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어린 시절의 악시덤은 정의롭고 용맹한 아이였다. 아이답지 않게 냉철하고 강직하기까지 했다.
황제는 그런 악시덤을 무척이나 아꼈다.
“그토록 능력이 특출난 아우가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천대받는 것을 볼 수 없었지.”
출신이라는 단점 하나 때문에 손가락질받는 악시덤을 위해, 황제는 그의 업적을 치하하며 대공 작위를 내렸다.
“그 아이가 빛을 보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황태자 전하는 안타깝지 않으신가 봅니다.”
“…….”
황제가 테오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황후가 남긴 유일한 혈육이다. 그 아이는 나의 전부이자, 이 제국의 미래지.”
악시덤이 대공 작위를 얻은 후 가장 먼저 카르세스의 훈련을 맡겠다 했을 때, 의심해야 했다.
-왜 말을 하지 않았느냐!
처음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카르세스를 불러 다그쳤다.
미리 말을 했더라면, 그토록 오랜 시간을 홀로 고통받게 하지 않았을 텐데.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애꿎은 카르세스에게 더욱 화를 냈다.
그리고 카르세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어차피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겁니다, 폐하.
-뭐……?
-제국의 영웅이잖아요. 모든 제국민들의 우상이며 제국을 위해 목숨 바쳐 전장으로 향했던 영웅.
-…….
-그리고.
카르세스가 시선을 내렸다. 그 어린아이의 눈동자는 참으로 많은 감정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크게 느껴지는 감정은 체념이었다.
-폐하께서도 믿지 않으셨을 거예요.
-카르세스, 나는……!
그러나 황제는 말을 잇지 못했다.
카르세스의 그러한 생각을 탓할 수가 없었다.
그 악시덤을 직접 대공 자리에 올린 것이 자신이었던 까닭이다.
출신의 미천함까지 덮어 주고 황위 계승권을 가지는 대공 작위까지 내려 준 황제.
그리고 그런 황제의 무한한 신뢰를 받는 제국의 영웅.
두 사람의 끈끈한 형제애는 제국민들 사이에서도 이미 유명했다.
그러니 카르세스는 황제가 자신의 아버지라 하더라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을 것이다.
황제는 당시를 회상하다 몰려드는 자괴감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변명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이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이야.”
악시덤의 악행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귀족파 세력의 수장이 되어 있었다.
‘안일했지. 제국을 이끌어 갈 든든한 벗이 생겼다고 여겼으니까.’
황제파와 신전파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되며 모두의 신경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 틈을 타, 악시덤은 자신만의 세력을 키웠다.
황제 마음대로 끌어내릴 수 없을 만큼, 귀족파의 힘을 등에 업은 악시덤은 그야말로 또 다른 제국의 태양 노릇을 하고 있었다.
“자네가 나서 준 덕분에 그들의 세력이 주춤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위협적이긴 해.”
그랬기에 카르세스에게 힘이 필요했다.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저와 같은 허수아비 황제가 되지 않도록.
그런데 하필, 아델리아에게 오러가 발현되었다니…….
황제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한동안 생각을 정리하던 황제가 결심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자네 말대로 하지.”
그리고 테오스를 향해 몸을 돌린 황제가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악시덤을 대공 자리에서 끌어내린다.”
이 제국을 위해,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위해.
***
디크레드 영지까지 가는 데는 꼬박 일주일이나 걸렸다.
황궁의 마석 마차를 빌렸다면 시일을 조금 더 당겨 도착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델리아는 마차를 빌려주겠다던 황태자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속이 울렁거리는 거 같아.’
그래서 일반 마차로 이동했다. 조금은 느리지만, 한동안 잊고 있었던 여유를 느끼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데릭과 아델리아가 디크레드 영지에 들어섰다.
백작저에 도착하자, 아델리아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오벨르 백작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데릭. 많이 컸구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할아버지.”
데릭이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오벨르가 다가가 데릭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토닥거렸다.
