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턱없이 부족해…….”
모티반스가 한쪽 다리를 떨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에서 배어 나온 습관이었다.
에스테르 공작가에 광산을 10만 골드를 받고 팔았다.
‘이걸로 대공께 받은 투자금을 돌려드리고 투기장의 손해를 메꾸려 했는데…….’
모티반스는 바닥이 훤히 드러난 나무 상자 안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엊그제만 해도 10만 골드로 가득했던 상자였다.
‘미쳤군. 투자금을 돌려주고 투기꾼들에게 배상도 해야 할 돈으로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거금이 손에 들어오자, 잠시 이성을 잃었다.
10만 골드가 너무도 쉽게 굴러 들어왔다. 어쩐지, 조금만 노력하면 이것의 두 배, 아니. 열 배 이상으로 불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모르겠다. 그때는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 머리와 가슴을 가득 채웠다.
‘잠시 미쳤던 거야……. 도박이라니…….’
투기장을 운영하던 자신이 다른 투기장에서 10만 골드를 모조리 날릴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다시 골드를 구해야 하는데…….’
그런데……. 대체 어떻게?
모티반스가 나무 상자 옆 서류들로 시선을 옮겼다. 주름진 손이 그 서류 위를 대충 훑었다.
최후의 보루로 남겨 두었던 광산들도 거의 다 날린 상태였다.
‘도박으로 모두 날리고 겨우 하나 남았다…….’
그마저도 쓸모없다며 투기장에서 받아 주지 않았던 광산이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런 광산 따위…….’
그때, 불현듯 에스테르 공작이 떠올랐다.
‘아니지. 아셰트 광산은 뭐, 쓸모가 있어서 팔렸나?’
오히려 그 광산은 폐광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에스테르 공작이 사치에 눈이 먼 딸을 위해 10만 골드를 내어주지 않았던가.
‘그래, 그 공녀를 다시 한번 구슬려 이 광산도 팔아 보는 거야.’
모티반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벽하늘이 어슴푸레 밝아 오기 시작했다.
‘지금 출발하면 해가 뜰 때쯤 도착할 수 있겠군.’
모티반스는 마지막 남은 광산 서류를 손에 꼭 쥐었다.
‘이건 적어도 50만 골드에 팔아야 해.’
그래야 투자금을 돌려주고 투기장 손해도 메꾼다.
‘그리고 조금 남으면 다시 도박으로 불리면 돼.’
후우. 모티반스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넬로체 백작!”
쾅— 집무실의 문이 허락도 없이 열렸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악시덤 대공이었다.
“대, 대공 전하?!”
크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들어온 악시덤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가 모티반스의 어깨에 손을 턱 하고 올리자, 모티반스의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거렸다.
“내 무례를 용서하시오! 소식을 듣고서 달려오지 않을 수 없었지!”
소식이라니……? 모티반스가 저릿한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게 무슨…….”
“어허. 시치미 떼지 않아도 되오. 그 광산의 소유주가 백작이라는 걸 귀족파 귀족들은 다 알고 있지 않소! 난 백작이 해낼 줄 알았다오!”
“예?”
모티반스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그러나 악시덤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앉으시오, 백작.”
“아, 예, 예…….”
모티반스가 얼떨떨한 얼굴로 악시덤의 맞은편에 앉았다.
“차라도 내어 오라 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소. 나도 진위를 알아보고 곧장 다시 나가 봐야 하니까. 이 일을 기회로 다시 한번 귀족파가 황제파의 우위에 설 수 있게 되었으니, 이 기쁜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모티반스는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악시덤 대공이 전에 없이 들떠 있는 것도 소름이 끼쳤지만, 그의 기대감이 오롯이 자신에게로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뭐지……?’
모티반스는 자신의 무엇이 대공을 저리 만들었는지 가늠할 수 없어 더더욱 두려웠다.
악시덤은 팔짱을 낀 채로 모티반스를 쳐다보며 웃었다.
“점심시간이 지나면서부터 귀족파 귀족들이 대공저를 찾아왔소. 어찌 된 영문인지 묻는 통에 나도 정신이 없었지.”
악시덤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이야기 좀 들어 봅시다. 아타뮴이라니.”
뭐? 아타뮴? 모티반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악시덤은 눈매를 갸름하게 뜨고 물었다.
“그게 그 광산에 묻혀 있다는 걸 어찌 아셨소? 아니지, 그걸 알았다면 귀띔이라도 했어야지. 어찌 혼자만 알고 있었소?”
“아, 아타뮴이요?”
“끝까지 시치미 뗄 생각이오? 제국 내 내로라하는 광부들은 모두 그 광산으로 향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는데?”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쳐들어온 대공도 당황스러운데 광산? 아타뮴?
당혹스러워하는 모티반스의 표정에 악시덤 역시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미소를 지웠다.
