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에스테르 공작저가 보이는 어느 한 숲속. 바스락. 발아래 밟힌 낙엽 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나무 기둥을 짚고 있던 휴시안이 나무 그늘에서 빠져나왔다. 달빛이 그의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휴시안의 연갈색 눈동자가 공작저를 고요히 응시했다.
“영 얼굴 보기가 힘드네.”
오늘도 그 ‘아이’는 저택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휴시안은 건국제 마지막 날, 거울 앞에서 달아났던 여자아이를 따라왔다.
‘그 여자아이가 에스테르 공작저로 들어갈 줄은 몰랐지만.’
새벽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그리고 다시 밤이 왔다. 그럼에도 그때 그 아이는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보고 싶은데.’
그냥 데릭 얼굴 보러 왔다고 하면서 들어가 버릴까?
‘아니지. 그때야말로 데릭이 절교하자고 할 거야.’
휴시안은 로시안트 제국을 들를 때마다 데릭을 만나고는 했다. 밀튼에게 말했던 휴시안의 비밀 친구가 바로 데릭이었다.
그러고 보니 데릭 에스테르에게 여동생이 있다고 들었지.
-동생이랑 가 볼 만한 곳?
-응, 내가 이런 걸 물어볼 사람이 휴시안 너밖에 없어서 그래.
-말해 줄 때는 듣기 싫다며. 경박하다고.
-경박한 거 말고. 그냥 맛있는 음식점이나 영애들이 자주 가는 장신구 가게라든가, 그런 거 말이야.
-지극정성이네.
타인에게 항상 무뚝뚝하던 데릭이 쑥스럽다는 듯 귀 끝을 붉혔다. 그 모습이 재밌기도 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음식점과 구경할 만한 곳들을 일러 주었다.
‘그 여동생이 걔였구나.’
축제의 마지막 날, 마차에서 내린 두 아이의 대화가 떠올렸다.
-황궁 마차를 빌려줄게.
-아니에요. 여행한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가 보려고요. 저번처럼 그렇게 디크레드 영지까지 달렸다가는 이번에야말로 앓아누울 거예요.
디크레드 영지. 그곳이라면 예전에 한번 가 본 적이 있는 영지였다.
‘거기로 간다고?’
휴시안은 잠시 공작저를 바라보다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급히 자리를 떠났다.
***
“슈! 나 잠시 다녀올 곳이 생겼어!”
휴시안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지간한 귀족들의 방보다 화려하고 호화로운 방. 여러 개의 방을 합친 덕분에 크기도 매우 컸다.
한눈에 보아도 비싸 보이는 침대에서 화려한 문양의 이불을 걷어 내며 슈미엘이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적갈색의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초점 없이 흐리멍덩한 연녹색 눈동자로 방을 들어오는 휴시안을 응시했다.
콜록콜록, 창백한 얼굴의 슈미엘이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연신 기침을 해 댔다.
방으로 성큼 걸어 들어온 휴시안이 소파까지 걸어가 앉았다.
“갑자기가 아니잖아. 내가 한군데 오래 붙어 있는 거 봤어?”
“우리가 로시안트 제국에 온 이유를 잊은 거야?”
콜록. 슈미엘이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을 이어 갔다.
“내 그릇을 찾으러 왔잖아.”
“알아.”
“그런데 어딜 가겠다는 거야? 아니면, 벌써 찾았어?”
음, 짧게 침음하던 휴시안이 대답했다.
“아니, 못 찾았어.”
“뭐?”
“없었어, 슈.”
슈미엘이 손수건으로 입을 막으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못 찾았다고? 없었다고?! 그래서 그냥 왔다고?!”
그러자 휴시안이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남청색 후드를 눌러썼던 여자아이를 떠올렸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털어 버렸다.
“슈. 지나가는 아무나 잡아 왔다 하더라도, 어차피 네 흑마법을 견디지 못하고 며칠 안에 죽어 버렸을 거야.”
