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축제 현장에서 조금 벗어난 마차는 한적한 장소에서 잠시 멈췄다.
“괜찮나?”
“……네.”
아델리아는 카르세스가 건넨 우유 잔을 받았다.
“이런 것밖에 팔지 않더군.”
“괜찮아요. 저 우유 좋아해요. 고맙습니다, 전하.”
나무를 깎아 만든 잔 안에는 뽀얀 우유가 가득 들어 있었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 전체를 데워 주었다.
“그래, 무슨 일이었길래 그래?”
“…….”
아델리아는 카르세스의 말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사람의 진실된 모습을 비춰 주는 거울이래요.
세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신이 사람으로 둔갑한 악마들을 구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그 사람의 진실된 모습을 보여 주는 거울이라고.
그런데.
‘왜 그 거울 속의 난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걸까……?’
성검의 주인, 제국의 영웅, 황제의 개, 전장 위의 학살자.
수천, 수만의 목숨을 우습게 빼앗던 살인귀.
‘그게 내 진실이라서?’
[누님…….]
‘잊고 있었던 건 사실이야.’
과거에는 일찍 죽어 버렸던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그들과 새로운 추억을 쌓고 있다는 기쁨에.
과거의 그 끔찍한 외로움을 잠시 잊고 있었다.
‘조금 충격적이긴 해……. 그 거울이 정말 진실을 비춘다면, 그 모습이 나라는 거잖아.’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릭……. 난 아직도 과거에 있는 걸까.’
전장의 비명, 역하디역한 피비린내, 허무한 죽음과 깊은 절망, 끝없는 좌절과 반복되는 시련.
난 아직도 그 한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한 걸까.
우유 잔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아델리아에게 카르세스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영애.”
“아, ……네?”
카르세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어.”
“아.”
카르세스의 질문에 아델리아는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 버렸거든요.”
“위험한 사람이었나.”
“아뇨. 위험한 건 아닌데.”
아델리아가 옅게 웃었다.
“제가 그 사람을 아껴 주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아직도 이렇게 보기 싫은 건가 봐요.”
“…….”
스스로를 아껴 주지 못했고 사랑해 주지 못했던 과거가 함께 떠올랐다. 입안이 쓰고 속이 울렁거렸다.
‘이것 봐……. 이래서 최대한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과거의 암울한 감정이 너무도 강했던 탓인지, 조금만 여유를 부리면 그 감정에 잠식되고는 했다.
그래서 더욱 바쁘고 정신없이 몸을 움직였던 것도 있다.
아델리아의 눈빛이 다시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때.
퐁당.
우유 속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놀란 아델리아가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카르세스가 무심한 표정으로 포장지를 벗기며 내용물을 우유 안으로 또 넣었다.
퐁당.
“루드가 가지고 온 거니까 안심하고 먹어도 돼.”
먹어? 아델리아가 다시 우유 잔을 내려다보니, 새하얗던 우유는 어느새 짙은 갈색빛을 띠고 있었다.
고소한 우유 향에 달콤한 향이 더해졌다.
“초콜릿이네요?”
“응. 루드 가문이 초콜릿의 원산지랑 독점 계약 중이거든. 품질이 좋아. 믿고 먹어도 돼.”
카르세스는 우유 안에 동전 크기만 한 초콜릿을 두어 개 더 넣어 주며 말을 이어 갔다.
“원래 공작저에 도착하면 주려고 했는데, 우유를 보니까 생각났어.”
따뜻한 우유에 녹여 먹는 방법을 루드에게 들은 기억이 있다며 말을 덧붙였다.
‘아, 주고 싶다던 선물이 이거였나 봐.’
아델리아가 바라보고만 있자 카르세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그랬지. 단 걸 먹으면 고민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그러자 아델리아가 눈썹을 끌어 올렸다.
“그걸 기억하세요?”
“기억해. 그러니까 마셔 봐. 도움이 될지 모르잖아.”
카르세스가 눈짓으로 우유 잔을 가리켰다.
아델리아가 천천히 우유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달콤한 향기가 코끝에서부터 느껴졌다.
호롭. 생각보다 더 달콤했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초콜릿의 맛과 향기가 입안을 맴돌다 꿀꺽 넘어갔다.
몸속이 따뜻해졌다.
아델리아는 우유 잔을 양손으로 꼭 붙잡으며 옅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전하.”
더 캐묻지 않아서 고마웠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라든가,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아델리아를 위해 초콜릿을 준비해 온 그의 배려도 고마웠다.
“푸딩이 아니라서 아쉽진 않아?”
카르세스가 물었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것 같았다.
그의 질문에 아델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푸딩이 가장 좋지만, 초콜릿도 좋아해요.”
그러자 카르세스가 물었다.
“푸딩은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건데?”
식감? 아니면, 그저 달아서?
음, 아델리아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오빠가 사 준 디저트였거든요.”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푸딩은 데릭이 마지막으로 사 준 디저트였다.
-빨리 돌아올게. 식사 거르지 말고, 걱정도 하지 말고. 오빠가 다 처리할게. 알겠지, 아델?
