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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09)화 (109/161)

109화

아델리아는 백작저를 몰래 빠져나와 조용히 담장을 뛰어넘었다. 그러자 디크레드 영지의 번화가, 비렌체 거리로 향하는 길이 보였다.

‘후우.’

아델리아는 담장을 넘으며 뒤로 넘어갔던 후드를 다시 고쳐 썼다.

‘이대로 쭉 쉬지도 않고 달리면…….’

그때.

“안녕, 공녀님.”

백작저에서 조금 떨어진 숲길의 한편. 온통 검은색으로 칠한 작은 마차 마부석에서 사람이 내렸다.

‘허……. 또 나타났네.’

아델리아가 걸음을 멈추고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아는 척하지 말랬잖아, 휴시안.”

톡 쏘는 듯한 아델리아의 어투에도 휴시안은 말갛게 미소 지었다.

“나가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모르는 척해?”

“…….”

아델리아가 말없이 휴시안을 노려보자, 휴시안은 서둘러 아델리아를 마차에 밀어 넣었다.

“자자, 처음도 아닌데 도끼눈 뜨지 마시고. 밀워드 주점으로 가는 거지?”

휴시안은 아델리아가 대답도 하기 전에, 편안하게 모시겠다는 너스레를 떨며 하며 문을 닫았다.

마차가 출발했다.

창밖으로 새카만 숲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아델리아의 시선이 마부석과 이어진 작은 창으로 향했다.

달빛을 받은 휴시안의 회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밤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달빛을 머금어 그런 것인지. 언뜻 그의 머리카락이 은색으로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델리아가 휴시안의 뒤통수를 쏘아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나 참, 휴시안은 자기가 마탑주라는 걸 숨길 생각이 없나 봐.’

이 시간에 내 움직임을 눈치채고 마차를 미리 준비했다고? 누가 봐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

‘의심받을 만한 짓만 골라서 하고 있어! 바보 아냐?’

아델리아가 기막히다며 코웃음을 치자 리그하르트가 중얼거렸다.

[누님이 그런 말 할 자격은 없으실 텐데요.]

‘응?’

[됐어요. 또 말해 봤자, 내 입만 아프지.]

‘…….’

[그나저나 휴시안은 어쩔 생각이세요? 누님이 틈만 나면 밀행을 즐긴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살려 두실 거예요? 리그하르트가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성검이란 놈이 말버릇이 왜 그래? 뭐, 그럼 어떡해? 죽이기라도 하자는 거야?

아니, 애초에 마탑주를 내가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아니, 뭐…….]

후우. 아델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냥 내버려 둬야지. 무슨 속셈인지 스스로 드러낼 때까지.’

휴시안이 처음 디크레드에 나타났던 것은 2년 전이었다.

‘내가 디크레드에 도착하고 일주일 뒤였지, 아마?’

휴시안은 디크레드 백작저의 신입 마부로 들어왔다.

경계가 한층 강화된 디크레드 영지였지만, 휴시안의 서류는 완벽했다.

‘흠잡을 곳이 없었어.’

마법으로 그런 것도 만들어 낼 수 있었나?

‘하긴 마탑주니까 뭔들 못 하겠어?’

무엇보다 놀란 것은 외형을 자주 바꾸고 다니던 휴시안이 과거에 아델리아가 알고 있던 모습 그대로 나타났다는 거였다.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마탑주라는 신분은 예전에도 숨기고 다녔어. 새삼스러운 건 아니야. 단지…….’

왜 디크레드에 왔는지, 왜 마부 행세를 하는지, 그로 인해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이없는 것은 지난 2년간, 휴시안이 정말 마부 역할에만 충실했다는 거였다.

‘백작저 고용인들과 할아버지께서도 인정할 정도니까.’

한동안은 의심한 적도 있었다. 혹시, 방계 혈족인 펠로체가 영지를 몇 년간 주물렀던 일에 저 휴시안이 관여한 건 아닌가 하고.

‘그런데 펠로체를 구하러 온 것 같지도 않았어.’

그랬다면 2년간 마부 일만 하고 있진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고 너 마탑주인 거 다 알아! 여기 왜 왔어! 하고 물어볼 수도 없잖아.’

안 그래, 릭?

[치…….]

리그하르트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사실, 리그하르트는 휴시안을 부담스러워했다.

휴시안은 은색 물건이나 장신구를 좋아했는데, 지난 생에서도 첫 만남에서 가장 먼저 한다는 말이 “은발이네?”였다.

처음에는 흔하지 않은 은발에 호기심을 보이다가, 그 뒤로 은색 성검에도 눈독 들이곤 했다.

[한 번씩 절 빤히 바라보는 그 눈빛! 그건 분명 제가 탐나는 눈빛이었다고요!]

조금만 방심하면 저를 들고 달아날걸요?!

리그하르트가 투덜거리자 아델리아가 웃었다.

‘잘 어울리긴 할 거야. 휴시안은 은색이 참 잘 어울리더라고.’

몸매도 늘씬하고 키도 커다랗고.

항상 몸에 은색 장신구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녔는데, 그게 또 하나같이 잘 어울렸다.

은색의 성검 또한 어쩌면 자신보다 더 잘 어울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뭐라고요?!]

리그하르트가 발끈했다.

[그러다 넘겨주시겠네, 아주!]

‘생각만. 생각은 자유잖아?’

