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98)화 (98/161)

98화

정교한 세공 기술이 들어간 연회장의 황금빛 문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러자 연회장 안쪽의 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높은 천장에는 다이아몬드를 떠올리게 하는 샹들리에가 빛났고, 연회장을 채우던 은은한 선율이 열린 문틈으로 쏟아져 나왔다.

연회장 안에 있던 사람들은 주고받던 대화를 잠시 멈추고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에스테르 공작가라고?”

에스테르 공작가의 후계자와 공녀의 등장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에스테르 공작가에서 연회에 참석하는 건 처음 아니에요?”

“일단, 저는 처음 봐요.”

승전을 축하하는 연회든, 황실의 중요 연회든. 에스테르 공작가의 사람들이 참석한 경우는 없었다.

데릭을 쫓아다니던 영애들이 연회가 아닌 디저트 거리로 나온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한 귀부인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감탄했다.

“세상에나. 에스테르의 남매를 좀 봐요.”

한 명은 훤칠한 미남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오목조목한 이목구비의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낮게 드리워졌던 경계심은 두 사람의 등장과 동시에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여기저기서 두 사람을 향한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아델리아와 데릭은 무관심했다. 마치, 그 이야기들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두 사람은 연회장의 한쪽 벽으로 향했다. 아델리아가 데릭의 옆에 나란히 선 채로 물었다.

“그런데 오빠.”

“응?”

“설마, 오빠. 연회가 처음인 거야?”

아델리아의 질문에 데릭이 천진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맞아. 처음이야.”

아델리아가 데릭을 올려다봤다.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저렇게 훌륭한 미모를 가져 놓고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

리그하르트는 남 말할 처지가 아니지 않냐고 물으려다가 그냥 포기했다.

리그하르트의 기억 속에서는 아델리아도 훌륭한 외모를 썩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전장 위 진흙밭에 뒹굴어도, 적들의 피를 뒤집어써도, 아델리아의 외모는 좀처럼 가려지지 않았다.

그런 외모를 가지고도 아델리아는 그 흔한 연애 한번 해 본 적이 없었다.

숱하게 다가오던 젊고 능력 좋은 영식들의 구애도 하나같이 농담으로 넘겼다.

[……어째 남매가 똑같아.]

‘응? 뭐라고 했어? 릭?’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아델리아가 되묻자, 리그하르트가 화들짝 놀라 주제를 돌렸다.

[아, 아닙니다! 연회장 분위기가 참 좋네요!]

‘너, 내 욕 했지?’

[아니라니까요? 아하하하.]

리그하르트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아델리아는 저 멀리, 백작 부부와 함께 등장하는 올리비아를 발견했다.

‘올리비아도 도착했어!’

인사를 나누고 싶어 올리비아를 향해 가려던 걸음이 문득 멈춰 섰다.

어……. 이렇게 막 다가가서 인사해도 되는 걸까?

‘만약, 나랑 친하다는 게 소문이 나면…….’

아델리아는 제국 내 퍼졌던 자신의 소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검을 배우느라, 기본적으로 배워야 하는 교양과 예법에 서툰 아이.

‘귀족 영애가 검술 배우는 일을 무식하고 수치스러운 행동이라 생각하잖아.’

자신으로 인해 올리비아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나 귀족들은 남 말 하는 걸 좋아하니까…….’

좋아. 먼저 말 걸기 전까지 아는 척하지 말자.

‘괜히 피해 끼치기 싫어.’

아델리아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올리비아를 잠깐 바라보다, 씁쓸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 후로도 한동안 귀족들의 입장은 계속되었다.

어림잡아도 수백 명은 되어 보였다.

황제가 나타나기 전까지, 귀족들은 자유롭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아암. 아델리아가 입을 가리며 작게 하품했다.

‘재미없어.’

어째, 티파티보다 재미가 없다.

‘연회에서는 검술 대련 같은 거 안 하려나.’

자극적인 티파티를 겪어서 그런가, 아델리아는 이번 연회에서 특별한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아델리아는 무감한 시선으로 느릿하게 연회장의 사람들을 훑었다.

‘저 중에 황태자비 후보들이 있다는 말이지?’

누굴까? 얼른 발표했으면 좋겠는데.

‘누군지만 보고 빨리 나가 버리게.’

[황제가 와서 공표할 때까지 기다려야겠죠?]

‘그렇겠지. 언제 오시려나.’

그러고 보니 카르세스도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도 연회는 좋아하지 않았잖아요. 아마 황태자 궁에 있든가, 아니면 테트 도르에 가 있든가 할 거예요.]

‘너, 은근히 전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누님께서 다 말씀해 주신 거잖아요. 아마 제게 귀가 있었다면 귓속에 딱지가 앉았을 거예요.]

‘……내가?’

[네.]

