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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92)화 (92/161)

92화

똑똑— 아델리아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뚝 그쳤다가 다시 들려왔다.

“들어와라.”

테오스의 허락을 듣고서 아델리아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집무실의 공기가 평소보다 더 무거운 것 같았다.

원래 자주 드나들던 곳이 아니었던지라, 그저 착각일 수 있지만…….

아델리아는 자신을 향한 테오스와 데릭의 표정에서도 가볍지 않은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와서 앉거라, 아델리아.”

“아델, 오빠 보고 싶지 않았어?”

테오스와 데릭이 차례로 말을 걸어 주며 웃어 보였다. 심각했던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아델리아가 화답하듯 해맑게 웃었다.

“당연히 보고 싶었지.”

그리고 테오스에게도 인사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볼일은 무사히 마치셨어요, 아빠?”

그러자 테오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델리아가 데릭의 옆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우리 아델, 가을 하늘 같네.”

“응?”

“파란색 드레스가 잘 어울린다는 말이었어.”

“고마워, 오빠.”

남매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테오스가 보좌관인 워렌에게 눈짓했다.

그 즉시 디저트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물론, 푸딩도 빠지지 않았다.

워렌이 바쁘게 준비하는 동안 데릭이 아델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델, 곧 생일이잖아.”

“한 달도 넘게 남았는데?”

“한 달 정도는 눈 깜짝하면 지나가지.”

“그런가?”

“갖고 싶은 거 없어? 승마 배우기로 했다며. 말을 사 줄까? 음, 아니면 드레스?”

“드레스는 예전에 오빠가 사 준 거 많아.”

“이제 가을이잖아. 곧 겨울이 올 거고. 미리 사 놓는 거지.”

“그건 그때 가서 살래.”

“음. 그럼 뭐가 좋을까?”

“글쎄.”

데릭이 계속해서 선물 목록을 읊었지만, 아델리아는 관심이 없다는 듯 흘려들었다.

그러다 테오스와 눈이 마주쳤다.

“광산 일은 잘되고 있느냐.”

“네, 아빠! 광산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찾았거든요. 아마 곧 작업이 들어갈 거예요.”

“그래.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네, 아빠.”

아델리아는 대답한 뒤 데릭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오빠는 왜 돌아온 거야? 아직 주말 아니잖아.”

“어……?”

조잘거리던 데릭의 입술이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데릭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테오스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테오스가 대신 대답했다.

“한동안 데릭은 공작저에 머물게 되었다, 아델리아.”

아델리아가 테오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집무실 밖에서 들었던 ‘로샤크’라는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니겠지? 잘못 들은 거겠지? 2년 뒤에나 터지는 전쟁의 이름이 벌써 거론될 리 없잖아……?’

어쩐지 불안한 마음에 입술이 바짝 마르는 듯했다.

아델리아의 질문에 테오스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별일은 아니다. 항상 있는 출정 때문이지.”

출정……! 테오스의 말대로, 에스테르 공작가에서 출정은 대수롭지 않은 일에 속했다.

제국의 영웅으로서 그것은 당연한 의무였고, 테오스는 그 의무에 무척이나 충실했으니까.

아델리아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테오스에게 물었다.

“언제 떠나시는 거예요?”

그러자 데릭이 대신 대답했다.

“바로 떠나는 건 아니야, 아델. 로샤크 연합군 측에서 선전 포고문을 보내왔어.”

“로샤크……?”

순간, 아델리아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데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로샤크 부족이 피에르스 부족을 흡수하고 연합군을 만들었어.”

로샤크 부족과 피에르스 부족은 종종 로시안트 제국의 경계를 넘나들며 약탈을 해 가고는 했다.

작은 부족에 그쳤던 그들은 연합군을 이루면서 왕국이라 불릴 만큼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여기까지는 나도 아는 이야기야.’

[저도 기억나요. 경계를 넘어와 어린아이와 여자들까지 납치해 가고 했었잖아요.]

‘맞아.’

그토록 야비하고 야만적인 부족 연합에서 먼저 선전 포고라…….

물론, 선전 포고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은 대륙법에 따라 선전 포고를 해야만 했다.

그것은 신의와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로샤크 연합군 역시 그러한 절차를 밟았다는 말이었다.

데릭의 말이 이어졌다.

“2년 뒤야. 준비에서 이동까지 대략 2년 정도 생각하고 있어.”

“2년…….”

그렇구나……. 아델리아가 허탈한 마음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해. 과거 로샤크 전쟁은 선전 포고가 생략된 채, 기습으로 시작했었어.’

그 때문에 테오스가 황급히 전장으로 떠났던 것이 기억났다.

그런데 선전 포고라니…….

[아…….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그럼 뭘까요? 왜 이번에는 선전 포고를 한 걸까요?]

‘나도 그게 궁금해.’

그리고 무척이나 수상했다. 문득 한 가지의 가설이 떠올랐다.

‘……다른 무언가가 개입한 거야.’

그게 사람이든, 환경이든. 어떤 형태로든 이 전쟁을 앞당기고 변하게 만든 무언가가.

무릎 위, 아델리아의 작은 주먹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전쟁을 일으키려는 의도적인 움직임이 있을지 몰라.’

