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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00)화 (100/161)

100화

많은 사람이 모이고 어수선한 축제에는 항상 사고가 잇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사고가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은 이야기를 건너 듣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다.

“실라! 안 돼!”

다시 한번, 카를리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델리아는 머리털이 죄다 서는 기분을 느꼈다.

순간, 무수히 쓰러져 갔던 전우들의 목소리와 핏빛 전장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안 돼…….

‘카를리나……!’

아델리아가 자리를 박차고 튀어 나갔다. 데릭보다 빨랐다.

그리 애지중지하며 아끼고 아끼던 뼈 고기 접시도 흙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아델!”

데릭 역시 아델리아의 뒤를 쫓았다.

비명이 들려온 장소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거리는 영영 닿지 않을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제발, 제발……!’

아델리아가 속으로 기도하며 자신이 낼 수 있는 한계까지 속도를 올렸다.

***

빽빽하게 나무들이 자라난 숲속.

“으…….”

“실라! 정신 차려 봐, 실라!”

“후우……. 끈질기네. 하녀 따위가.”

카를리나가 흙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쓰러진 하녀 실라에게로 다가갔다.

실라의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어 있었고 코와 입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카를리나를 지키려다 괴한들에게 당했던 까닭이다.

“실라! 내 목소리 들리니?”

“아……, 아가, 씨…….”

실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내자, 괴한이 조롱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허? 아직도 숨이 붙어 있네?”

그러자 옆의 괴한 역시 따라 웃었다.

“계집이라고 너무 봐준 거 아냐? 아니면 실력이 거기까지든가.”

“닥쳐.”

괜히 기분이 나빠진 괴한은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목이 떨어져도 말을 할 수 있나 보자.”

“하녀만 죽여. 저 옆의 계집은 생포해 오라 했으니까. 인질이라나 뭐라나.”

“알았어.”

인질? 그들의 대화에 카를리나는 실라를 꼭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말을 해야 알 거 아닌가!”

“원하는 거? 그건 우리 의뢰인을 만나서 물어봐. 우린 그쪽을 잡아다 던져 주면 끝이니까.”

아, 물론 그 하녀는 필요 없으니 죽일 거지만.

끌끌, 가래 섞인 웃음소리가 숲속을 울렸다.

카를리나는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괴한을 노려보며 말했다.

“사내 둘이 여자들을 상대로 부끄럽지도 않으냐!”

그러자 괴한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안 부끄러운데? 왜? 정의롭게 살면 누가 골드라도 던져 주나?”

“돈 많은 귀족 영애께서 우리네 사정에 관심이나 있겠어?”

사내들의 비웃음이 더 커졌다.

실라를 끌어안은 카를리나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검을 꺼내 든 사내가 다른 괴한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이봐, 이 계집한테서 하녀 좀 떼어 내 봐.”

“거참, 귀찮게 구네.”

괴한 중 하나가 카를리나에게로 성큼 다가와 정신을 잃은 실라를 억지로 떼어 내려 했다.

“안 돼! 하지 마!”

카를리나가 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거구의 괴한에게 힘으로 당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과정에서 카를리나의 얼굴 여기저기에 상처가 났다.

“실라! 실라!”

카를리나는 자신이 상처를 입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마지막까지 실라를 붙들고 있었다.

기어이 실라가 괴한의 손에 붙들려 끌려 나가자, 카를리나가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가 다른 괴한에게 복부를 걷어차였다.

“아악!”

으으. 카를리나가 바닥에 쓰러졌다가 겨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실라를, 건들지 마…….”

“하녀나, 주인이나. 더럽게 끈질기네.”

멀찌감치 실라를 던져 놓은 괴한이 검을 높이 쳐들었다.

“단번에 보내 줄 테니 내 탓은 하지 말라고. 차라리 주인 잘못 만난 걸 탓해.”

하얗게 드러난 실라의 목을 정확히 겨냥한 검이 빠르게 내려왔다.

그때.

카앙—!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날아와 괴한의 검을 쳐 냈다.

“뭐, 뭐야!”

검을 놓친 괴한이 자신의 검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조금 떨어진 나무 기둥에 꽂혀 있는 은빛 검을 발견했다.

은빛 검은 성인이 쓰기에는 조금 짧았는데, 그렇다고 단검이라 하기엔 제법 검신이 기다랬다.

‘저게 무슨…….’

그 은빛 검날에 꿰뚫린 자신의 검이 덜렁덜렁 흔들리고 있었다.

괴한들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어둠 속을 향해 소리쳤다.

“누구냐! 비겁하게 숨어 있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라!”

그러자 어둠 속에서 피식, 웃음소리가 들렸다.

“비겁?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희 같은 놈한테 들으니 더 열받네.”