테오스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고, 데릭은 급하게 떠날 채비를 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혼자 남아 있을 아델리아가 걱정되었던 것인지, 데릭은 새벽 밤길을 달려 푸딩 가게로 갔다.
푸딩 가게의 사장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그 늦은 시각에도 푸딩을 잔뜩 구해 왔었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해. 그 새벽에 푸딩을 어떻게 구해 온 거야?’
아델리아는 데릭을 떠올리며 속으로 웃었다.
어쨌든, 당시의 아델리아는 그 푸딩을 먹으며 오빠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는 걸 상상하지도 못한 채.
‘아껴 먹다가 결국 마지막 푸딩은 상해서 버렸었지.’
그 뒤로 푸딩만 보면 데릭이 떠올랐다.
그러나 성검의 선택을 받고,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게 되면서 더는 먹지 못했다.
특히, 악시덤은 아델리아가 품위 없는 행동을 하지 않길 바랐다.
‘푸딩 먹는 게 왜 품위 없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아델리아의 짧은 설명에 카르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람마다 그런 음식이 하나쯤은 있지.”
“전하께서도 있어요? 그런 음식?”
“있어.”
“정말요? 그게 뭔데요?”
마차 안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그러자 달콤한 초콜릿 향을 가득 실은 마차가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건국제가 모두 끝이 나고,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으로 빠르게 복귀했다.
“아가씨. 이 옷도 들고 가실 거죠?”
세라가 연노란색 드레스를 들어 올리자, 아델리아가 손을 내저었다.
“응? 아니, 아니. 디크레드는 추워서 두꺼운 드레스만 들고 갈 거야. 그건 빼놔.”
그러자 세라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아까워라. 이 드레스 정말 잘 어울리셨는데……. 다녀오면 작아서 더는 못 입으시겠죠?”
“어쩔 수 없지, 뭐.”
아델리아는 마지막 짐가방을 꾸리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사이 아델리아는 로즈힐 후작가를 찾아가 실라와 카를리나의 상태를 확인하고 펠슨이 만든 약을 전해 주었다.
-고마워요, 아델리아. 그때 아델리아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침대에서 아직 일어나지 못하는 실라가 떠올랐는지, 카를리나의 표정은 몹시도 가라앉아 있었다.
-아델리아. 나더러 ‘인질’이라고 했어요. 나를 빌미로 무언가를 얻을 작정이었던 것 같은데, 그걸 알아내야 해요.
-걱정하지 마요.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데려갔으니 꼭 배후에 숨은 사람을 찾아낼 거예요.
아델리아는 카를리나를 안심시키고 돌아왔다.
그리고 찾아온 에스테르 공작저에서의 마지막 밤.
똑똑—. 마지막으로 짐가방을 점검하던 아델리아의 방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누구야? 들어와!”
아델리아는 정리가 끝난 가방을 한편으로 밀어 놓으며 말했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테오스가 들어왔다.
“바쁜 모양이구나.”
“어? 아빠?”
아델리아가 테오스에게로 걸어갔다.
“어쩐 일이세요?”
“…….”
잠시 고민하던 그가 조금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생일을 디크레드 영지에서 보내겠다 싶어서.”
“아……. 그러네요?”
잊고 있었다. 지난 삶에서도 생일을 챙겨 본 기억이 없다 보니.
“가지고 싶은 것은 없느냐?”
“에이, 이미 받았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넬로체 백작의 광산요.”
“그것 말고는.”
“없어요.”
아델리아가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그러나 테오스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서운했느냐.”
“…….”
테오스의 말에 아델리아가 눈썹을 들썩였다.
‘아, 저 서운했냐는 질문은 생일이 아니라…….’
디크레드 영지로 보내겠다는 결정에 대해 묻는 거구나.
‘내가 서운해할까 봐 걱정되셨나 봐.’
아델리아가 잠시 테오스를 바라보고 있자, 테오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결정을 내린 내가 원망스러울 것이다.”
“……아빠.”
“하지만, 아델리아. 언젠가는, 이런 결정을 내린 나를 이해할 날이 오길 바란다.”
테오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아델리아는 애써 담담해 보이려는 듯한 테오스의 목소리에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아델리아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빠. 전 이미 이해했어요.”
“……아델리아.”
“그러니까 걱정은 그만하세요. 아빠의 결정, 선택. 그 어떤 부분에서도 저를 위하지 않은 게 없다는 걸 전 알아요.”
이제는, 알고 있어요. 아빠.
그러자 잠깐 눈을 크게 뜨던 테오스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아델리아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 주었다.
“고맙구나. ……아델리아.”
헤헤. 아델리아가 해맑게 웃었다.
아델리아를 따라 테오스도 웃었다.
아델리아는 테오스의 다정한 시선을 마주하며 생각했다.
사실,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일 거라고.
그러나 서운함보다 아쉬운 마음이 더 컸다. 아빠와 오빠 곁을 떠나야 하는 아쉬움.
하지만.
‘금방 다시 만날 거예요, 아빠.’
이건 아주 잠깐의, 찰나의 이별일 뿐일 테니까.
그러니까, 아주 잠깐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