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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94)화 (94/161)

94화

황태자 궁의 연무장은 아침부터 훈련이 시작되었다.

클리프는 방패술에 대해 아델리아와 카르세스에게 알려 주었다.

“아카데미 시험에 나왔던 방패술입니다. 실상, 갑옷을 만드는 재료와 기술이 상향됨에 따라 거의 소멸하였지만 배워 둬서 손해 보시지는 않을 겁니다.”

방패를 이용한 다양한 방어 태세와 무기 대신 방패를 활용하는 방법까지. 클리프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전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자율 대련 시간이 돌아왔다.

평소처럼 아델리아와 카르세스는 목검을 들고 연무장 가운데서 맞붙었다.

딱, 탁, 따닥.

초반에는 항상 그러하듯 가볍게 검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중반이 넘어가며 아델리아의 집중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클리프가 두 사람의 대련을 주시했다.

‘오늘따라 공녀의 상태가…….’

그때였다.

따악—!

목검 하나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아…….”

짧게 탄식한 아델리아가 자신의 목검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중앙에 뜬 태양 때문에 시야가 번쩍였다. 앞이 새하얘졌다.

“조심.”

순간, 카르세스가 아델리아를 잡아당겼다.

퍼억. 하늘로 솟구쳤던 목검이 아델리아가 서 있던 연무장 바닥에 내리꽂혔다.

쯧. 카르세스가 혀를 차며 말했다.

“정신을 어디에다 두고 있는 거지? 다칠 뻔하지 않았나.”

카르세스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묵직했다.

“아, 죄송합니다…….”

아델리아가 가볍게 고개 숙여 사과하고 흙바닥의 목검을 주워 들었다.

“이런 식으로 할 거면 돌아가.”

카르세스는 미간을 잔뜩 구긴 채로 몸을 돌렸다.

“…….”

아델리아는 목검을 만지작거리며 카르세스의 뒤를 쫓아갔다.

“죄송합니다, 전하. 오늘 몸 상태가 좋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러자 카르세스가 걸음을 멈추고 아델리아를 돌아보았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아델리아는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발끝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닌데, 어쩐지 훈련에 집중할 수가 없어서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오늘은 이만 훈련을 파하고 돌아갔으면 해요. ……죄송합니다.”

“…….”

그에 카르세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그렇게 해. 공작저에 의사가 둘이나 있는데 건강 관리를 대체 어찌하는 건지. 돌아가자마자 진료받도록 하고.”

아델리아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 전하. 고맙습니다.”

아델리아가 힘없이 돌아서서 터덜터덜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고개를 돌려 아델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많이 안 좋긴 한 모양인데.’

평소라면 호쾌하게 웃으며 다시 한번 더 대련을 청했을 텐데, 오늘은 곧바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창백한 낯빛이며 축 처진 표정까지.

“루드, 영애를 배웅하도록.”

“예, 전하.”

루드가 아델리아를 따라갔다. 카르세스의 시선이 한동안 아델리아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

-황태자비라니?

-폐하께서 황태자비 후보들을 모으실 거라고 했대.

-그 후보들을 처음 선보이는 자리가 건국제 연회인 거고?

-그렇지.

아델리아는 덜컹대는 마차에 앉아 황태자 궁에서 들었던 하녀들의 대화를 떠올렸다.

‘알고 있었어. 언젠가 전하께서 황태자비를 맞이하실 거라는 건.’

그러나 과거의 카르세스는 아델리아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황태자비를 들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 어색해.’

카르세스의 곁에 설 황태자비를 상상한다는 게.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빨리 황태자비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몇 년간은 지금처럼 친우나 동기같이 자유롭게 지낼 수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

‘황태자비께서 들어오시면 이렇게 훈련하는 것도 무리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어쩐지 조금은 쓸쓸해지는 것 같았다.

[황제가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과거에는 빨리 죽어 버렸잖아요.]

‘아, 그렇구나.’

아델리아는 지금의 상황이 자기 행동 때문에 바뀐 미래 중 하나라는 걸 깨달았다.

‘그럼 이번에는 정말 황태자비를 맞이하시겠구나…….’

[서운하신가 봐요?]

‘서운하지. 겨우 친해지나 했더니…….’

[그래도, 누님의 목적은 더 빨리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목적? 아델리아가 의아해하자 리그하르트가 말을 이어 갔다.

[황태자를 황제로 만들겠다면서요?]

‘그렇지!’

[황태자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가문과 결혼한다면, 그 목표까지 순식간에 도달할 수 있잖아요.]

오오! 아델리아가 속으로 감탄했다.

‘너, 정말 성검이긴 하구나!’

[…….]

영 몹쓸 지능은 아니라며 아델리아는 리그하르트를 칭찬했다.

‘그렇네. 황태자 전하의 세력에 힘이 되어 줄 가문!’

아델리아는 정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힘을 가진 가문의 영애와 카르세스가 결혼하게 된다면 악시덤에게 황제 자리를 빼앗기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이번 연회에서 황태자비를 선택하고 빨리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아델리아는 가슴께의 이유 모를 통증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

“변한 게 없네, 이 제국은.”

건국제 준비로 로시안트 제국 전역이 떠들썩했다.

제국민 모두가 한뜻으로 건국제를 준비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그 어수선하지만 기분 좋은 기운이 거리를 가득 채웠다.