악시덤의 목소리가 단박에 가라앉았다.
“……모르고 있었소? 백작의 광산 일인데 그걸 어떻게 모른다는 거요?”
“그, 그게…….”
하아, 미치겠군.
‘대체 무슨 광산을 말하는 거지? 팔아먹은 광산이 어디, 한두 개여야지…….’
설마 오늘 투기장에서 팔아 버린 광산인가?
‘아니지……. 오늘 팔았는데 광부들을 벌써 보냈을 리 없지. 게다가 아타뮴이라잖아. 내 광산 중에 아타뮴이 나올 만한 게 없는데…….’
모티반스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대공 전하. 어떤 광산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제 소유였던 광산이 대여섯 개는 되는지라.”
그러자 악시덤이 느릿하게 팔짱을 끼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아니. 광산의 소유자가 채굴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은 있을 수 없지.”
악시덤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모티반스는 그의 시선 하나로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전하, 일단……. 꼭 그 광산을 되찾아 오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가능합니다. 한 번만 더 믿어 주십시오!”
“되찾아 오겠다?”
“……예, 전하.”
모티반스는 애처롭게 눈을 뜨며 악시덤의 동정에 호소했다.
“아시다시피, 투기장이 불의의 사고로 중단되면서 전하께서 극심한 손해를 보셨지요.”
“그래서?”
“저는 저의 재산을 모두 털어서라도 전하의 손해를 메꿀 작정이었습니다.”
모티반스는 도박에 관한 이야기는 쏙 빼놓고 모두가 악시덤을 위해서였다는 말을 지껄였다.
“대대로 물려받았던 광산도 팔고, 이제 겨우 하나 남았습니다……. 그러니 아타뮴이 나왔다는 그 광산이 어떤 광산인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저택과 영지, 아니. 제 작위를 팔아서라도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모티반스가 비장하게 말을 끝마치고 악시덤의 눈치를 살폈다.
흐음. 악시덤이 시선을 내리깔고 턱 끝을 만지작거렸다.
‘토, 통했나……?’
모티반스가 조심스레 마른침을 삼켰다. 잠깐 생각하던 악시덤이 입을 열었다.
“아셰트 광산.”
허업. 모티반스가 놀라 숨을 멈췄다. 그러다 금방 안색이 밝아졌다.
“대공 전하! 그 광산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째서?”
모티반스는 희망을 찾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 광산을 사 간 사람이 제게 무척이나 호의적인 사람이라 분명 흔쾌히 돌려줄 겁니다!”
그러자 악시덤의 미간이 좁혀 들었다.
“누구길래.”
모티반스가 자랑스레 외쳤다.
“에스테르 공작가의 공녀입니다!”
“뭐……?!”
콰앙! 악시덤이 불끈 틀어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이 아둔하고 어리석은 자를 봤나!”
그에 놀란 모티반스가 몸을 들썩였다.
“왜, 왜 그러십니까?!”
“황제파 귀족에게 아타뮴 광산을 넘겨줬다고?”
“아, 아니. 그래도 그 공녀는 제게 호의를…….”
“닥쳐라!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더니! 내 오늘, 직접 그 돼지 목을 잘라 버려야 속이 시원할 것이야!”
“저, 전하! 살려 주십시오! 전하!”
으아아악! 모티반스가 집무실을 빠르게 튀어 나갔다. 검을 빼 들고 달려드는 악시덤을 피해 백작저를 미친 듯이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
아침이 되자마자 공작가에 손님이 찾아왔다.
“저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아델리아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예, 그렇습니다. 공녀께서 제 사정을 좀 살펴 주십시오……. 저 이대로 돌아가면 정말 빚쟁이들에게 죽습니다…….”
악시덤에 의해 자신의 저택에서 쫓겨난 모티반스는 곧장 에스테르 공작가로 향했다.
악시덤에게 얻어맞은 한쪽 뺨이 푸짐하게 부풀어 있고 찢어진 입술에선 피가 스며 나왔다.
그러나 체면을 차릴 겨를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광산을 돌려받아야 한다!’
아델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해 드려야 할까요?”
역시! 모티반스는 공녀가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음을 재확인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모티반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셰트 광산을 다시 제게 팔아 주십시오. 판매금은 두 배로 드리겠습니다.”
“두 배요?”
“예, 공녀님.”
아델리아가 놀라워하며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와! 4천만 골드를 주시겠다고요?”
그러자 모티반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공녀님. 바로 4천만 골드를 드리……. 예?”
모티반스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사, 사. 4천만 골드라니요?! 얼마 전에 10만 골드로 사 가시지 않았습니까!”
그럼 20만 골드지, 그게 왜 4천만 골드가 되었냐며. 모티반스가 펄쩍 뛰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쁘하하하!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