아, 아닌데. 뭐, 딱히 그렇게 많다고 할 정도는…….

아델리아가 멋쩍은 표정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데릭을 쳐다보았다.

데릭은 처음 입장했을 때와 같이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모습으로 반듯하게 서 있었다.

재밌어하는 얼굴인지, 자신처럼 재미없어하는 얼굴인지 도무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오빠, 왜 가만히 있어? 가 봐도 돼. 연회를 즐겨야지.”

오빠 또래 영애들이 여기저기 되게 많아. 하고 덧붙이자, 데릭이 고개를 돌려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아델. 내가 가긴 어딜 가? 난 지금도 충분히 즐기고 있어. 너랑 함께 연회장도 와 보고.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쌓고 있는걸?”

오늘처럼 즐거운 적이 없었다며 데릭이 환하게 웃자, 아델리아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 오빠는 저런 사람이었지. 아델리아가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빠. 남자는 조신해야지. 결혼하기 전까지, 계속 이렇게 조신하게 있어. 알겠지?”

조신……? 데릭이 잠시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아델.”

“친우들이 간다고 막 아무 데나 따라가고 그러지도 말고. 알았어?”

“알았어, 아델.”

데릭은 아델리아의 말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눈매를 곱게 접어 웃을 뿐이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지도 몰라.’

말도 안 되는 영애에게 붙잡혀 사느니, 차라리 얌전하게 지내다가 카를리나와 결혼하는 게 나을지도.

‘뒤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저 순진한 오라버니가 뒤늦게 금지된 사랑에 빠지게 되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니까.

아델리아가 측은한 눈빛으로 데릭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두 사람을 조용히 바라보던 사람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동생이랑 같이 올 줄 몰랐어요. 로즈힐 영애와 함께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게요.”

로즈힐 영애라는 말에 아델리아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맞네. 지금 내가 오빠를 붙들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얼른 카를리나를 찾아서 오빠를 옆에 붙여 줘야 그림이 그럴듯하겠어. 다른 영애들이 집적거리지도 않을 테고.

아델리아는 고개를 쭉 빼고 많은 귀족들 사이에서 화사한 금발의 카를리나를 찾았다.

그러나 카를리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 꼭 참석하겠다고 했었는데…….’

아델리아 역시 데릭에게 카를리나의 에스코트를 부탁하려 했다.

이런 기회에 두 사람이 대화도 나누고 함께 입장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릭은 테오스와 함께 입궁해야 했던 탓에 두 사람의 동시 입장은 성사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막 사업을 시작한 카를리나에겐 이런 연회는 절호의 기회야. 시간을 엄수하는 사람이라 이렇게 늦을 리도 없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음악이 멈추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아델리아도 카를리나를 찾는 일을 포기하고 고개를 돌렸다.

연회장 한편에 마련되어 있던 단상 위, 굳게 닫혀 있던 거대한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 황제가 나왔다.

‘어? 아빠다!’

황태자 전하까지 오셨네?

황제 옆으로는 테오스와 카르세스가 함께였다.

테오스의 어깨에서 망토 체인을 고정해 주는 붉은 루비가 반짝였다.

으헤헤, 아델리아는 자신이 선물한 루비를 쳐다보며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다 카르세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 안녕하세요, 전하!’

아델리아가 눈동자와 입가의 미소로 인사를 전했다.

그러나 카르세스는 한 치의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짧게 마주쳤던 시선도 금세 돌아갔다.

‘치, 무뚝뚝하시기는.’

아델리아가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자, 삼삼오오 모여 있던 귀족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거리를 벌렸다.

귀족들은 일제히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제국의 문양이 새겨진 단상 위에 섰다.

다행스럽게도 얼마 전 사경을 헤매던 사람 같지 않았다.

‘펠슨 선생의 약이 효과가 있었나 봐.’

[성격이 좀 괴팍하긴 해도, 능력 하나만큼은 진짜잖아요!]

리그하르트의 짓궂은 소리에 아델리아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짧은 축사를 한 뒤, 금세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테오스와 카르세스 역시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아델리아가 기대했던 황태자비 후보에 관한 이야기는 언급되지 않았다.

‘어? 뭐지? 황태자비 후보는?’

[그러게요. 황태자 궁의 하녀들이 잘못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갑자기 등장했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황제를 떠올리니 뭔가 의아하기도 하고, 맥이 풀리기도 했다.

그때, 기사 하나가 걸어와 데릭에게 귓속말을 했다.

“알겠다. 알아서 하겠다고 전해 드려.”

“예, 부단장.”

아델리아가 데릭을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별일 아니야. 아버지께서는 일이 생기셨다고 우리 먼저 돌아가라는데, 어떻게 할래? 집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광장 구경하러 갈래?”

그러자 아델리아가 두 눈을 반짝였다.

뭘 물어보고 있어!

“당연히 광장 구경이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