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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04)화 (104/161)

104화

수도 광장은 축제의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더욱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까딱하면 휩쓸려 가겠어.”

아델리아가 남청색 후드를 눌러쓰며 중얼거렸다.

“붙어 있어. 잃어버릴라.”

푸흐. 카르세스의 말에 아델리아가 웃었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물었다.

“왜 웃어?”

“저희 오빠도 똑같은 소릴 했거든요. 갑자기 오빠가 떠올라서요.”

헤헤, 아델리아가 웃으며 앞서가기 시작했다.

카르세스도 아델리아를 따라 걸었다.

카르세스를 따라왔던 루드와 아스틴은 두 사람과 일정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축제 행렬이에요, 누님!]

덩달아 신이 난 리그하르트가 외쳤다.

그러고 보니 건국제 마지막 날에나 볼 수 있다는 그 행렬이었다.

‘굉장히 화려하네.’

마차를 꾸며 놓은 꽃과 각종 장식, 마차 위에 올라서서 손을 흔드는 사람들 역시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었다.

마차의 가장 앞에 선 아이들이 바구니에서 꺼낸 꽃가루를 열심히 뿌렸다.

꽃가루가 사람들의 머리 위로 흩어졌다.

아델리아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와……. 너무 예쁘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로 알록달록한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춤을 추듯 흩날렸다.

그때, 처음으로 못 이기는 척 따라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높고 청명한 수도의 가을 하늘은 볼 수 없겠지…….’

그러니까 많이 봐 두자.

‘그리울 때마다 떠올릴 수 있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아델리아의 눈동자가 아련해졌다.

그때.

[하늘이 다 같은 하늘이죠.]

뭐, 수도 하늘은 색깔이 다른가?

‘…….’

심드렁한 리그하르트의 음성이 툭 날아들었다.

아델리아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대꾸했다.

‘릭. ……내 감상을 방해하지 마.’

이 누님께서 마음의 평정을 찾고 있는 거 안 보여?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팽, 코웃음을 쳤다.

[아니, 뭐 엄청난 곳으로 유배 가는 사람처럼 그러시니까.]

‘…….’

[거기서 또 평생 있을 것도 아니잖아요?]

‘…….’

하여튼 분위기 깨는 데는 뭐 있다니까.

‘맞는 말이긴 한데, 이상하게 열받네?’

아델리아는 시선을 내려 카르세스를 찾았다.

그러자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카르세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카르세스 역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잠깐 바라보던 아델리아가 옅게 미소 지었다.

‘한동안 전하도 못 보겠지?’

카르세스 성격상 찾아와 줄 리도 없고, 디크레드 영지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조처를 할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검술 훈련을 조금 더 자주 할걸.’

아델리아는 아쉬워했다.

꽃가루를 머금은 바람이 카르세스의 망토를 흔들고 지나갔다.

후드에 가려져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아델리아는 카르세스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덕분에 바람 쐬고 하니까 기분이 한결 좋아졌어.’

[저도요, 누님!]

이렇게 나와 돌아다니다 보니 어지러웠던 마음과 생각들이 갈무리되는 것 같았다.

그때, 리그하르트가 난데없이 소리쳤다.

[누님! 광장 분수 옆에 거울이 있어요! 저게 그 거울인가 봐요! 마탑에서 가져왔다던!]

‘아, 오래된 거울?’

진실된 모습을 보여 준다나, 뭐라나.

네네! 리그하르트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구경 가요! 네? 누님! 저 궁금해요! 보고 싶다고요! 네?!]

가요! 가요!

아으, 시끄러워.

리그하르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광광 울리자, 아델리아가 미간을 슬쩍 구겼다.

“왜 그래, 영애?”

어느새 다가온 카르세스가 아델리아에게 물었다.

“아니에요. 이제 인형 뽑기 하러 갈래요!”

[예? 뽑기라뇨? 그런 유치한 거 말고! 아! 누님! 거울! 거울요!]

‘그게 더 유치하고 재미없거든?’

보나 마나 다 상술이지. 진실을 보여 주는 거울이 뭐야. 유치하긴.

[난 보고 싶은데?! 난 재밌을 거 같은데?!]

리그하르트가 어린아이처럼 떼를 썼다. 그러나 아델리아는 그런 리그하르트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하필 인형 뽑기 노점상이 분수대 건너편에 있었다.

의도하지 않게 분수대를 지나치게 되었는데, 마탑에서 가지고 왔다는 거울을 지나가야만 했다.

“와……. 뭐가 저렇게 커?”

아델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말했다.

[우왁!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더 큰 거 같아요!]

‘그러게 말이야.’

아델리아는 군중 사이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솟아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검은 목재로 만든 테두리에는 황금색 잉크로 문자들이 그려져 있었다.

‘뭐라고 적힌 거야?’

[글쎄요. 저도 못 알아보는 걸 보니, 엄청난 악필인 거 같아요.]

단순히 오래된 거울일 거라 생각했는데, 위압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거울 주위로는 붉은색의 밧줄로 임시 결계가 둘려 있었다. 사람들의 접근을 막으려는 의도로 보였다.

‘항상 보는 거울인데 뭐가 그리 궁금하다고.’

실상, 처음에 관심을 보이던 사람들도 다른 거울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자 흥미를 잃고 자리를 떠났다.

거울 앞이 휑하게 비었다.

