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공작저에 새로운 하루가 찾아왔다. 동시에 제국민들이 기다려 온 건국제가 시작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오후 늦은 시간까지, 공작저 사람들 역시 건국제 준비로 분주했다.
“나 어때, 세라?!”
아델리아가 분홍색 드레스를 붙잡고 제자리에서 핑그르르 돌았다.
그러자 세라가 가슴을 움켜쥐고 울먹였다.
“요정이 따로 없어요, 아가씨…….”
아니, 꽃인가? 일단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며 사족을 달았다.
“치.”
아델리아가 민망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세라를 슬쩍 흘겨보았다.
세라는 결국 참지 못하고 어쩜 이리 사랑스럽고 예쁘냐며 아델리아를 끌어안고 그녀의 볼에 자기 뺨을 마구 문질렀다.
“아이참, 세라!”
그만, 그만! 아델리아가 버둥거렸다. 하녀 렐리도 아델리아가 신을 구두를 가져오며 말을 더했다.
“오늘 건국제에서 아가씨가 제일 예쁠 거예요! 장담해요! 다른 영애들이 자신의 하녀들을 막 구박할 거예요!”
“응? 애꿎은 하녀들은 왜?”
“우리 아가씨보다 더 예쁘게 못 꾸몄다고요!”
아델리아가 푸흐흐, 기어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참. 괜히 내가 다 미안해지네?”
그렇죠? 그렇죠? 아델리아의 맞장구에 렐리도 덩달아 신이 나 떠들었다.
‘어째, 전부 팔불출만 모인 거 같아.’
세라가 아델리아를 화장대 앞에 앉혔다. 그리고 부드러운 은발을 천천히 땋아 내리며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연회장을 가시는 거예요? 어제까지만 해도 갈 생각이 없다고 하셨잖아요.”
“응, 안 가려고 했는데, 그래도 축제는 오랜만이니까…….”
아델리아가 공중에 뜬 다리를 앞뒤로 까딱까딱 흔들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대신 말했다.
[황태자비 후보가 궁금하셔서 가는 거겠죠!]
‘……왜? 그러면 안 돼?’
[연회장이라면 끔찍하다고 생각하셨으니까 하는 말이죠.]
아델리아는 예전부터 연회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귀찮기도 했고, 연회장에서 머물다 보면 어김없이 악시덤이 나타나 말을 걸어왔던 탓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에서도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아델리아는 자신의 발끝으로 시선을 내렸다. 반질거리는 구두코를 톡톡 부딪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봐 둬야 할 거 같아서.’
[누구를요? 황태자비 후보들요?]
‘응. 어쨌든 우리 전하의 반려가 될 분들이잖아.’
[속 편한 소리 하시네.]
‘내가 뭐?’
[그거 봐도 괜찮겠어요? 괜히 축제 기분만 망치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떤 영애인지 잠시 보고 빠져나올 거야.’
황제가 고르고 고른 신붓감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카르세스의 곁에 설 황태자비가 어떤 사람이 될지 궁금하기도 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황제가 되시는 일에 도움이 되는 사람인지, 아니면 방해가 될 사람인지 확인하려는 것뿐인데?’
[어이구, 네에네에. 어련하시겠어요.]
아델리아가 뾰로통해진 눈으로 거울 속 목걸이를 쏘아보았다.
‘그것만 딱 보고 나와서 바로 광장으로 갈 거야! 광장에서 제대로 축제를 즐기면 되지, 뭐!’
흥. 아델리아가 짧게 콧방귀를 뀌고서 세라에게 물었다.
“그런데 세라. 연회장에 잠시 들렀다가 바로 수도 광장으로 갈 건데, 건국제는 뭐가 가장 재밌어?”
그러자 세라가 으음, 잠깐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매년 행사는 바뀌어요, 아가씨. 그런데 듣기로, 올해는 마탑에서 축제를 위해 행사를 열어 주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자 아델리아의 눈이 커졌다.
“마탑에서? 그 음침, 아니. 그 폐쇄적인 마탑에서 축제에 참가한다고?”
음침? 세라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대꾸했다.
“네, 황제 폐하께 직접 찾아와 제안했다고 들었어요. 축제에서 행사를 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세라의 말에 아델리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 폐하께서는 그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을 거야.’
마탑은 기본적으로 중립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마탑 마법사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세력들은 많았다.
만에 하나, 마탑이 입장을 바꾸어 한쪽 세력과 손을 잡는다면 대륙의 판도는 뒤집히고 말 테니까.
‘직접 와서 제안했다니, 대체 무슨 행사일까.’
아델리아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자, 세라가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듯 귓가에 소곤거렸다.
“얼핏 흘러가는 이야기로 들었는데요.”
“응?”
“마탑에서 보관 중이던 수천 년 된 거울을 광장에 전시하기로 했나 봐요.”
그러자 아델리아가 몸을 빙글 돌려 세라를 보았다.
“거울? 행사가 고작 거울을 전시하는 거라고?”
되묻는 아델리아의 말에 세라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보통 거울이 아니래요.”
“그럼?”
“수천 년 된 거울이라니까요?”
그러자 아델리아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래 봤자, 그냥 늙은 거울이지.”
그렇게 오래된 걸 옮기다 깨지면 어쩌려고? 아델리아가 흥,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세라가 아주 진지한 눈빛으로 대꾸했다.
“에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어요. 그 거울에 신비로운 능력이 있다구요.”
“어떤 능력?”
아델리아가 무구한 눈빛으로 물었다.
세라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아델리아의 어깨를 잡고 다시 화장대 거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거울 속 아델리아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짓던 세라가 대답했다.