생각보다 가느다란 목소리에 괴한들은 미간을 구겼다.

‘애 목소린데?’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어둠 속에서 정말 어린아이가 걸어 나왔다. 그 뒤로 데릭도 함께였다.

두 사람 다 후드를 뒤집어쓴 상태라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괴한들은 어린아이 하나와 제법 건장해 보이는 사내를 보며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긴장을 풀었다.

아델리아와 데릭을 알아본 카를리나가 턱을 덜덜 떨었다.

‘아……, 아데엘…….’

소리 없이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한 카를리나를 보며 아델리아의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아델리아가 자신의 뒤편에 서 있던 데릭에게 말했다.

“오빠. 실라와 카를리나를 데리고 빨리 가.”

그러자 데릭의 시선이 아델리아의 등으로 향했다.

“뭐? 널 두고 어떻게 가?”

데릭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아델리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평소보다 더욱 낮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저러다 실라 죽어.”

이미 피를 많이 흘렸다. 숲속의 찬 공기도 실라의 생명을 빠르게 앗아갈 것이다.

시간이 없었다.

“난 실라를 들지도 못해. 여기서 실라를 데리고 산에서 내려갈 수 있는 사람은 오빠뿐이야.”

게다가 괴한은 고작 둘뿐이었다.

‘두 명이면 나 혼자서도 가뿐해.’

에이블화이트의 용병이나, 기사들처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것 같지도 않았다.

‘아마 오빠도 눈치챘을 거야.’

저 정도면 내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지만 오빠이기 때문에 쉽사리 돌아서지 못하는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데릭에게 아델리아는 검술 천재가 아닌, 그저 어린 여동생일 뿐이니까.

데릭이 여전히 대답하지 못하자, 아델리아가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오빠, 실라도 실라지만 카를리나 상태도 좋지 못해. 우리 둘이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

하아……. 데릭이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말했다.

“다치면 혼날 줄 알아.”

“절대 안 다쳐.”

그리고 고집 피워서 미안해, 오빠…….

데릭은 어쩔 수 없이 카를리나와 실라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괴한 중 하나가 검을 뽑아 들며 데릭의 앞을 막아섰다.

“우리가 순순히 보내 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

순간, 데릭이 다리를 높이 들고 괴한의 급소를 걷어찼다.

“어어억!!”

괴한이 괴성을 지르며 그의 발길질 한 번에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데릭이 어금니를 악물며 말했다.

“기분 안 좋으니까 걸리적거리지 마.”

데릭은 평소 다정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거칠기 그지없는 기운을 쏟아 내고 있었다.

“카를리나, 걸을 수 있겠어?”

그러자 카를리나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실라를 업을 테니 넌 내 팔을 잡고 따라와.”

끄덕거리는 카를리나를 확인하고 데릭은 실라를 건네받아 등에 업었다.

그러자 바닥에 쓰러져 있던 괴한이 소리쳤다.

“이봐! 멍청하게 그러고 있을 거야?! 잡아! 놓치지 마!”

“아, 어, 어! 그, 그래야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던 괴한이 검을 뽑았다.

데릭은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카를리나 역시 최선을 다해 그의 걸음을 쫓았다.

세 사람이 아델리아를 스쳐 지나가고 아델리아가 괴한들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데릭을 쫓던 두 명의 괴한이 걸음을 멈추고 주춤거렸다.

“어……? 저 꼬맹이가 검을 들고 있었던가?”

괴한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다른 괴한이 뒤를 돌아보았다.

나무 기둥에 꽂혀 있던 검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나무에 꽂혀 있던 검 같은데?”

언제 그걸 다시 빼 간 거야?

아델리아는 혼란스러워하는 괴한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누가 시켰어?”

아델리아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졌다.

아무런 감정도, 흔들림도 없이. 곧지만 날카롭고, 거칠지만 차분했다.

“둘 중에 하나만 살려 줄게.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먼저 부는 쪽이 사는 거야. 어때? 제법 괜찮은 제안이지?”

아델리아는 다리 쪽으로 오러를 흘려보냈다. 근육이 한층 단단해진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자, 누구부터 맞을래?”

엉?!

까가각—! 아델리아가 성검으로 단단한 흙길 위를 긁으며 빠르게 튀어 나갔다.

검과 흙바닥 사이사이에 박힌 바위들이 마찰하며 검 끝에선 불꽃이 튀었다.

[으갸갸갸갹—!]

리그하르트가 고통스러워했다.

아! 진짜! 이런 것 좀 하지 마시라니까!

리그하르트가 날이 상하면 어쩔 거냐고 투덜거렸지만, 이미 아델리아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아델리아의 눈이 돌아도 한참은 돌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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