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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99)화 (99/161)

99화

이런 날에 집을 왜 가!

과거에도 그랬다.

연회는 싫었지만, 자신의 승전을 축하해 주는 분위기 자체는 즐기는 편이었다.

축제 분위기에 달아오른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그 분위기에 취하는 것이 좋았다.

-전장에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는데, 이런 맛이라도 있어야지.

축제 날이면 아델리아는 홀로 와인병 하나를 들고 제국 내 가장 높은 건물인 황궁의 지붕까지 올라갔다.

밤하늘과 그 밤하늘을 수놓는 폭죽을 바라보며 이제는 느낄 수 없는 떠나간 이들의 향취를 상상으로나마 그리고는 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아니야…….’

아델리아가 데릭의 손을 꼭 붙잡았다.

지금 붙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상상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델리아가 환하게 웃었다.

“빨리 가자, 빨리!”

그러자 데릭이 작게 풉,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곧 있으면 폭죽도 터진다니까 그 전에 도착해서 자리 잡고 구경하자.”

“응!”

아델리아와 데릭이 연회장을 빠져나가려던 그때였다.

“저어, 에스테르 경.”

한참 동안 멀찌감치 서서 데릭을 바라만 보던 소녀 무리가 다가왔다.

데릭의 입가에 고였던 미소가 한순간에 흩어졌다. 그는 영애들을 느릿하게 훑었다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무슨 일입니까?”

데릭과 엇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붉은 머리카락의 영애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가장 아끼는 벗이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요.”

“그렇습니까.”

고저 없는 데릭의 음성에도 영애는 포기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아무에게나 부탁할 수는 없어서 에스테르 경께 부탁하려는데…….”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푸헹!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도 뻔한 수작질입니다! 누님! 저기 문 쪽에도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고 영애들과 함께 온 파트너도 있을 텐데요!]

‘그렇지. 게다가 저 중에는 아버지랑 온 영애도 있어. 생판 모르는 우리 오빠보다 그쪽이 부탁하기엔 더 좋지.’

정말 아팠다면 말이야.

아델리아가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한 걸음 물러서서 흥미로운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무리 가운데 끼어 있던 영애 하나가 다른 영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숨을 할딱거렸다.

[누님! 쟤 좀 봐요! 저 요망한! 누가 봐도 ‘그 아픈 사람이 나예요’, 라고 말하는 것 같잖아요!]

우리 형님을 꼬시려고! 어떻게든 잡아먹어 보려고!

‘침착해, 릭.’

나보다 네가 더 흥분하면 어쩌자는 거야.

아델리아가 리그하르트를 진정시켰다.

식빵 겉면 같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영애였는데, 슬쩍슬쩍 눈치를 살펴 가며 흐르지도 않는 식은땀을 연신 닦아 내고 있었다.

‘꾀병인 건 확실한데, 우리 순둥이 오라버니께서 어떻게 처리하실지 궁금하기도 하단 말이지.’

아델리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그때, 데릭이 문 쪽의 기사를 향해 고개를 돌려 손을 올렸다.

그가 손끝을 까딱까딱 움직이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부단장.”

데릭이 턱 끝으로 숨을 할딱거리는 영애를 가리켰다.

“저쪽 영애께서 머리가 아프다고 하신다. 가만 보니 숨 쉬기도 힘들어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아, ……예?”

기사가 놀란 눈을 뜨며 호흡이 모자라 보이는 영애와 데릭을 번갈아 보았다.

이런 연회에서 저러한 수작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런 일로 기사까지 부르는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보통은 대충 속아 넘어간 뒤, 연회장을 빠져나가 화끈한 시간을 보내곤 했으니까.

‘아, 부단장은 연회가 처음이랬지.’

그래서 이런 관행을 모를 수도 있지.

기사가 홀로 고개를 주억거리자, 데릭이 말을 이어 갔다.

“티르단. 영애를 의료원으로 모셔다드리도록.”

