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아델리아는 모티반스를 향해 말했다.
“아니, 백작님. 생각해 보세요. 폐광이나 다름없는 광산과 아타뮴이 나온 광산의 값어치가 같다고 생각하세요?! 일곱 살인 저도 아는 걸, 백작님께서 모르실 리 없는데?”
“고, 공녀님!”
모티반스가 당황해하며 아델리아를 부르자, 아델리아가 단박에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아니면. 쓰레기 광산을 팔아도 된다고 여길 만큼, 우리 에스테르 공작가를 우습게 보셨던가.”
“아, 아니…….”
순간, 작은 체구에서 말도 안 되는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허업. 숨을 크게 들이마신 모티반스가 그 위협적인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물렸다.
아델리아가 한심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며 소파에서 내려왔다.
“쓰레기를 갖다 팔 때는 언제고, 이제 와 내놓으라니. 양심도 정도껏 없어야지.”
“…….”
모티반스는 한순간에 표정을 바꾼 아델리아를 바라보며 턱을 떨었다.
“공녀님! 제발, 제발 좀 살려 주십시오!”
모티반스가 휘청거리며 일어나 아델리아를 향해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멈추십시오!”
그러자 아델리아의 호위로 뒤에 서 있던 데프가 육중한 몸으로 모티반스를 가볍게 제압했다.
“크억!”
바닥의 적갈색 카펫 위로 부어 있던 뺨이 처박혔다. 모티반스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아델리아를 올려다보았다.
아델리아가 모티반스를 심드렁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왜 백작의 목숨을 제게 구걸하세요? 절 너무 과대평가하신 것 같아요. 전 백작의 목숨을 구해 줄 능력이 없어요. 하지만.”
한층 작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그렇게 매몰찬 아이는 아니랍니다.”
아델리아가 다시 싱긋 미소 지었다.
“공녀님……?”
아델리아는 품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어 모티반스의 얼굴 앞으로 던졌다.
팔랑팔랑, 허공에서 두어 번 돌던 종이가 바닥으로 볼품없이 떨어졌다.
모티반스가 데프에게 제압된 채 눈동자만 굴려 바닥의 종이를 쳐다보았다.
“이게, 뭐…….”
“제가 광산 보는 눈이 있거든요. 비싼 광석 냄새를 잘 맡는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백작님 덕분에 아타뮴이 나오는 광산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사실이잖아요? 그래서 백작님께도 기회를 드리려고요!”
기회? 설마 아셰트 광산을 돌려준다는 건가?!
아델리아가 데프에게 눈짓하자, 데프가 모티반스를 놓아 주었다. 그러자 모티반스는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허겁지겁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 들었다.
‘이……, 이건…….’
모티반스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기대했던 아셰트 광산 증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모티반스의 광산 중 하나였다는 것은 확실했다.
“이걸 왜, 공녀께서…….”
모티반스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이건 내가 투기장에서 날려 먹은 광산이잖아!’
아델리아가 고요하게 미소 지었다.
“운 좋게 아타뮴이 나오는 광산이 제 손에 들어왔듯이, 이번에도 운이 좋았어요. 투기장에서 백작님의 광산 증서를 구할 수 있을지 누가 알았겠어요?”
투기장……?! 그걸 공녀가 어떻게…….
모티반스가 난처한 얼굴로 아델리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그저 해맑게 웃었다.
“살펴보니까 백작께서 가지고 있던 광산들이 꽤 좋은 위치에 있더라고요? 예를 들면, 아타뮴 광산 바로 아래라든가, 아니면 바로 옆이라든가.”
아델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어 갔다.
“자금이 없어서 그런가 채굴을 시작도 못 한 광산들이 많던데, 혹시 또 모르죠. 그 광산들 중에서 아타뮴 광석이나 플라니트 광석이 또 나와 줄지.”
아델리아의 말에 모티반스의 시선이 들고 있는 광산 증서로 내려갔다.
“그, 그럼. 이 광산을 제게 돌려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아델리아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세상에. 양심이 없다, 없다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고, 공녀님!”
“기회를 드린다고 했잖아요. 저도 골드를 주고 사 온 건데, 그걸 어떻게 공짜로 드려요?”
“그럼……?”
“아타뮴 광석이나 플라니트 광석이 나올 확률이 가장 높은 광산을 팔아 드리는 거예요. 그래도 옛정이 있으니까요.”
“예……? 파, 파시겠다고요?”
“네!”
아델리아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모티반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천진한 웃음 뒤로 설핏 보이는 붉은 눈동자가 조금은 소름 돋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하는 모티반스를 보며 아델리아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아,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몰라. 저 광산에서 진짜 아타뮴 냄새가 솔솔 나는데.”
그러자 모티반스가 증서를 꽉 움켜쥐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 그래. 어쩌면 진짜 이 광산에서 아타뮴이 나올지도 모르지.’
