실을 채웠다.
다시 따뜻한 차가 준비되자 카르세스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마셔, 영애. 힘든 하루였을 텐데, 마시고 돌아가.”
카르세스의 말에 아델리아의 시선이 찻잔으로 향했다. 은은한 향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델리아는 찻잔을 양손으로 잡고 그 따끈한 온기를 느꼈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입술이 찻잔에 닿기 직전, 작게 달싹거렸다.
“……고맙습니다, 전하.”
호록. 짧게 찻물을 들이마시자, 향기롭고 따스한 온기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긴장으로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이 녹아내릴 만큼, 포근한 온기였다.
***
성석을 가지고 공작저로 돌아온 아델리아는 피곤한 나머지 그대로 뻗어 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벌써 정오였다. 아침을 건너뛰었으니, 점심 식사는 꼭 해야 한다며 음식을 가지고 온 세라가 아델리아의 잠을 깨웠다.
“얼른요, 아가씨!”
흐아아아암! 입을 큼직하게 벌리며 하품을 쏟아 낸 아델리아가 기지개를 켰다.
“배 안 고픈데.”
“그러니까 아가씨께서 자라질 않는 거라고요!”
“나 정도면 괜찮지 않아?”
“또래보다 더 작으시거든요?”
“그 정도야?”
아델리아는 세라의 잔소리를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식기 전에 식사부터 하세요.”
“응. 고마워, 세라.”
아델리아는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로 걸어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테이블 위 음식들을 훑었다.
양송이 수프에 꿀과 크림을 잔뜩 올린 빵이 준비되어 있었다.
윽. 잠시 미간을 구긴 아델리아가 말했다.
“세라, 이거 너무 달아서 못 먹어.”
그러자 세라가 의아하다는 듯 아델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푸딩은 앉은 자리에서 열 접시도 드시잖아요?”
“에이, 푸딩은 다르지. 그건 디저트라고. 메인 식사와 식사를 끝내고 먹는 디저트가 어떻게 같을 수 있어?”
아델리아가 뻔뻔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고기 줘, 세라.”
“고기요?”
“응, 얼핏 주방장이 그랬어. 신선한 고기가 들어왔다고. 이왕이면 뼈 붙은 쪽으로, 바짝 굽지 말고.”
저번 스테이크는 너무 익혀서 질겼다며, 아델리아가 투덜거렸다.
아델리아의 말에 눈썹을 들썩이던 세라가 쟁반을 다시 챙기며 말했다.
“알았어요, 아가씨. 조금만 기다리세요.”
세라가 음식이 든 쟁반을 들어 올리자, 아델리아가 급히 손을 뻗어 수프 그릇을 잡아 내렸다.
“아, 이 수프는 그냥 두고. 이건 먹을게.”
“네, 아가씨. 뜨거워요, 조심해서 드세요.”
“응!”
세라가 방을 나가자, 아델리아는 수프 그릇을 달랑 들고 소파에서 내려왔다.
책상까지 걸어가 의자를 빼내고 앉았다.
호롭, 호롭. 조금은 빠른 속도로 그릇 속 수프를 비워 내며 검은 망토로 말아 놓았던 성석을 꺼내었다.
‘릭, 이제 어쩌지?’
[……그러게요.]
리그하르트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젯밤이었다.
공작저로 돌아온 아델리아는 곧장 방으로 올라왔다.
다행스럽게도 테오스는 저택에 없었다. 근래 이상하게 많이 바빠 보였다.
덕분에 세라의 잔소리만 조금 듣고 방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러나, 성석에 깃들어 있던 신력을 리그하르트에게로 옮길 수 없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리그하르트 위로 성석을 올려놓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던 까닭이다.
성석의 신력이 리그하르트에 흡수되기만을 기다리다 그대로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아델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성석을 쥐고 이리저리 돌렸다.
‘릭, 이걸 가루 내어 발라 볼까?’
[……네?]
‘아니면 너랑 이 돌멩이랑 녹여서 합칠까?’
대장장이인 노베트에게 맡기면 금방 녹여 줄 거라며 말을 덧붙이자, 리그하르트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왜 이렇게 폭력적이세요!]
‘응? 내가?’
[펴, 평화로운 방법을 함께 생각해 보자고요.]
그런 야만적이고 무서우며 위험한 방법 말고.
어쩐지 리그하르트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도 같았다.
‘겁쟁이.’
아델리아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때, 세라가 돌아왔다.
아델리아는 얼른 성석을 숨기고 다시 소파로 걸어갔다.
“공작 각하께서 돌아오셨어요.”
테이블 위로 요리를 내려놓으며 세라가 말했다.
“아빠가?!”
“네, 아가씨. 데릭 도련님과 함께 오셨는데 식사를 마치시면 집무실로 곧장 오시래요.”
오빠까지? 아델리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아델리아는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해결하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세라는 아델리아가 거의 먹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안쓰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천천히 와도 된다고 하셨는데요…….”
“다 먹었어. 배불러.”
세라가 아델리아의 머리카락을 반으로 묶고 드레스와 같은 색의 하늘색 리본을 달아 주었다.
머리카락 손질까지 끝나자, 아델리아는 의자에서 뛰어내려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다녀올게, 세라!”
“아가씨! 바닥 조심하세요! 앞을 보시라고요!”
세라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아델리아는 빠르게 집무실에 도착했다.
문을 두드리려던 찰나, 안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아델리아의 손이 멈칫했다.
“로샤크 부족이 연합을요?”
데릭의 목소리였다.
로, 샤크……?
아델리아는 너무도 익숙한 단어 하나에 날카로운 숨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