그건 아마도 아델리아의 행보가 과거와는 달라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누구지……?’

아직 길드에 의뢰를 넣지도 못했고 로샤크 부족이나 피에르스 부족에 감시자를 심어 놓지도 못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은 있어.’

여유롭다고는 할 수 없지만, 2년 동안 아델리아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생각이다.

과거의 아델리아에게 없던 것들이, 지금은 있다.

‘꽤 많은 것을 손에 쥐고 있는 지금, 과거의 악몽은 되풀이되지 않을 거야.’

그때, 테오스가 아델리아를 불렀다.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잔뜩 흐려진 아델리아의 표정을 바라보며 테오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테오스는 아직 2년이라는 시간이 남았고, 그 시간 동안 철저히 준비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니 걱정 말거라. ……무탈하게 돌아올 테니.”

아델리아가 테오스를 쳐다보며 옅게 웃어 보였다.

“네, 믿어요. 무사히 돌아오실 거라고.”

“그래.”

대화를 마친 아델리아는 집무실을 나와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데릭 역시 집무실을 나왔다.

“아델.”

“응? 왜?”

“생일 선물. 뭐 받고 싶은지 말해 줘야지.”

데릭이 천진하게 미소 지었다. 아델리아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런 그녀의 옆으로 데릭이 함께 걸음을 맞췄다.

“선물?”

“응!”

아델리아는 자신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 따위 잊은 지 오래였다. 아델리아가 복도 끝을 응시하며 데릭을 불렀다.

“오빠.”

“말해, 아델. 듣고 있어.”

“오빠가 처음 전장을 나간 나이가 몇 살이었더라?”

“……응?”

난데없는 아델리아의 질문에 데릭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다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열 살이었던 것 같아.”

“그럼 아빠는?”

“으음.”

데릭이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고민했다.

“아버지께서는 여덟 살에 첫 출정을 하셨다고 들었어. 할아버지께서 엄청 엄하셨잖아. 에스테르 가문의 핏줄은 전장에서 살고 전장에서 죽어야 한다! 그게 할아버지의 입버릇이었거든.”

“그렇구나.”

“그런데 그건 왜?”

“응? 아니야.”

아델리아가 고개를 저으며 환하게 웃었다.

아델리아는 어떤 선물을 원하냐는 데릭의 질문에, 기대하겠다는 말만 남긴 뒤 데릭을 두고 후다닥 방으로 돌아왔다.

‘들었지, 릭?’

[뭐, 뭘요?]

아델리아가 창가로 달려가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꽉 막혔던 머릿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아델리아가 조금 상기된 뺨을 부풀리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2년 뒤에는 나도 아홉 살이잖아, 릭!’

[누님, 설마…….]

어쩐지 리그하르트는 불안해졌다.

‘그래, 그 설마!’

오러도 발현되어 있고 오러를 다루는 훈련도 열심히 하고 있다.

거기에다 초월석과 성검 또한 아델리아의 손에 들어왔다.

‘2년이면 아타뮴 광석으로 만든 병기들을 잔뜩 준비해 놓을 수 있어.’

그 2년 동안 매그너스 기사단의 훈련을 더욱 강화하고 아타뮴 광석으로 만든 병기들로 무장한다면 과거처럼 허무하게 당하는 일은 없을 터.

‘릭, 내 첫 출정지가 방금 정해진 것 같아.’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소리쳤다.

[예에?! 아니, 누님! 영웅 노릇은 이제 싫다면서요! 은퇴하셨다면서요!]

‘그러니까. 제대로 은퇴 생활을 누려 보려고 이러는 거잖아.’

그 로샤크 전쟁에서 테오스가 패배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끔찍한 과거는 반복될 것이다.

‘그걸 막으려는 거야.’

공작저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느니, 차라리 전장에 나가 아빠 곁에 있겠다고.

[그러다 누님까지 잘못되면요!]

‘네가 있잖아, 릭.’

[…….]

어차피 성검이 있는 한, 크게 다치는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잃는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계획보다 너무 일찍 드러내는 거잖아요. 그렇게 성검의 주인이라고, 영웅이라고 불리는 걸 싫어하시면서…….]

리그하르트가 말끝을 흐렸다.

아델리아가 목걸이를 꺼내어 손바닥 위에 올렸다.

진동도, 빛도 내지 않고 조용해진 리그하르트를 내려다보며 아델리아가 말했다.

‘릭. ……내가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건, 너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싫어서가 아니야.’

[…….]

‘가족을 잃었고, 내 삶을 잃었던 게 끔찍했을 뿐이야.’

그러다 또 한 번의 기회가 기적처럼 주어졌다.

아델리아는 이 기회를 최대한 살려 그 과거 위로 새로운 미래를 덧씌울 생각이다.

‘그리고, ……난 너와 전장을 함께 뛰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해.’

그건 분명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이었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했고 승리의 전율에 잠 못 들게 했던 그 순간들.

‘그러니까.’

아델리아가 작게 웃으며 리그하르트의 검신을 쿡쿡 찔렀다.

‘이번에도 잘 부탁해, 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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