공녀가 투기장까지 가서 자신의 광산을 죄다 사들인 것을 보면 이 광산에서 아타뮴 광석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게 분명했다.
‘아타뮴 광석만 나온다면 이 정도의 치욕은 치욕도 아니지!’
이를 악물고 있던 모티반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얼마에 파실 생각이십니까?”
아델리아는 선심 쓰듯 말했다.
“20만 골드.”
“예에?!”
모티반스가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20만 골드라니요! 이 광산은 제가 2천 골드에 팔았던 것입니다!”
“그래요? 싫으시면 그만두세요. 데프, 증서를 가져와.”
“예, 아가씨.”
데프가 위협적인 몸을 더더욱 부풀리며 다시 모티반스를 향해 걸어갔다.
움찔, 한 걸음 물러선 모티반스가 증서를 급히 품 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사겠습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다시 씩 미소를 머금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아타뮴만 생각하세요. 아타뮴만 나오면, 인생 역전이라고요?”
“그, 그렇지요.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20만 골드를 구하려면 시일이 조금 걸릴 것 같아서…….”
“아,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그러실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해 뒀어요.”
“준비요?”
모티반스가 의아하다는 듯 되묻자, 응접실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카를리나, 여기요!”
카를리나가 아델리아와 인사를 나누고 모티반스를 쳐다보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네요, 넬로체 백작님.”
“아, 로즈힐 영애가 아니십니까.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아델리아가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제가 뭘 믿고 증서를 그냥 내어드리겠어요? 골드가 없으면 그에 상응하는 걸 담보로 거셔야죠.”
모티반스가 카를리나와 아델리아를 번갈아 보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리고 아델리아의 신호에 맞춰 카를리나가 테이블 위로 서류를 올렸다.
아델리아는 서류를 향해 눈짓하며 말을 이어 갔다.
“거기에 서명하시면 돼요. 백작저와 넬로체 영지, 그리고 광산 하나는 남기셨던데 그것도 담보로 걸어 주셔야겠어요. 그래야 얼추 20만 골드가 맞춰지지 않겠어요?”
“예?! 하, 하지만…….”
그걸 다 걸어 버리면, 만에 하나 돈을 갚지 못해 모두 날려 버린다면……?
‘그야말로 폭삭 망해 버리는 건데.’
그러한 모티반스의 걱정을 읽은 아델리아가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아타뮴만 발견되면 모두 한 방에 되찾을 수 있는데 뭐가 그리 걱정이세요? 그런 배짱으로 투기장에서 도박은 어떻게 하셨나 몰라?”
아델리아가 키득거리자, 울컥한 모티반스가 소리쳤다.
“좋습니다! 여기다가 서명하면 됩니까?!”
“네, 거기 맞아요!”
사각사각, 종이 위 펜촉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
모티반스와 카를리나는 서류 작성의 마무리를 위해 함께 공작저를 빠져나갔다.
응접실을 나오니 세라가 빠르게 다가왔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안에서 큰 소리가 나길래 걱정했어요!”
세라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아델리아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걱정하지 말랬잖아. 아무 일도 없었어. 데프도 함께였고.”
“그냥 공작 각하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어야죠!”
세라가 다시 잔소리를 쏟아 내자, 아델리아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나갔다.
아델리아는 일주일 전, 카를리나에게 부탁 한 가지를 했다.
바로 모티반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라는 부탁이었다.
-투기장에서 밤을 새운다고 하더라고요.
-투기장에서요?
-네. 10만 골드도 거의 다 써 가는 것 같더라고요. 광산 증서를 내밀면서 골드를 빌려 달라는데 중개인도 없이 누가 덜컥 골드를 빌려주겠어요?
카를리나의 말에 아델리아가 눈동자를 반짝였다.
-카를리나. 백작이 골드를 다 쓸 때까지 기다렸다가, 광산 증서를 전부 사들여요.
-우리가요?
-네. 최대한 많이.
그 결과 모티반스의 광산 대부분이 아델리아의 손으로 넘어왔다.
10만 골드를 내어준 뒤, 빚을 청산할 기회를 준 것 같아 내심 찝찝했었는데 모티반스는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백작이 투기로 골드를 싹 날려 준 덕분에 일이 재밌게 됐어.’
저택이고 영지고 큰 고민 없이 내어놓는 꼴이라니.
아델리아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창문 너머로 공작저를 빠져나가는 모티반스의 모습이 보였다.
보물단지를 감춘 듯, 품 안의 광산 증서를 소중히 껴안고 주변을 경계하는 백작의 뒷모습에 아델리아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 멀었어요, 백작.’
그동안 아이들의 목숨을 이용해 벌어들인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내어놓으셔야지. 안 그래요?
아델리아는 모티반스의 모습이 사라지자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자, 다음번엔 뭘 더 뜯어낼까?’
지독해……. 작게 웅얼거리는 리그하르트의 목소리에 아델리아는 더욱 신나게 복도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