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조심해서 가세요, 전하.”
카르세스는 공작저를 나와 마차 앞에 섰다. 그리고 배웅을 위해 따라 나온 아델리아를 향해 말했다.
“답답하더라도 조금만 참아.”
다정한 카르세스의 음성에 아델리아가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 응접실에서 보여 주었던 단호한 모습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절 위해서라는 걸 아니까 참을게요.”
아델리아도 그동안 자신이 무리하게 움직였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적지 않은 것을 손에 쥐게 되었으니 후회는 없다.
단지…….
쫓겨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입안이 썼다.
‘괜찮아.’
아델리아는 시선을 내리며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어쩔 수 없는 거야. 아무도 내가 이러는 이유를 모르니까, 다들 불안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지.’
이해해. 이해할 수 있어.
“전하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휴가를 얻은 기분이에요.”
“영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참에 열심히 배워 볼게요. 교양 수업도, 자수도, 피아노도.”
“…….”
“누가 알아요? 다음번에 만나면 전하께서 깜짝 놀랄 정도로 제가 변해 있을지?”
아델리아가 싱긋 웃어 보였다.
어쩌면 디크레드로 가는 이 상황이 오히려 더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공작저에서는 제약이 많았다. 공작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빠져나가는 것도 한계가 있었던 까닭이다.
‘이제 전쟁 준비 때문에 아빠랑 오빠도 공작저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아질 거야.’
게다가 황태자의 말대로 악시덤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공작저에 머무는 것은 좋은 방안이 아니었다.
‘그래, ……거리상으로 수도와 멀리 떨어져 있고 폐쇄적인 디크레드 영지가 나아.’
광산 사업도 큰 틀은 잡혔으니 카를리나와는 서신을 통해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될 것이다.
“디크레드 영지는 폐쇄적이기 때문에 숙부나 숙부 사람들이 들어가기 힘들 거야. 일전의 일도 있으니, 영주도 더더욱 경계하겠지.”
그러니까, 그곳이 그대에게는 가장 안전할 거야.
카르세스의 말이 이어지자 아델리아가 시선을 들었다.
“……서운할 거라는 건 알아.”
카르세스가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차분하게 가라앉은 보라색 눈동자가 아델리아를 곧게 응시했다.
“난, 영애가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카르세스의 목소리에 진심이 잔뜩 묻어났다.
“내 사람을, ……허무하게 잃고 싶지는 않거든.”
카르세스의 눈매가 슬며시 휘었다. 아델리아의 눈이 설핏 흔들렸다.
***
두 아이가 인사를 나누는 사이, 테오스는 창가에 서서 아델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내야 하긴 했다.’
신전에서 악시덤과 아델리아가 마주친 일도 그렇고, 티파티에서 돌아오던 아델리아가 기습당한 일도 그렇고.
경고를 해 두긴 했지만, 악시덤은 애초에 경고 정도로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
황태자의 입으로 악시덤의 이야기를 듣게 되니 애써 외면하고 있던 그 위험이 피부로 느껴졌다.
‘디크레드 영지라…….’
보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평생 곁에 두겠다는 욕심을 또 부렸다.
‘그렇게 그 사람을 잃어 놓고서도.’
아델리아의 친모, 이레네아는 성년식을 치르기 전에 오러가 발현되었다.
언젠가 아델리아에게 같은 증상의 사람을 안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이레네아였다.
‘증상이 완전히 같지는 않았지만…….’
성년식을 앞두고 오러가 발현된 이레네아와는 달리, 아델리아는 태어나면서부터 오러를 가지고 있었다.
이레네아는 목숨을 잃고 말았지만, 아델리아마저 그리 보낼 수는 없었다.
테오스는 아델리아를 살리기 위해 신전을 찾았다.
대신관은 마탑주와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다른 이들은 그들을 두고 현자라고도 불렀다.
테오스는 신을 믿지 않았으나, 그들의 지혜는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상, 다른 방도도 없었다.
그날, 만나게 된 대신관 엔리마엘이 말했다.
-방법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타인의 오러를 가두는 것은 꽤나 위험한 일이지요. 금제를 거는 입장에서 말입니다.
-사설은 필요 없습니다. 알려만 주시죠.
엔리마엘은 어쩔 수 없이 금제를 걸기 위한 봉인 주문을 알려 주었다.
-일시적으로 한두 번 사용하는 것은 괜찮습니다만, 지속적으로 그 봉인 주문을 사용하게 된다면……. 서서히 시력을 잃게 되실 겁니다.