“아, 사람들 참. 역사 설명만 하려고 하면 다 도망가네.”

거울의 유구한 역사를 설명하려던 마법사도 이내 열정을 잃고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

‘좀 가엽기도 하고.’

아델리아가 카르세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쪽 거울 조금만 구경하고 올게요.”

아델리아는 느긋하게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걸어오던 카르세스를 향해 말했다.

“그러든지.”

카르세스의 대답에 아델리아는 거울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자, 거의 다 왔어. 좋냐? 실컷 봐 둬. 그렇게 궁금해했으니까.’

[으헤헤헤. 고맙습…….]

맑게 웃던 리그하르트의 목소리가 난데없이 흔들렸다.

[어……? 누, 누님?]

그에 아델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응? 왜 그래?’

[저, 거울, 거, 거울에…….]

거울이 왜? 뭣 때문에 말까지 더듬어?

아델리아가 의아하다는 듯 몇 걸음 앞에 놓여 있는 거울을 쳐다보았다.

‘어……?’

아델리아 역시 놀라 걸음을 퍼뜩 멈춰 세웠다. 리그하르트가 흥분한 듯 소리쳤다.

[누님……! 저거 누님이에요!]

‘…….’

리그하르트의 목소리에 아델리아의 붉은 눈동자도 거칠게 흔들렸다.

‘허!’

아델리아가 탄식하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응시했다.

마탑의 거울은 모든 것을 그대로 비추었다.

타인에게 관심 없다는 듯 바쁘게 움직이는 인파, 그리고 그 인파 사이에 멀뚱히 선 아델리아까지.

거울에 제 모습이 비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거울 속 아델리아였다.

시야로 들어온 것은 회귀 전, 성검의 주인이자 제국의 영웅이었던 그 아델리아였다.

거울 속 아델리아는 푸른색의 황실 기사단 제복을 빼입고, 한 손에는 기다랗고 날렵한 은빛의 성검을 쥐고 우뚝 서 있었다.

높게 묶은 은발이 처연하게 흔들렸고 생기를 잃은 붉은 눈동자가 아델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게, 뭐야……?’

[누, 누님!]

아델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때, 의자에 앉아 있던 마법사가 아델리아를 발견하고 반갑게 몸을 일으켰다.

마법사는 다정하게 웃으며 아델리아를 향해 손짓했다.

“꼬마야. 거울 구경 온 거야? 잘 왔어! 이리 가까이 와 봐! 내가 기막히게 설명을 해 줄……. 어?! 꼬, 꼬마야?!”

그러나 아델리아는 마법사가 말을 걸기 무섭게 몸을 급히 돌려 달아났다.

어째서인지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님!]

‘저게, 대체…….’

헉, 헉, 헉. 아델리아가 인파 사이를 거칠게 파고들었다. 오로지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걸음이 빨라졌다. 그때, 누군가가 아델리아의 팔을 붙들었다.

“영애!”

“허억!”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놀란 얼굴의 카르세스였다.

“아, 저, 전하……. 그게, 거, 거울이…….”

“거울?”

그러자 카르세스가 거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바람에 거울의 윗부분만이 겨우 보였다.

“거울이 왜?”

카르세스가 다시 아델리아를 쳐다보았다.

아델리아의 낯빛이 새파랬다. 무척 놀란 것 같기도 하고, 굉장히 두려운 것을 본 것 같기도 했다.

잡은 손목도 어쩐지 떨리는 것 같았다.

“일단 자리를 옮기지.”

“…….”

아델리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타고 왔던 마차로 이동했다.

같은 시각, 광장 분수대 옆.

“아, 뭐야. 설명해 주려고 했는데 왜 도망을 가?”

내 얼굴이 그렇게 아주 혐오스러운 정돈 아닌데?

밀튼이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비춰 보았다.

그때.

“……저 아이.”

“예?”

거울 뒤편에 있던 휴시안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쟤 뭐야?”

“뭐가요, 휴시안 님?”

밀튼이 휴시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저 많은 인파 속에서 누굴 지칭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쟤? 쟤 누구요?”

설명을 좀 더 친절하게 해 주시면 안 되는 거예요?

“…….”

밀튼의 투덜거리는 소리에도 휴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인파 사이를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이었다.

‘어린아이.’

분명 아이였는데, 인파 속으로 사라지기 전 거울에 비친 모습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휴시안이 거울을 돌아보며 옅게 웃었다.

“……이거, 엄청난 걸 봐 버렸네.”

“예?”

또 혼잣말 시작이야? 밀튼이 미간을 잔뜩 구긴 채 말했다.

“거기서 그러지 마시고, 이제 거울 철거해야 하니 이리 와서 철거하는 거나 도와주세요.”

크기도 크기지만 무게도 엄청나서 혼자만의 마력으로는 어림없다고, 밀튼이 구시렁거렸다.

“뭐 하세요? 빨리 오시지 않…….”

휴시안이 대답하지 않자, 밀튼이 몸을 돌렸다.

‘허……!’

없다.

방금까지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멍하니 서 있던 마탑주가 없어!

“와! 휴시안 님?! 설마, 갔다고? 진짜 그냥 가 버렸다고? 이대로 혼자? 나더러 이 거울을 혼자 치우라고?!”

야이! 마탑주 같은! 이 휴시안 같은!!

하여튼 이 못돼먹은 놈!

밀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욕을 퍼부었다. 물론, 속으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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