‘수도는 디크레드 영지를 다녀왔던 그날 이후로 처음인가.’

수도 광장에 도착한 사내는 광장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했다.

‘아, 그리운 향기.’

그가 입고 있던 보라색 망토가 펄럭거렸다. 은색 실로 수 놓인 화려한 문양이 햇살에 반짝였다. 그러다, 깊이 쓰고 있던 후드가 머리 뒤로 넘어갔다.

푸른빛이 감도는 회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사내는 짧게 혀를 찬 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대충 쓸어 넘겼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 형아. 혹시 마탑의 마법사님이세요?”

“응?”

몸을 돌리자, 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서 있었다. 그의 연갈색 눈동자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날 알아?”

“아니요. 벽화에서 봤어요. 마법사님들이 그려진 벽화요.”

벽화에 그려진 마법사가 입고 있던 망토와 사내가 입고 있는 망토가 똑같다며, 아이는 신기하다는 눈빛을 했다.

“아아. 날 아는 건 아니구나? ……그런데, 나한테 무슨 용건인데?”

“이거 받으세요.”

아이는 종이로 접은 노란 꽃을 내밀었다. 사내가 꽃을 받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꽃?”

“로시안트 제국의 국화예요. 환영한다는 뜻이에요.”

사내아이가 미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사내가 고개를 기울이며 능글맞게 웃었다.

“난 여자가 주는 거 아니면 안 받는데?”

“……네?”

사내가 짓궂게 웃었다.

“아냐, 농담이야. 고맙다고.”

그제야 아이가 웃음을 되찾았다.

“축제는 모두가 즐거워야 하는 거니까요!”

그건 그렇지.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다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런데 나, 노란색 안 좋아해.”

“……네?”

“은색 꽃은 없어? 난 은색이 좋아.”

사내아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세상에 은색 꽃이 어디에 있어요? 흰색 꽃이면 몰라도.”

“아니야. 있어. 있을 거야.”

“이상한 형아네. 은색 꽃 찾으시면 꼭 보여 주세요. 저도 궁금하네요.”

아이가 해맑게 대답한 뒤 유유히 돌아서 떠나갔다. 사내는 아이에게 받은 꽃을 빙그르르 돌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순진하네.”

모르는 사람은 따라가지도 말고, 말도 걸지 말라는 걸 못 배웠나 봐.

그러면서도 아이에게 받은 꽃을 버리지 않고 가슴팍에 꽂았다.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사내를 불렀다.

“혼자 가시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또 길을 잃으시면 어쩌려고요!”

아아, 빨리도 쫓아왔네.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자네 걸음이 느린 걸 어쩌겠나. 그렇게 느린 걸음으로는 축제가 끝난 뒤에야 도착하겠어. 밀튼.”

그러니 혼자 가는 수밖에. 그러자 밀튼이라 불린 사내가 투덜거렸다.

“그거야 계속 길을 잃으시니까 시간이 촉박해진 게 아닙니까! 줄로 묶어서 끌고 다닐 수도 없고!”

“뭐라고? 안 들리는걸?”

사내가 양쪽 귀를 막으며 걷는 속도를 올렸다.

“아니, 또 혼자 가시네? 같이 가자니까요!”

“안 들려.”

밀튼이 급히 속도를 올리며 앞서가는 사내를 불렀다.

“아! 휴시안 님!”

무슨 마탑주가 저리도 막무가내인지!

밀튼은 자신이 마탑주의 보모라도 된 것만 같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휴시안을 겨우 따라잡은 밀튼이 그의 팔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아니, 후드는 왜 또 넘기셨어요? 평소에는 가리고 다니시더니?”

“내가 한 거 아니야. 바람이 했어.”

또, 또 이상한 소리를. 어휴!

밀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휴시안을 끌어당겼다.

“오늘은 곧장 숙소로 가셔야 해요. 내일부터 일정이 빡빡하게 잡혀 있…….”

그러자 휴시안이 밀튼의 손을 떨쳐 내며 한 걸음 훌쩍 물러났다.

“그건 곤란해. 지금 난 친구를 만나러 가야 하거든.”

“친구요? 로시안트 제국에 친구가 있다는 말은 안 하셨잖아요?”

휴시안이 눈을 접어 웃었다.

“비밀이라 그래. 내가 그 친구의 친구라는 게. 그 친구가 내 친구라는 게.”

뭐라는 거야, 대체.

밀튼이 미간을 잔뜩 구긴 채 휴시안을 쳐다보았다.

“어디 사는 누군데요?”

그러자 휴시안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어머니께서 살아 돌아온 기분이야, 밀튼.”

그러니까 잔소리 좀 그만해. 휴시안이 어둑한 골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어쨌든, 밀튼. 숙소에서 얌전히 기다려. 금방 다녀올 테니.”

밀튼은 휴시안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가며 급히 물었다.

“설마, 저 혼자 숙소로 가라고요?”

“응. 친구 만나고 올게.”

“자, 잠깐만요! 휴시안 님! 그러니까 그 친구가 대체 어디 사는 누구……!”

밀튼이 급히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이 닿기도 전에 휴시안은 골목 벽에 만든 마법진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아, 아아……!”

아, 정말! 이 미치광이 마탑주가!!!

휴시안을 놓친 밀튼의 외침이 허공을 외로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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