-상관없습니다.
봉인 주문에는 엄청난 양의 오러가 필요했다.
테오스는 아델리아의 오러를 가두기 위해 자신의 오러를 한계까지 쏟아 내고 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피로한 삶이었다.
그러나, 테오스는 신에게 처음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딸아이보다 강한 오러를 주어서 고맙다고, 덕분에 아이의 목숨을 살릴 수 있게 되었다고.
‘헛된 일이 아니었다. 아델리아가 저토록 건강해져서 스스로 오러를 제어하는 걸 보면…….’
덕분에 더는 주문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테오스가 창밖으로 향했던 시선을 내려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옅은 안개가 앞을 가로막은 듯, 펼친 손바닥의 형태는 흐릿하기만 했다.
‘되었다. 더 이상 악화되지 않을 테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테오스가 손바닥을 움켜쥐며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
건국제 마지막 날 아침.
축제의 마지막을 즐기느라 정신이 없는 다른 이들과 달리, 공작저는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렐리, 그만 울어.”
“저도 갈래요……. 저도 세라 언니랑 같이 아가씨 따라갈래요!”
하녀 렐리가 아델리아의 짐가방을 꾸리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디크레드 영지로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공작저 사람들은 아델리아가 기약 없이 떠난다는 사실에 조금은 침울해 있었다.
“금방 돌아올 거야.”
“아가씨…….”
아델리아는 렐리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달래 주었다.
그러기를 잠시. 아델리아의 방으로 집사 일렌드가 찾아왔다.
“아가씨.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응접실로 내려온 아델리아가 잠깐 놀란 눈을 했다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또 왜 오셨어요?”
그러자 카르세스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웃었다.
“이야기 들었어. 로즈힐 영애가 다시 사업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고.”
“네, 카를리나는 강한 사람이거든요. 겁먹고 숨기보다 당당히 나서서 배후가 누군지 찾는 게 더 성미에 맞을 거예요.”
데릭에게 업혀 갔던 실라는 아직 완벽하게 회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카를리나는 곧장 사업장에 나타나 밀린 업무를 해치우고 있었다.
“카를리나 이야기를 하러 오신 거예요?”
“아니.”
“그럼요? 황태자 전하께서 이렇게 마음대로 황궁 밖에 나오셔도 되는 거예요?”
“황궁 안에는 대타가 있어. 완벽하지는 않지만, 제법 내 행세를 해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 그렇구나. 아델리아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말을 이어 갔다.
“나가지.”
“……어딜요?”
“내가 영애의 축제를 망친 것 같아서.”
“그래서요?”
“오늘이 축제 마지막 날이니까. 함께 구경하러 가자는 말을 하려고 왔어.”
허. 아델리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게도, 저는 바쁘답니다. 누구 덕분에 계획에도 없는 여행을 가게 생겨서요.”
아델리아가 팔짱을 끼며 몸을 홱 돌렸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하하,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곧 떠나잖아.”
“네, 전하 덕분에요.”
아델리아가 토라진 듯 입술을 삐죽이자, 카르세스가 한결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그에 아델리아의 고개가 다시 카르세스를 향했다.
‘뭐야……. 갑자기…….’
카르세스가 조금은 미안해하길 바라고 토라진 척하긴 했지만, 정말 사과할 줄은 몰랐다.
‘사실, 전하께서 잘못한 건 아니니까.’
그런데 막상 사과받으니 괜히 민망해졌다.
“왜 사과하세요……? 평소처럼 그냥 뻔뻔하게 웃어넘기시지.”
그러자 카르세스가 다시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선물을 주고 싶어서 그래. 에스테르 경에게 들었어. 폭죽 구경도 못 했다며.”
아델리아가 카르세스를 곁눈으로 슬쩍 흘기면서 중얼거렸다.
“병 주고 약 주시네.”
“그래, 그러니까 함께 가. 나도 보고 싶어졌거든.”
카르세스가 재차 부탁하자, 아델리아는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정 그렇게 원하신다니까…….”
아델리아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내리며 몸을 돌렸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얼른 준비하고 내려올게요!”
“천천히 와.”
“싫어요! 빨리 올 거예요!”
아델리아가 소리치며 계단을 훌쩍훌쩍 뛰어올랐다.
뒤에서 카르세스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아델리아의 입가에도 슬며시 미소가 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