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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08)화 (108/161)

108화

디크레드 백작저의 하루는 해가 뜨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델런! 푸딩은?!”

오벨르 디크레드 백작은 주방으로 들어서며 가장 먼저 델런을 찾았다.

파티시에 델런은 아델리아를 따라 디크레드 영지로 함께 왔다.

실상, 아델리아가 공작저를 떠나게 되면서 공작저에는 푸딩을 먹을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테오스의 명령이 있었다. 아델리아를 따라가 원할 때 언제든 푸딩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델런이 소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준비는 끝내 놨습니다, 백작님.”

“그래? 고생했네. 다른 음식들도 준비는 끝났겠지?!”

그러자 각 파트의 주방장들이 빠르게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누구 생일인데요!”

“저희 파트도 준비 완료입니다!”

“좋아, 좋아.”

케이크도 아델리아의 키보다 높은 놈으로 준비해 뒀고, 방 한편에 선물 상자도 가득 쌓아 뒀고.

‘우리 손녀가 광산에 관심이 또 많지.’

디크레드 영지 내 광산들을 둘러보던 어린 손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좋아. 이참에 산을 좀 파 볼까. 누가 알겠어. 광산이 나와 줄지.’

오벨르가 매우 흡족해하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

식사 준비를 끝내고 오벨르는 아내, 메릴다와 함께 아델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티를 열 걸 그랬어.”

이런 조촐한 식사 말고…….

“지금도 훌륭해요, 오벨르.”

“너무 없어 보이지 않아? 조금 조촐한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조촐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모인 사람이 적을 뿐, 오벨르가 준비한 생일 파티는 작년에 비해 더욱 화려해졌으니까.

마침, 식당 문이 열리며 아델리아와 세라가 들어왔다.

“아델리아!”

초조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오벨르는 식당으로 들어온 아델리아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할아버지!”

아델리아가 쪼르르 달려와 오벨르의 품에 안겼다. 오벨르가 아델리아의 등을 토닥거리며 작게 속삭였다.

“아홉 번째 생일을 축하한다, 아델리아.”

그러자 아델리아가 오벨르에게서 한 걸음 물러선 뒤 하늘색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고맙습니다.”

오벨르는 그런 아델리아를 흐뭇하게 바라본 뒤, 의자를 빼내어 아델리아를 앉혔다.

아델리아가 옆자리에 앉아 있던 메릴다의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할머니, 좋은 아침이에요.”

“그래, 아가. 네 생일이라 그런지, 더욱 행복한 아침이란다.”

메릴다가 아델리아의 뺨을 어루만지며 미소 지었다.

아델리아의 친모인 이레네아의 죽음 이후, 메릴다는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아델리아가 디크레드 영지로 오면서 펠슨을 데리고 온 덕분에 메릴다의 상태도 많이 호전되었다.

“그러고 보니 펠슨 선생이 안 보이는구나.”

메릴다가 식당 문을 돌아보자, 아델리아가 말했다.

“원래 이런 자리 안 좋아하잖아요.”

“그래도 함께하면 좋았을 텐데…….”

“제가 따로 사람을 시켜 챙기도록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그러자 메릴다가 기특하다는 시선으로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고맙구나, 아델. 내가 챙겨야 할 일을 네가 하게 만들어서 미안하구나.”

아델리아가 메릴다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으며 말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손녀가 할머니를 돕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할머니께서는 건강을 회복하는 일이 우선이에요.”

“아델리아…….”

메릴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펠슨이 만든 약 덕분에 메릴다는 평범한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거동이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그 역시 펠슨이 보살피고 있으므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메릴다의 상태가 좋아지자, 펠슨은 백작 부부의 신뢰를 얻게 되었다.

물론, 본인은 그런 신뢰가 굉장히 부담되는 것 같았지만.

크흠. 오벨르가 의자에 앉으며 헛기침을 했다.

“나도 따로 신경 쓸 테니 걱정하지 말고.”

오벨르는 식탁 위 음식들을 가리키며 씨익 장난스레 웃었다.

“아델리아. 차린 건 주방장들이 했지만, 지시한 건 나란다. 네 할머니는 구경만 했어.”

오벨르가 우쭐해하며 말하자 아델리아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환하게 웃는 아델리아를 보며 오벨르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데릭이라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자 아델리아가 눈매를 접으며 애써 미소 지었다.

“전 괜찮아요, 할아버지. 지금쯤이면 한창 전쟁 준비로 바쁠 때잖아요.”

담담한 아델리아의 대답에 옆자리에 앉아 있던 메릴다가 아델리아의 손등 위로 손을 겹쳐 올렸다.

“어찌 이리 의젓하게 컸나 몰라. 이제는 아가라고 부르지도 못하겠네, 우리 아델리아.”

그러면서 아델리아의 동그란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동시에 오벨르를 가느다란 눈으로 흘겼다.

저 입! 아이 앞에서 그리 입조심하라 일렀건만!

메릴다의 시선에 뜨끔해진 오벨르가 시선을 피하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자, 어, 어서 들자.”