휴시안의 말에 슈미엘이 이마를 짚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계속해서 잡아 오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마탑의 마법사들이 함께 들어와 있어. 제국민이 사라지면 우리도 의심받을 거라고.”
“마탑이 중요했어? 언제부터?”
“슈.”
“하긴, 넌 스승님 뜻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 내려 했지. 그래서 그래? 스승님께서 떠넘긴 자리라서?”
“내가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덕분에 우린 많은 걸 누리고 있어. 사창가에 버려졌던 고아가 아니라, 이제는 어딜 가든 대접받는 위치라고.”
“너나 그렇지.”
“…….”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슈미엘이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말했다.
“날 봐. ……나, 썩어 가고 있어. 죽어 가고 있다고. 하루라도 빨리 그릇을 찾지 않으면 난 영원히 소멸하고 말 거야.”
이 허름하고 좁은 방 안에서 죽어 버리고 말 거라고.
슈미엘이 흐느끼듯 말했다.
그녀의 말에 휴시안이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걱정하지 마. 찾고 있어……. 차라리 그 여자라도 데려와? 마력이 없어서 오래 버티진 못하겠지만, 너랑 상성은 좋다고 했었지.”
그러자 슈미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 여자는 안 돼. 할 일이 있어.”
“할 일? 네 진짜 그릇을 찾는 거?”
“응. 너도 알잖아. 에스테르 공작.”
“……알지. 네가 그 공작의 아들 녀석 옆에 붙어 있으랬잖아.”
확실히 그 가문의 핏줄에는 특별한 뭔가가 있다고, 휴시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확실하진 않지만, 시도는 해 봐야지. 영웅까지 할 정도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슈미엘은 휴시안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이제, 거의 다 됐어. 넌 내가 진짜 그릇을 손에 넣기 전까지 대체할 그릇들이나 데려와.”
“……말했잖아. 네 흑마법이 너무 강해서 버티질 못할 거라고.”
슈미엘이 한숨을 내쉬더니 침대에서 내려왔다.
“휴시안.”
“…….”
힘없는 걸음으로 소파까지 걸어온 슈미엘이 휴시안의 옆에 앉았다.
뼈가 앙상한 손이 휴시안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휴시안……. 내가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남으려는 건, 다 널 위해서라고 했잖아.”
“……그랬지.”
“이제 곧 진짜 그릇을 손에 넣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우린 예전처럼 다시 영원히 함께 지낼 수 있어. ……그러니까, 날 배신할 생각 하지 마.”
그러자 휴시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가 왜 널 배신해?”
슈미엘이 휴시안의 어깨에 머리를 갖다 대었다.
“네가 계속 거절하니까 하는 소리야.”
“…….”
“네가 날 돕지 않으면, 누가 날 돕겠어.”
슈미엘이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으며 한숨처럼 말했다.
“명심해, 휴시안. 내가 소멸하면…….”
끊어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가 이어졌다.
“넌 앞으로 혼자가 되는 거야. 영원히.”
“…….”
“내게 너밖에 없듯이, 너에게도 나밖에 없어.”
그녀의 말에 휴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아는데…….
“그래도 아이들을 데려오는 일은 할 수 없어.”
“휴시안!”
“그것만큼은, 못 하겠어. 그 여자한테 부탁해. 난 못 하니까.”
휴시안이 슈미엘에게서 떨어져 나와 방을 빠져나갔다.
“휴시안!”
뒤에서 들리는 슈미엘의 목소리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저택의 정원까지 달려 나온 휴시안이 분수대 난간에 기대어 앉았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휴시안은 마른 장작처럼 말라 가던 슈미엘을 떠올리며 미간을 구겼다.
슈미엘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이였다.
사창가 뒷골목에 버려졌던 휴시안과 슈미엘은 서로를 친남매보다 많이 아꼈다.