“그 사람의 진실된 모습을 비춰 주는 거울이래요.”
진실된, 모습……? 아델리아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세라가 아델리아의 머리카락을 가늘게 땋아 작은 리본을 줄줄이 묶어 내려가며 말했다.
“로시안트 제국의 건국 초기에는 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상이었다고 들었거든요?”
“응, 나도 고서에서 읽었어.”
“그때, 신만 땅으로 내려온 게 아니라 지하의 악마들도 땅으로 올라왔었대요.”
악마들은 교활하고 비열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둔갑한 채, 그 속에서 탐욕과 의심을 키워 사람들의 영혼을 타락시켰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악마에게 현혹되어 목숨을 잃었는데, 그걸 안타깝게 여긴 신께서 악마와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거울을 남겨 주신 거죠.”
“흐응.”
아델리아가 심드렁한 얼굴로 콧소리를 냈다.
‘그렇게 안타까웠으면 직접 없애 주지, 번거롭게 무슨 거울이래.’
[어허. 성검의 주인께서 신을 모독하는 발언을 하시다니요!]
‘……너 방금 되게 신전 신관 같았어.’
[예에?! 너무하세요! 제가 신관들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시면서!]
‘신관을 싫어하는 성검이 더 이상하다고는 생각 안 해?’
[취향이죠! 누님이 더 이상해요!]
‘네가 더 이상해!’
누님이 더 이상하다니까요! 아니라니까! 너라니까! 둘의 유치한 싸움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때, 세라가 마지막 리본을 묶으며 말했다.
“자! 다 됐어요, 아가씨!”
치장을 끝내고 나니, 어느덧 하늘은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아델리아가 화장대 의자에서 폴짝 뛰어 내려왔다. 분홍색과 보라색이 적절히 섞인 드레스 자락이 팔랑팔랑 나부꼈다.
“고마워, 세라.”
“재밌게 즐기다 오세요, 아가씨.”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내일 같이 구경해요. 오늘은 공작 각하랑 도련님과 보내셔야죠.”
아델리아가 해맑게 웃었다.
“응! 다녀올게!”
아델리아가 방을 빠져나갔다. 은빛 머리카락에 달린 빨간 리본이 걸음에 맞춰 휘날렸다.
***
로시안트 제국의 황궁은 수도 어디에서든 잘 보일 수 있도록 높은 지대에 세워졌다.
황궁을 빙 둘러싼 르하네스 강줄기가 붉은 태양을 머금은 듯 노을빛으로 반짝거렸다.
르하네스 강 위로 황궁까지 이어진 도개교는 각 귀족 가문의 마차들로 북적거렸다.
‘우와! 제국 내 귀족들은 다 모이는 것 같아!’
아델리아는 공작저 마차에 탄 채로 도개교 위로 줄지어진 마차들을 보며 감탄했다.
[누님. 그렇게 두리번거리면 촌스럽다고 그래요. 마차에서 내리게 되면 느긋하게, 여유롭게. 네? 아시겠어요?]
‘……그냥 네가 귀족 해.’
[창피당하실까 봐 조언해 드리는 거잖아요.]
‘내가 아무리 예법을 제대로 배운 적 없다고 해도, 기사로서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하긴, 연회장이 처음도 아니시죠?]
‘응. 참석은 해 봤지.’
그러나 연회장의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연회장 체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회장에 들어가지도 않고 서둘러 달아난 적도 많았다.
마주칠 일이 거의 없다 보니, 다른 귀족 영애들에게 관심도 없었다.
[지금은 관심이 있어요?]
‘당연하지! 어쩌면 저 영애들 중에서 또 절친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팽, 코웃음을 쳤다.
[아니, 누님. 그러니까 절친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잖…….]
‘우와! 올리비아다!’
[…….]
아델리아는 리그하르트의 말이 들리지 않는 척, 올리비아가 타고 온 백작가의 마차를 바라보며 외쳤다.
기다랗던 마차의 행렬도 점점 줄어들었다. 자리에 멈춰 있던 아델리아의 마차도 황궁 입구로 들어섰다.
“내리십시오, 아가씨.”
“응. 고마워, 아렌트.”
아델리아의 호위로 따라온 아렌트가 말에서 내려 아델리아의 에스코트를 맡았다.
아델리아가 마차에서 내리자, 연회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데릭이 아델리아를 발견하고 걸어왔다.
“아델!”
“오빠아!”
데릭이 움직이자, 연회장 밖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데릭은 자신이 시선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그저 해맑았다.
“데릭 경을 오빠라고 부르는 걸 보면 에스테르 영애인가 봐요.”
“세상에, 데릭 경과 똑같이 생겼어요!”
“남매니까요.”
너무 귀여워요!
까르르, 조용히 웃음을 터트리는 영애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더러 귀엽대, 릭!’
[투기장에서 사람을 두들겨 패는 걸 봤다면 그런 말 하지 못할 텐데.]
그때, 아델리아 앞에 선 데릭이 팔을 내밀었다.
“예쁘다, 아델.”
에헤헤. 아델리아가 데릭의 팔에 손을 올리며 싱긋 웃었다.
“오빠도. 역시 만인의 연인, 에스테르 경이야.”
그러자 데릭이 푸하,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그게.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다들 그러던데, 뭐.”
아델리아는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아빠는?”
“폐하께 가셨어. 아마 같이 들어오실 거야.”
“응.”
테오스와 데릭은 황제의 부름을 받고 먼저 입궁한 상태였다.
아델리아는 데릭의 손을 잡고 연회장 입구에 섰다. 그러자 초대장을 확인한 시종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에스테르 공작가의 에스테르 영식과 에스테르 공녀께서 입장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