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01)화 (101/161)

101화

괴한들을 향해 몸을 날리던 그 순간, 아델리아는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급히 몸을 틀었다.

“커억!”

아니나 다를까, 아델리아가 몸을 피하자마자 날아온 화살이 괴한 중 하나의 어깨를 명중시켰다.

데릭과 카를리나가 내려갔던 산길 쪽에서 날아온 화살이었다.

‘뭐지?! 누구지?’

놀란 아델리아가 커다란 나무 기둥 뒤로 몸을 숨기자, 다시 화살이 날아왔다.

“끄아아악!”

이번에는 또 다른 괴한의 다리를 맞혔다.

두 괴한이 순식간에 흙바닥 위로 고꾸라져 꿈틀거렸다.

으악! 내 다리! 내 어깨! 바닥에서 버둥거리는 괴한들의 비명이 숲속을 울렸다.

그리고 산책길을 따라 올라온 누군가가 말했다.

“끌고 가.”

“예, 전하.”

전하?

전하라는 소리에 아델리아가 기둥 뒤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어? 진짜 전하네!’

그 옆으로 괴한들을 처리하기 위해 뛰어가던 아스틴과 루드도 보였다.

“전하!”

“…….”

아델리아는 반가운 마음에 폴짝 뛰어나와 그에게로 달려갔다.

“전하께서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올라오는 길에 에스테르 경을 만났어.”

카르세스는 산에서 내려오던 데릭과 마주쳤다.

-전하, 그러니까 전하께서 이 하녀를 좀 데리고 돌아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는 아델리아에게 가 봐야 합니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데릭의 등에 업힌 하녀와 그의 팔을 붙들고 덜덜 떨고 있는 카를리나를 시선으로 훑었다.

-경, 위급해 보이는군.

-예, 전하. 그러니 전하께서…….

-어서 내려가 보는 게 좋겠어, 경.

-……예?

-에스테르 영애에게는 내가 가지.

-저, 전하!

-서둘러, 에스테르 경.

-…….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은 잘 아는 사람에게 맡기고, 카르세스는 산 위에서 괴한들과 대치 중이라는 아델리아에게로 향했다.

아델리아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물었다.

“여길 오고 계셨다고요?”

카르세스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동네 토박이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장소라고 그랬는데……?

‘아. 전하께서도 스테이크 노점상에 가셨나 봐!’

그때, 괴한을 처리하러 뛰어갔던 아스틴이 돌아와 말했다.

“전하, 모두 묶었습니다. 황궁으로 이송하겠습니다.”

“수고했다.”

그러다 아스틴과 아델리아의 눈이 마주쳤다.

아델리아는 아스틴이 등에 메고 있는 활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절 맞히려고 한 건 아니죠?”

그러자 아스틴이 망설임 없이 곧장 대답했다.

“절대 아닙니다.”

“…….”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다.

아델리아가 갸름한 눈으로 가만히 쳐다보자, 아스틴이 변명하듯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보다 조금은 작아진 목소리였다.

“……아닙니다. 정말.”

“알겠어요. 믿어 드릴게요.”

아델리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사실, 기척에 놀라 몸을 피한 건 맞지만 화살이 날아오는 궤적을 떠올려 보면 자신을 맞히려던 의도가 없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스틴은 명사수잖아요!]

‘그랬지.’

아스틴이 쏜 화살은 단 한 번도 목표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래도 괜히 골려 주고 싶었어.’

아델리아가 속으로 키득거리며 카르세스를 쳐다보았다.

“전하, 저 괴한들은 심문이 꼭 필요합니다. 로즈힐 후작가를 노린 건지, 단순히 카를리나를 노린 건지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델리아의 말에 카르세스가 대답 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저렇게 보시는 거야……?’

아델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카르세스가 입을 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

“네?”

“이번에도 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겠지.”

“…….”

어엄……. 아델리아는 어쩐지 혼나는 기분이 들어 그의 시선을 슬며시 피했다.

“들으셨겠지만, 이번엔 정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 그랬겠지.”

카르세스가 몸을 돌렸다.

“내려간다.”

“예, 전하.”

아델리아도 카르세스를 따라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카르세스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평소에도 생각이 많은 얼굴이긴 했지만, 오늘은 조금 더 심했다.

‘어쩐지……. 무섭다.’

[왜 저러는 걸까요?]

‘또 내가 전하를 화나게 했나 봐.’

아델리아는 괜히 시무룩해졌다. 평소처럼 말을 건네기도 난처한 상황이라, 그저 묵묵히 카르세스를 따라갔다.

카르세스는 마차 안에서도, 마차가 공작가에 도착한 뒤에도 말이 없었다.