“예, 부단—”

그러자 다른 영애가 다급히 기사의 말을 끊고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 에스테르 경! 다른 기사는 필요 없…….”

데릭은 영애의 말을 끊고 시선을 빤히 마주치며 무심하게 말했다.

“이 기사는 네르아스 남작 가문의 장남, 티르단 네르아스라고 합니다. 제가 신분을 보증하는 황실 기사단의 일원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 하지만……!”

저 기사의 신분이 무슨 상관이람! 에스테르 경이 아니잖아!

벗을 위해 나섰던 영애의 낯빛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누가 보면 아픈 사람은 저 영애라고 생각할 정도로.

꾀병을 부리고 있던 영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입술을 말아 씹으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데릭이 티르단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리며 말했다.

“그럼, 부탁하지. 보다시피 내가 선약이 있어서.”

아……. 티르단이 뒤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델리아를 흘깃거렸다.

티르단은 영애들의 따가운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대답했다.

“마, 맡겨만, ……주십시오.”

그러자 붉은 머리카락의 영애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티르단을 쏘아보았다.

하하……. 하하하.

괜히 애꿎은 티르단이 눈총을 받게 된 것이다.

‘푸흡.’

[크항항항!]

아델리아와 리그하르트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티르단이라는 저 기사 표정 좀 보세요, 누님!]

‘영애들은 또 어떻고. 곧장 기사 머리채라도 잡을 표정인데?’

티르단이라는 기사한테는 미안하지만 아델리아는 자신의 기대보다 더 훌륭히 유혹을 뿌리친 데릭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오빠 좀 봐 봐. 저게 유혹인지도 모르는 것 같지?’

[그러니까요! 그게 너무 웃겨요, 누님!]

깔깔! 리그하르트가 통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데릭은 저런 식의 유혹을 계속 받아 내야 할지 모른다.

‘카를리나, 내가 이번에는 카를리나를 대신해서 오빠를 지키고 있을게요!’

에헴! 뒤로 빠져 있던 아델리아가 앞으로 나서며 데릭의 팔에 팔짱을 꼈다.

“이야기가 대충 끝난 것 같은데. 우린 이만 가 보실까요, 오라버니?”

그러자 데릭이 다시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실까요?”

데릭은 제 팔을 붙든 아델리아의 손등 위로 손을 겹쳐 올리며 몸을 돌렸다.

영애들과 티르단은 그런 남매가 연회장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

“오빠, 저기야!”

“응, 천천히 가. 그러다 길 잃어버린다?”

“오빠가 잘 쫓아오면 되잖아!”

아델리아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수도 광장을 자기 집 앞마당처럼 돌아다녔다.

연회장에서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물을 만난 물고기 같달까.

생기 도는 얼굴과 힘이 넘치는 목소리가 그러했다.

수월한 이동을 위해 드레스도, 제복도 벗어 던졌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옷으로 갈아입고 후드가 달린 망토도 하나씩 걸쳤다.

한동안 인파를 비집으며 이것저것을 구경하던 아델리아가 결국 걸음을 멈춘 곳은 스테이크를 전문으로 하는 이동식 노점상이었다.

“오빠! 이거 사 줘!”

“이걸?”

아델리아보다 한발 늦게 도착한 데릭이 그릴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는 고깃덩이를 쳐다보았다.

아델리아는 기대에 찬 얼굴을 한 채, 그릴 위 고깃덩이 중 하나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응! 저기 뼈 붙어 있는 스테이크 말이야. 도끼처럼 생긴 거.”

“도끼?”

데릭은 아델리아가 가리킨 스테이크를 쳐다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진짜네. 도끼처럼 생겼네.”

그릴 자국이 선명한 스테이크는 제법 맛깔스러워 보였다.

거기에 숯불 향까지.

연신 군침을 흘리는 아델리아를 보며 데릭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몇 개?”

아델리아는 숯불 향기를 킁킁 맡으며 조급한 얼굴로 말했다.

