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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93)화 (93/161)

93화

일상은 평소와 같이 흘러갔다.

로샤크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이미 각오하던 일이었으니, 일상이 달라질 이유도 없었다.

단지, 아델리아의 하루가 조금 더 바빠졌을 뿐이었다.

성석의 힘을 성검으로 옮기는 방법을 찾느라 황궁의 대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신전의 고서들을 빌려다 읽기도 했다.

그럼에도 아직은 이렇다 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애초에 성검이나 성석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까닭이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못 찾으면, 대신관님께 물어서라도 힘을 되찾게 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릭!’

[누니이임…….]

리그하르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도 힘들면 마탑이라도 쳐들어가야지, 뭐.’

마탑의 도서관에도 희귀한 고서들이 많다고 들었다. 대륙을 전부 헤집어 놓더라도 꼭 방법을 찾고 말리라. 아델리아의 각오가 비장했다.

그 와중에도 산을 올라 광산 찾는 일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벌써 세 번째 광산이에요.”

카를리나는 연속으로 아타뮴 광산을 발견해 낸 아델리아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정말, 그 지도가 사실이었어.’

아델리아가 가져온 지도 위에는 동글동글 반듯한 글씨체로 광산의 위치와 좌표가 그려져 있었다.

누가 봐도 아델리아의 글씨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델리아가 보낸 편지 속 글씨체와 똑같았지.’

대체 어디서, 어떻게 그런 정보를 얻어 온 것인지 물어보지는 못했다.

아델리아가 어리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고객이자 동업자로 함께 일하게 되었으니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라는 이니셜이 적힌 석판이 광산 입구에 세워졌다.

아델리아가 팔짱을 낀 채 흐뭇한 표정으로 석판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흑요석을 다듬은 네모반듯한 석판에 곡선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금색 테두리, 거기에 광채가 남다른 은빛 보석으로 이니셜을 꾸며 놓았다.

누가 봐도 사치스러운 석판이었다.

[되게 화려한 석판이네요. 그런데 너무 정직한 이니셜 아니에요?]

‘그럼? 이니셜이 다 이름 앞머리를 따오는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누가 알아보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걱정하지 마. 생각보다 흔한 이니셜이니까.’

세상에 A와 E가 들어가는 이름이 얼마나 많은데.

‘괜찮아, 괜찮아. 아무도 몰라.’

그나저나.

아델리아가 반질반질 광이 나는 석판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석판이 세워질 때마다 진짜 내 거 같네…….”

그러자 카를리나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아델리아의 광산이 맞죠. 최초 발견자니까요.”

“그렇긴 하죠.”

헤헤, 아델리아가 단단하게 박힌 석판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과거의 기억이 없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광산이지만…….’

아델리아는 기억을 간직하게 한 채 돌려보내 준 신께 잠시나마 감사 인사를 했다.

“아, 넬로체 백작에게서 사들였던 아셰트 광산도 오늘 석판이 교체된다고 했죠?”

아델리아가 묻자, 카를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셰트 광산 앞에는 아델리아의 풀네임이 적힌 석판이 세워졌어요. 제가 마지막까지 확인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고마워요, 카를리나!”

역시, 듬직해!

모티반스에게서 사들인 광산에는 소박하고 깔끔한 석판이 세워졌다. 다른 광산의 이니셜 석판과는 전혀 다른.

‘애초에 그 광산에는 A.E라는 이니셜을 사용할 생각이 없었어.’

모티반스가 의 정체를 알아차릴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분리해 놨으니, 같은 사람일 거라고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거야.’

아델리아가 프흐흐,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며 카를리나에게 물었다.

“본격적인 작업은 언제부터예요?”

“건국제가 끝나고 두 달 뒤예요. 하지만 아타뮴 광산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조만간에 밝혀질 거예요. 채굴 밑 작업을 위해 광부들이 오고 갈 테니까요.”

그러자 아델리아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는 건, 조만간…….”

아델리아가 씨익, 한쪽 입꼬리를 높이 끌어 올리며 웃었다.

“제국이 발칵 뒤집히겠네요?”

아델리아의 말에 카를리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예요. 그동안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던 아타뮴 광산이니까요. 게다가, 그 광산을 여러 개 소유한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더 충격을 받겠죠.”

카를리나는 고위 귀족과 상단들이 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델리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상관없어요. 넬로체 백작에게서 사들인 광산부터 작업을 시작해 주세요.”

“아셰트 광산이요?”

“네.”

아델리아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즐거운 듯 웃었다.

“보고 싶거든요. 자신이 헐값에 팔아 버린 그 광산에서 아타뮴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표정을.”

아아, 얼마나 짜릿할까.

아델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카를리나가 짧은 숨을 들이켰다.

‘적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지.’

카를리나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델리아는 석판을 툭툭 두드려 보다가 마차가 있는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가요, 카를리나. 이러다 해가 지겠어요.”

“그래요, 아델리아.”

두 사람은 미리 닦아 놓은 길을 걸어 산에서 내려왔다.

으챠, 마차에 올라탄 아델리아가 맞은편에 앉은 카를리나를 보며 물었다.

“맞다. 바라크는 잘 지내요?”