그리곤 회한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토록 장성하는 동안 만나지를 못했다니……. 한탄스럽기 그지없구나.”
그러자 데릭이 오벨르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조부의 쓸쓸한 마음을 달래 주듯 다정하고 따뜻한 미소였다.
7년 만에 만난 사이 같지 않았다. 어머니의 가문이라 그런가, 어색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아델리아를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몹시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계세요. 조만간, 찾아뵙겠다는 말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그래……. 네 아비와도 할 말이 참 많지.”
7년 전, 조금만 더 깊이 생각했더라면 그 시간을 허무하게 날려 버리지 않았을 텐데…….
‘펠로체, 이 쳐 죽일 놈…….’
오벨르가 이름 하나를 어금니로 갈아 대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데릭의 옆에 선 아델리아를 발견하고 날 선 시선을 거두었다.
오벨르가 아델리아와 시선을 맞추며 앉았다.
“아델리아. 금방 다시 보게 되어 좋구나.”
아델리아가 눈을 접어 웃었다.
“네, 할아버지! 저도요!”
환하게 웃는 아델리아를 바라보던 오벨르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안아 봐도 되겠니?”
그렇게 말하는 오벨르의 귀 끝이 붉어졌다. 아델리아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얼마나 용기를 내어 부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델리아가 먼저 다가가 오벨르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
“물론이죠, 할아버지.”
그러자 오벨르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허허, 녀석도 참.
오벨르가 기껍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아델리아를 안고서 몸을 일으켰다.
“먼 길 오느라 모두가 고생했겠구나. 자, 들어가자. 에스테르에서 온 내 귀한 손자, 손녀를 위해 만찬을 준비해 놨으니.”
오벨르가 아델리아를 안고서 백작저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 뒤로 데릭과 하녀들, 그리고 짐을 든 시종들도 함께 걸음을 옮겼다.
***
디크레드 영지는 기본적으로 추웠다.
그래서 아델리아는 두툼한 드레스와 외투를 잔뜩 준비해 왔다.
저녁을 먹고 방으로 올라온 아델리아는 세라와 함께 짐을 정리했다.
“아가씨, 옷장에 공간이 부족해서 우선 입으실 드레스부터 넣어 놨어요.”
“고생했어, 세라.”
“고생은요.”
세라가 옷장 문을 닫으며 아델리아에게로 걸어왔다.
“피곤하진 않으세요? 먼 길을 달려오셨잖아요.”
“조금 잠이 오긴 하는데…….”
그런데 또 한편으론 잠이 오질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잠이 오면 오는 거지. 또 잠이 오질 않는다니.]
‘사람이라는 게 너처럼 단순한 존재가 아니란다.’
[누님 행동을 보면 완전 단순하시던데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막 달려나가질 않나, 막아서는 게 있으면 일단 부수고 보질 않나.]
찌르고 베고 때리고 자르고. 그 정도면 어지간한 쇳덩이보다 단순한 편에 속한다고, 리그하르트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성석과 널 녹여서 합치는 게 낫겠어.’
[……예? 아니, 소신 발언 좀 했다고 녹인다는 말을 그리 쉽게 하시면 안 되죠!]
‘노베트에게 일단 성석을 맡겨 놨으니, 녹여서 합쳐야 한다는 연락이 오면 넌 그대로 용광로행인 줄 알아.’
[누, 누님! 노베트가 물론 실력이 좋은 대장장이인 건 맞지만, 조금 더 신중히 생각을…….]
‘난 노베트를 믿어.’
녹이든 두드리든. 어떻게든 해 줄 거라고.
노베트는 과거에도 성검과 성석, 그 외의 성물을 잘 다루었다.
기본적으로 병기가 될 수 있는 광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예? ……지금, 서, 성, 성검이라, 하셨습니까?
성석의 힘을 성검으로 옮길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말에 노베트는 한동안 얼어붙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들었습니다.
노베트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구구절절 사연을 털어놓지 않아도 단번에 알아차린 표정이었다.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법을 찾아내겠습니다!