“네 개! 나 두 개, 오빠 두 개.”

빨리, 오빠! 나 배고파!

그러자 데릭이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어 노점상 주인에게 건네며 키득거렸다.

“연회장에서 아무것도 안 먹을 때부터 알아봤어.”

“그렇지만 사람들이 너무 쳐다보니까 못 먹겠더라. 먹다가 체할 것 같았어.”

“네 머리만 한 고기를 뼈째 뜯고 있으면 여기 사람들도 널 뚫어져라 쳐다볼 텐데?”

“그래도 내가 에스테르 사람인 건 아무도 모르잖아. 그거면 됐지, 뭐.”

하긴, 그건 그래. 데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두 개로 되겠어? 한꺼번에 푸딩 열 접시도 먹어 치우는 분께서?”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거든?”

에헴! 아델리아가 턱을 치켜들고 양쪽 허리에 손을 떡하니 올렸다.

두 남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노점상 주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 집 스테이크가 뼈째 뜯어먹는 재미가 쏠쏠하답니다. 숙녀분께서 고기 좀 뜯을 줄 아시는군요!”

“알죠, 알죠! 뼈에 붙은 근막의 식감도 정말 좋아하거든요!”

“오호라! 설마설마했지만,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시군요! 좋습니다! 고기를 사랑하는 숙녀분을 만난 기념으로, 남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고 조용히 고기를 뜯을 수 있는 장소를 알려 드리죠!”

“그런 곳이 있어요?!”

아델리아가 눈동자를 반짝이며 묻자, 노점상 주인이 대답했다.

“제 가족들과 가끔 가는 곳인데, 인적이 드물고 무엇보다 경치가 끝내줍니다. 이 동네 토박이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장소지요!”

데릭은 어쩐지 죽이 척척 맞는 두 사람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델리아와 데릭은 접시를 양손 가득 들고 노점상 주인이 알려 준 장소로 향했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우거진 좁은 산책길을 걷다 보니, 어느 순간 확 트인 공간이 나왔다.

아델리아가 허름하게 대충 세워 놓은 나무 난간으로 뛰어가며 말했다.

“우와! 오빠! 여길 봐!”

황궁 지붕에서 내려다본 수도의 전경도 아름다웠지만, 이곳의 전경도 그 못지않았다.

오히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찌르르, 울어 대는 풀벌레 소리까지 더해지니 귀까지 호강하는 기분이었다.

데릭이 오래된 벤치 위로 손수건을 깔고서 그 위를 톡톡 두드리며 아델리아를 불렀다.

“앉아. 앉아서 봐.”

“응.”

아델리아가 벤치로 걸어와 엉덩이를 올려 앉았다.

아델리아는 수도의 전경을 황홀하다는 듯 바라보며 데릭이 건네준 뼈 고기의 뼈대를 잡고 와앙—!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그러자 아델리아의 두 눈이 급격히 커다래졌다.

“움움! 우움움움!”

아델리아가 뼈 고기를 마구 흔들며 다른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델, 음식이 입에 있으면 말하는 거 아니랬잖아.”

“우움!”

“맛있다고?”

“움!”

아델리아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도 먹을 테니까 꼭꼭 씹어 먹어. 알겠지?”

“움!”

데릭이 아델리아의 입가에 묻은 기름기를 닦아 주고서 자신도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안온했다.

축제로 인파가 바글거리는 광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토록 평온한 장소가 있다니.

맛있는 음식에, 아름다운 전경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자연의 소리까지.

두 사람은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꺄아아악—!”

두 사람의 뒤편에서 비명이 들렸다.

양 볼 불룩이 고기를 뜯고 있던 아델리아가 놀라 몸을 돌렸다.

‘어? 이 목소리.’

낯설지 않은 목소리였다.

데릭 역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비명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도망치세요, 카를리나 아가씨!”

“실라!”

그 목소리에 아델리아와 데릭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카를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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