문득 바라크가 떠올랐다. 성격상 남 밑에 있을 사람은 아니었던지라, 카를리나에게 맡겨 놓고도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카를리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잘 지내고 있어요. 그 아이의 생각은 알 수 없지만.”

마차가 출발했다. 잠시 끊겼던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카를리나는 바라크를 떠올리며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배움이 빠른 아이예요. 놀랐어요. 저희 오라버니보다 더 똑똑한 사람은 처음 보거든요.”

일찍 세상을 떠나 버린 오빠를 떠올리며 카를리나가 쓸쓸하게 미소 지었다.

아델리아는 그늘진 카를리나의 표정을 보며 함께 눈꼬리를 내렸다.

‘미카일 로즈힐이라고 아카데미에서부터 교수들의 사랑을 듬뿍 받던 사람이었어.’

예의 바르고 인성도 곧았으며 머리까지 똑똑했었다.

‘그 사람보다 더 똑똑하다니…….’

아델리아의 입가로 짙은 미소가 고였다.

‘바라크, 이 녀석. 생각보다 더 대단한 놈이었잖아?’

[예전에도 똑똑하긴 했어요. 그러니까 그 나이에 길드도 삼키고 용병단도 삼켜서 굴렸겠죠.]

과거부터 바라크를 함께 지켜봐 왔던 리그하르트도 말을 거들었다.

하긴, 그건 그래. 아델리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크는 복수의 일환으로 그리젤 길드장을 죽이고 그리젤 길드와 그리젤 용병단을 흡수했다.

그 과정이 다소 잔혹하긴 했지만, 바라크 부족이 도륙당한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복수였다고 볼 수 있었다.

“아, 그리고 저와 마주칠 때마다 물어요.”

카를리나의 말에 아델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응? 무엇을요?”

“아델리아를 언제 볼 수 있냐고요.”

“…….”

하긴, 잘 배우고 있는지 확인도 할 겸 한번 찾아가긴 해야 하는데…….

바라크가 보육원에서 후작가로 들어가던 날.

그날 바라크는 마차에 타기 전 아델리아에게 물었다.

-정확히 내가, 후작가로 가서 뭘 하면 되는 거지?

그리고 아델리아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많은 것을 배워. 후작가에서 배우는 모든 것이 널 강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왜 넌 나더러 계속 강해지라는 거야?

바라크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아델리아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너, 복수할 거잖아.

-…….

-그러려면 힘이 필요해. 힘을 얻고 강해지는 방법은 후작가에서 배울 수 있을 거야.

바라크의 눈이 잠시 커졌다.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놀란 기색이 사라진 황금색 눈동자가 담담히 아델리아의 얼굴을 담았다.

-내가 강해져서, 그래서 복수에 성공하면. ……너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야?

-전에도 말했지. 넌 네 갈 길을 가라고. 누군가의 필요에 움직이지 말라고. 넌 똑똑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그 길을 찾게 될 거야. 꼭.

아델리아가 코끝을 쓱 문지르며 해맑게 웃었다.

“수업이 여유 있는가 봐요. 딴생각 못 하게 더욱 굴려 주세요.”

그러자 카를리나가 놀란 눈을 떴다.

“지금도 쉴 틈 없이 수업을 듣고 있는데요? 게다가 아델리아가 부탁한 대로 검술 훈련도 함께 하고 있다고요.”

“부족한가 보죠. 원래 그래요. 딴생각, 딴짓하는 놈들은 훈련량을 두 배로 늘리면 그런 생각조차 못 하거든요.”

“…….”

그러니까 지금의 딱 두 배만 늘려 보라고. 아델리아가 천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아, 역시.

적이 아니라 정말 다행이라고. 카를리나는 다시 한번 안도했다.

***

며칠 후, 아델리아는 훈련을 위해 황태자 궁으로 입궁했다.

날씨는 화창했고 선선한 바람에 땀방울도 금방 휘발되는 쾌적한 날씨였다.

근래는 하루걸러 하루를 입궁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황태자 궁의 몇 안 되는 하녀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안녕, 레일린!”

그리고 로시, 제니스, 벨라…….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하녀들의 얼굴과 이름도 조금씩 외우기 시작했다.

“오셨어요, 에스테르 공녀님.”

“좋은 아침!”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셔요.”

“곧 축제잖아요!”

꺄하! 아델리아가 들뜬 얼굴로 황태자 궁 복도를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제국의 가장 큰 축제인 건국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축제 때마다 전장에 있거나 황제를 피해 숨어 있느라, 제대로 축제를 즐긴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이번 축제는 아델리아에게 또 다른 설렘을 가져다주었다.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는 관심 없고.’

수도 광장에서 굉장한 이벤트들이 열린다고 들었다.

‘그게 뭘까, 릭?!’

[저도 데려가실 거죠?!]

‘당연하지!’

에헤헤헤, 조금은 헤프게 웃으며 복도를 걸어가던 그때였다.

복도 끝, 낯익은 하녀 몇 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 건국제 연회에서 황태자비가 되실 분들도 참석하신다며?”

신나게 발걸음을 옮기던 아델리아가 문득 멈춰 섰다.

‘황, 태자……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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