그러다 마차에서 내린 카르세스가 자연스레 공작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델리아가 어리둥절해하며 그의 뒤를 쫓았다.

“전하? 저희 집으로 가시는 거예요?”

“응.”

아델리아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왜, 왜요? 지금 아버지는 안 계실 텐데요?!”

황궁의 연회 때문에 늦게 오실 거라며, 아델리아가 말을 덧붙였지만 카르세스는 대꾸 없이 저택으로 향했다.

***

황궁, 황제의 집무실.

귀족들과 짧게 인사를 나누고 집무실로 들어온 황제가 피로한 눈꺼풀을 비비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뒤따라 들어온 테오스를 향해 말했다.

“그래, 이제 말해 봐. 왜 황태자비 후보의 발표를 막았는지.”

“……아이의 의견을 듣지 않았습니다.”

“테오스. 그냥 솔직히 말해. 자네가 내키지 않았다고.”

“…….”

황제는 오늘, 황태자비 후보를 발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연회장으로 가기 직전, 후보 명단에 아델리아의 이름을 올리려다 테오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시간이 촉박하여 어쩔 수 없이 연회장으로 향했지만, 황제는 그 일로 무척이나 심기가 불편해진 상태였다.

“테오스, 난 그 아이가 아주 마음에 들어. 물론, 정치적인 이유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난 그 아이가 그저 에스테르라서 마음에 들어 하는 게 아니야. 난 아델리아의 선한 기운이 좋네. 남 눈치 보지 않고 제 생각을 쏟아 내는 것도 마음에 들고.”

무엇보다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황궁 안에서 버텨 낼 강한 사람이 필요했다. 황후였던 카르세스의 친모처럼 쉽사리 떠나 버릴 그런 사람 말고…….

“카르세스의 곁에는 아델리아 같은 아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

설득에 가까운 황제의 말에도 테오스는 눈만 깜빡일 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답답해진 황제가 다그치듯 물었다.

“테오스, 무슨 말이라도 해 보란 말이야.”

“저는 제 딸아이를…….”

테오스가 하던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평생 제 곁에 둘까 합니다.”

“……뭐?”

황제가 황당하다는 듯 눈을 감고 찌푸린 미간을 문질렀다.

“아니, 테오스.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보통의 부모라면 아이가 무탈하게 자라 화목한 가정을 꾸리길 바라는 게 당연할…….”

그러다 황제가 불현듯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테오스. 설마…….”

황제의 흔들리는 눈빛이 테오스의 얼굴로 향했다.

“설마 아델리아에게, ……오러가 발현된 것인가? 아니지?! 그런 게 아니지?!”

황제가 의자의 손잡이를 움켜잡으며 재차 물었다. 그러나 테오스는 대답 대신 시선을 아래로 내릴 뿐이었다.

그것으로 대답이 되었던 것인지, 황제는 이마를 짚으며 등받이에 무너지듯 몸을 기대었다.

“그래. 그래서……, 그래서 거절했던 거군.”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황제가 테오스를 쳐다보지 못하고 말했다.

“나가 봐도 좋아……. 내, 그대의 뜻을 받아들일 테니…….”

“감사합니다, 폐하.”

테오스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세우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소란스럽지 않게 고용인들까지 모두 물리자, 공작저의 응접실에는 난데없이 적막이 찾아왔다.

아델리아가 적막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전하.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그러나 카르세스는 팔짱을 끼고 소파에 기댄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체 몇 시간 째야…….’

카를리나와 실라를 데리고 간 데릭도 돌아오지 않아, 더더욱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때마침 테오스가 돌아왔다.

“아빠!”

아델리아가 반가운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테오스는 응접실로 들어서며 아델리아와 카르세스를 차례로 살폈다.

무슨 상황인지 가늠하려는 듯, 붉은색의 눈동자가 오늘따라 매서웠다.

테오스는 미간을 구긴 채 소파로 걸어가 아델리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늦은 시각에 어쩐 일이십니까.”

테오스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까지 황궁에서 황제에게 시달리고 온 터라, 황제의 아들과 자신의 딸아이가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테오스의 물음에 카르세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습니다.”

할 이야기? 아델리아가 동그란 눈으로 카르세스를 쳐다보았다.

‘무슨 이야기지? 역시, 산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시는 걸까?’

테오스가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에스테르 공작.”

“예, 전하.”

“에스테르 영애가 오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

테오스가 무표정으로 카르세스를 응시했고, 아델리아는 다급한 목소리로 카르세스를 불렀다.

“저, 전하!”

그러나 카르세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성검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쩌억— 놀란 아델리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아니, 전하께서 대체 왜 저러시는 거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