“네!”

아델리아도 포크를 들며 환하게 웃었다. 잠시 어색했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휘발되었다.

아델리아는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큼직한 스테이크를 작게 조각 내었다. 포크 끝으로 찍은 고기 조각을 작은 입 속으로 밀어 넣기까지, 아델리아의 움직임은 몹시도 단정하고 우아했다.

딸그락거리는 작은 소음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다. 음식만 보면 입안이 터질 것처럼 한가득 베어 물던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아델리아를 바라보는 오벨르의 눈빛은 어쩐지 조금은 안타까워 보였다.

아마도 지난 2년 동안 교양 수업을 통해 듣고 배웠던 것들이 아델리아를 달라지게 한 게 아닐까…….

오벨르는 아이의 성장이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안쓰러웠다.

“왜 그러세요, 할아버지?”

오벨르와 눈이 마주친 아델리아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물었다. 그러자 오벨르가 얼른 고기를 집어 입가로 가져가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무것도. 많이 먹거라, 아델리아.”

“네.”

잔잔하게 대답하는 아델리아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다시 식사가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아델리아의 시선이 비어 있는 맞은편 의자로 향했다.

‘그랬지. 작년까지는 오빠도 함께였는데.’

2년 전.

디크레드 영지로 들어오며 아델리아가 데리고 온 사람들이 있었다.

파티시에 델런과 메릴다의 치료를 위해 펠슨을 데려왔으며, 호위 기사로 아스틴과 데프도 데리고 왔다.

당연히 세라와 데릭도 함께였다.

물론, 데릭은 며칠 머물지 않고 다시 에스테르 영지로 돌아가긴 했지만, 생일 때마다 찾아와 준 데릭 덕분에 조금은 덜 외로웠다.

-아버지께서 많이 서운해하셨어. 일곱 살 생일도, 여덟 살 생일도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꼭 전해 달라 하셨고.

-응…….

작년, 여덟 살 생일 때도 테오스가 준비한 선물을 가지고 데릭이 디크레드 영지를 찾아왔었다.

테오스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데릭이 그 빈자리를 대신했다.

‘올해는 전쟁 준비 때문에 오빠도 오지 못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

그러니까 서운할 것도, 쓸쓸할 것도 없다고. 그렇게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마음은 어쩐지 휑한 기분이 들었다.

아델리아의 시선이 차분하게 가라앉자, 오벨르가 눈꼬리를 내렸다.

‘역시, 테오스와 데릭이 그리운 거겠지.’

억지로라도 끌고 왔어야 했나…….

‘저 가여운 것.’

오벨르가 일렁거리는 눈빛으로 코를 한번 훌쩍거린 뒤 말을 이어 갔다.

“아델리아.”

“네, 할아버지.”

“요즘 자수 수업에 푹 빠졌다면서.”

그러자 아델리아가 두 뺨을 물들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녁 먹고 잠시 한다는 게 정신 차려 보면 아침이 되어 있더라고요.”

“그렇지 않아도 백작 부인께서 네 실력이 부쩍 늘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더구나. 하지만 아델리아. 아무리 자수가 재밌더라도 일찍 자야지. 밤을 새우면서까지 무리하지는 말고.”

오벨르는 아델리아를 걱정하면서도 완성된 작품이 궁금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델리아가 싱긋 웃었다.

“네, 할아버지. 염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완성되면 가장 먼저 보여 드릴게요.”

“그래, 기대하마. 자, 그럼 생일 선물로 가지고 싶은 건 없느냐?”

오벨르의 질문에 아델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얼마 전에도 드레스를 잔뜩 사 주셨잖아요.”

“그건 생일 선물이 아니지 않니.”

“으음.”

아델리아가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잠깐 고민하다 말했다.

“당장 떠오르는 게 없어서 그러는데, 생각나면 그때 말씀드려도 될까요?”

“물론. 물론이다, 아델리아.”

헤헤. 아델리아가 안도하는 오벨르를 보며 미소 지었다.

‘계속 거절하면 속상해하실 테니까.’

세 사람의 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 덕담이 오고 가는 화목한 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친 아델리아는 식당을 나와 방으로 올라왔다.

“오셨어요, 아가씨.”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라가 아델리아를 맞이했다.

“방금 전서구가 왔었어요.”

세라가 창틀에 내려앉아 날개깃을 정리 중인 비둘기를 가리켰다. 구르륵―? 비둘기가 마치 인사라도 건네는 듯 고개를 까딱까딱 기울이며 아델리아를 쳐다보았다.

그 비둘기를 알아본 아델리아는 그제야 아이다운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루이가 보냈구나!”

세라는 조금 전 비둘기의 다리에서 빼낸 작은 쪽지를 아델리아에게 건네주었다.

그 쪽지를 확인한 아델리아가 씨익,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골드를 좀 넉넉하게 챙겨야겠네.’

오랜만에 밤 나들이나 가 볼까?

그날 밤.

디크레드 백작저의 2층 창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리고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작은 인영이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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