‘마탑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었어.’
아니, 그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골목에서 얼어 죽었거나 노예로 팔려 갔겠지.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운명처럼 마탑의 마법사가 된 두 아이는 더더욱 서로를 의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두 아이의 길은 극명하게 갈라졌다.
한 아이는 능력을 인정받아 마탑주가 되었고, 또 다른 아이는 자신이 마탑주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마탑을 뛰쳐나왔다.
결국, 마탑을 나온 아이는 흑마법에 손을 대고 말았다.
그 흑마법이 슈미엘을 강하게 만들었고, 덕분에 긴 세월을 함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타인의 몸을 빼앗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돼 버렸어…….’
휴시안이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슈미엘의 방은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슈미엘이 소멸하는 것도 싫지만, 슈미엘을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잡아 와 그릇으로 희생시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
‘지친다…….’
휴시안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
“벌써 일주일이군. 지금쯤이면 도착했겠어.”
황제가 창밖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알현실의 의자에 앉아 있는 테오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나? 직접 따라가지 않고.”
테오스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담담히 말했다.
“전쟁을 준비 중입니다. 선두를 맡은 제가 자리를 비울 순 없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혀를 찼다.
“아직 2년이야. 2년이면 짧다곤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촉박한 시간도 아닐세.”
“…….”
그러자 테오스가 허공을 잠시 바라보더니,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두고 돌아올 자신이, ……없어서.”
“…….”
짧은 적막이 흘렀다.
황제는 평소와 다른 테오스를 보며 큼, 작게 헛기침을 한 뒤 말을 이어 갔다.
“장인 보기가 두려운 게 아니라?”
보자마자 냅다 주먹질을 해 댈까 봐 무서워서 그렇겠지.
그러자 테오스가 설핏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고요.”
테오스의 표정이 조금 풀리자 황제가 말했다.
“오해는 풀렸다면서. 이참에 다녀와도 좋았을 것을.”
그러자 테오스는 미소를 지우고 다시 무뚝뚝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희 가문의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알아서 한다면서 딸아이와는 그리 한참 동안 어색하게 지냈어?”
“…….”
“……아델리아 이야기만 나오면 다시 그런 표정이로군.”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황제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오러 말일세. 혹시,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나?”
테오스가 잠시 침묵했다.
황제는 아델리아의 친모인 이레네아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녀의 죽음이 무엇으로부터 기인했는지, 그 오러 때문에 테오스가 어떠한 희생을 했는지.
그러나 테오스는 아델리아가 스스로 오러를 제어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아껴 두었다.
가뜩이나 황태자비로 아델리아를 욕심내는 황제 앞에서 그 말만큼은 내키지 않았던 까닭이다.
황제가 물었다.
“……이제는 어쩔 생각인가.”
“디크레드 영지로 갔으니 한동안은 괜찮을 겁니다.”
디크레드 백작이 직접 영지 운영에 나서면서 디크레드 영지의 경비는 더욱 삼엄해졌다.
악시덤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곳으로 찾아가거나 사람을 보내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디크레드 영지의 경비는 당연히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아델리아의 오러는 자네가 직접 잠재워야 하지 않나 해서.”
테오스가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아델리아가 스스로 오러를 제어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제는 테오스가 오러를 잠재울 필요가 없어졌다.
하지만, 그것을 황제에게 말할 이유 또한 없었다.
“그 역시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 알겠네.”
단호한 테오스의 대답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테오스가 물었다.
“저희 가문 일 말고, 악시덤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으음.”
난데없이 공격이 들어오자,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침음했다.
테오스가 다시 질문을 이어 갔다.
“아직도 미련이 남으셨습니까?”
미련……. 미련이라.
황제가 미련이란 말을 입안으로 굴렸다.
그래, 어쩌면 이 모든 사태의 근원은 그 미련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테오스. ……악시덤은 말이야. ……영웅 그 자체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