대장장이로 살아온 한평생을 걸어서라도!
듬직한 노베트의 대답에 아델리아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급하게 신전까지 가서 아스틴에게 줄 목걸이도 사다 건넸고.’
신력이 안정되고 건강을 되찾은 데오나 역시 신전을 나와 노베트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데오나는 대신관이 놀랄 정도의 신력을 가졌으나, 신전에 남기보다 노베트의 곁에서 살아가길 원했다.
그에 대신관은 특별히 데오나의 사정을 고려하여 성년식을 치를 때까지 노베트와 지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대신관이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 다행이었어.’
와……. 그러고 보니, 그동안 너무 정신이 없었네.
“아으으.”
아델리아는 기지개를 켜며 창문으로 걸어갔다.
에스테르 공작저에서 내려다보이던 정원과는 많이도 달랐다.
추운 날씨 탓일까. 백작저의 정원은 가을로 물들어 붉어진 넓은 잎사귀를 가진 나무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신 앙상한 나뭇가지와 땅에 붙어 있다시피 한 이름 모를 식물들이 가득했다.
아델리아가 창문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차가운 기운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이제 여기서 한동안 살아가야 해.’
백작저의 정원과 멀리, 디크레드 영지의 일부분이 시야로 들어왔다.
아델리아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비록, 수도와는 멀어졌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순 없어.’
어쩌면 디크레드 영지에서 더 바빠질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카를리나와 데릭이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줄 거라는 거였다.
‘내일이면 오빠도 돌아가겠지…….’
정말 이제 혼자가 되는 건가?
아델리아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가족과 함께한 시간보다 전장 위에서 홀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는데, 겨우 이런 일로 외로움이라니.
‘괜찮아.’
아직은 감정적인 생각을 버려야 할 시기야.
내일 떠날 데릭이 조금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욱 걱정되는 건 역시.
‘로샤크 전쟁이거든.’
아델리아는 창문에서 몸을 돌려 소파로 걸어와 앉았다. 푹신한 소파에 온몸이 파묻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긴장이 풀리기 시작한 것인지,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음, 내일은 일어나서 카를리나에게 편지부터 적자.’
오빠가 갈 때 함께 보내면 시간도 단축될 테니까.
에스테르 영지에서 차마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몇 개 있었다.
모티반스 일도 그렇고, 카를리나가 습격받은 일도 그렇고.
로샤크 전쟁만큼 중요한 일이 아직 처리되지 못한 채였다.
하아아암.
아델리아가 뻑뻑해지는 눈꺼풀을 비볐다.
‘우선 카를리나한테 알아낸 게 있냐고 물어보고…….’
광산 일도 다시……, 계획을 재정비하고…….
꿈뻑꿈뻑.
소파 등받이에 등을 깊이 묻고 있던 아델리아는 결국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어머, ……아가씨?”
침대 정리를 마친 세라가 소파에서 잠든 아델리아를 발견했다.
‘많이 피곤하셨겠지…….’
세라가 눈꼬리를 내리며 아델리아를 안아 들었다.
“최강, 병기……. 아타, 뮤움…….”
다 내 거야…….
아델리아의 알아들을 수 없는 잠꼬대에 세라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생 많으셨어요, 아가씨…….”
세라는 아델리아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끌어 올려 주었다.
지쳐 곯아떨어진 아델리아를 보며 세라는 가슴이 저릿했다.
“아가씨.”
세라가 아델리아의 앞머리를 넘겨 주며 소곤거렸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하루가 시작될 거예요, 아가씨.”
그리고 분명, 이곳에서도 아가씨께서는 잘 적응하실 거고요.
“좋은 꿈 꾸세요.”
세라가 아델리아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어루만진 뒤, 램프의 불을 끄고 방을 빠져나갔다.
낯선 땅, 낯선 집. 그리고 낯선 침실.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의 밤이 깊어졌다.
아델리아 에스테르의 또 다른 삶이 시작된 셈이었다.
그리고.
—2년 뒤.
아델리아의 9번째 생일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