휴시안은 예쁘장하게 생긴 외모를 지녔다. 큰 키만 아니었다면 여자라고 오해할 만큼.

그래서 그런가. 은색 장신구가 몹시도 어울렸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저 얼굴도 진짜 본모습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대체 직업이 몇 개야?’

예전에 디크레드 영지의 방문객 명단을 확인했을 때는, 분명 신입 광부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마부?’

마탑주는 못 하는 것도 없나 봐.

아델리아가 휴시안의 뒤통수를 계속 응시했다.

곧 마차가 비렌체 거리에 도착했다. 마차는 비렌체 거리 광장에서 또 한참을 더 들어갔다.

그리고는 골목 안에 있는 작은 주점 앞에 섰다.

<밀워드 주점>

주점 이름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오래된 간판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다 왔어, 공녀님.”

휴시안이 마차 문을 열며 환하게 말했다.

“조용히 좀 말해. 디크레드 영주의 손녀가 여기에 있다고 소문이라도 낼 셈이야?”

아델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쏘아붙이자 휴시안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깜빡했어. 미안.”

후우. 아델리아가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알겠으니까, 여기서 기다려.”

“같이 들어가면 안 돼?”

“마차는 누가 지키고? 너 마부잖아.”

“아. 그건 그런데…….”

마차에 가만히 있는 건 심심한데…….

휴시안이 작게 중얼거렸지만, 아델리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마차 지켜.”

“……응.”

쩝. 휴시안이 아쉽다는 듯 아델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끼이이이— 나무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델리아가 주점의 뒷문으로 들어갔다.

“어머! 오셨어요, 공녀님!”

그러자 밀워드 주점의 주인 렌시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달려 나왔다.

“잘 지냈어요?”

아델리아가 인사를 건네자, 렌시가 반갑게 맞이했다.

“물론이지요, 공녀님. 어서 들어오세요!”

렌시는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라는 듯, 자연스럽게 아델리아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저녁 장사를 모두 마무리한 시각이라, 주점 안은 썰렁했다.

렌시는 아델리아를 칸막이가 세워진 자리에 앉혀 놓고 말했다.

“로이 만나러 오신 거지요?”

“맞아요, 렌시. 로이 좀 불러 주세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렌시가 빠른 걸음으로 2층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2층 방 하나에서 사내아이가 투덜거리며 내려왔다.

“아가씨, 오셨어요.”

“안녕, 로이. 앉아.”

“네, 아가씨.”

잠에서 덜 깬 듯 보이는 소년은 올해 열다섯이었다.

딱히 길드라는 게 없었던 디크레드 영지에서는 주점이 그 역할을 대신했는데, 로이는 그 주점에서 태어나 숙명처럼 주점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델리아는 정보를 얻을 생각으로 주점 주인인 렌시와 친분을 쌓게 되었고, 그러다 렌시의 아들인 로이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전 주점 일이 싫어요. 공녀님에 대해 많이 들었어요! 아버지이신 공작께서는 제국의 영웅이시고, 오라버니이신 에스테르 경께서는 최연소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이시죠! 게다가 공녀님께서도 아카데미 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하셨고, 또…….

소년은 호기심과 존경심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반짝였다.

-저를 거둬 주세요! 전 주점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기사가 될래요! 그러니까 공녀님, 제발…….

로이의 애절한 눈빛에 아델리아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때가 되면 검을 가르쳐 주겠다고. 그래서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되면 디크레드 백작가의 기사단 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기회를 주겠다고.

대신, 주점 일을 열심히 도우며 상인들의 대화를 듣고 전해 달라고만 했다.

‘로이를 보고 있으면 전하가 생각나.’

그래서 간절한 부탁을 차마 거절하기 힘들었다.

물론 생긴 것은 전혀 딴판이었지만, 비슷한 또래 사내아이를 보면 어김없이 카르세스가 떠올랐다.

[2년 동안 연락 한 통 없는 사람인데 뭐가 좋다고 떠올리고 그래요?]

‘……너어는 진짜.’

일단, 넌 나중에 보자.

아델리아가 어금니를 살며시 사리물며 미소를 지었다.

“전서구를 보낸 만큼, 오늘은 내가 만족할 만한 정보가 있겠지?”

아델리아가 묻자, 머리를 벅벅 긁던 로이가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까먹을까 봐 그때그때 적어 뒀어요.”

종이를 건네받은 아델리아가 천천히 글씨를 읽어 내려갔다.

“로이.”

“……예? 왜 그러세요, 공녀님?”

아델리아가 미간을 구기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나도 못 알아보겠어.”

“…….”

큼, 크흠! 그러자 로이가 크게 헛기침을 했다.

푸하하하! 칸막이 바깥에서 렌시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글씨 연습 좀 하랬지!”

“아, 엄마!”

얼굴이 벌게진 로이가 다시 큼! 목을 가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제, 제가 읽어 드릴게요.”

“부탁해, 로이.”

아델리아가 싱긋 미소 지었다.

“이틀 전에 왔던 상인들이 있었는데요.”

“응.”

로이는 북동쪽에서 온 상인들의 대화를 기록해 두었다.

“군수 물자를 수송하는 호위 병력을 모집하는데, 상인 때려치우고 거기나 지원할까 하더라고요.”

디크레드 영지를 방문하는 상인들은 주로 폴디아퀸의 거래를 맡아 하고 있었다.

2년 전, 폴디아퀸의 생산이 모조리 중단되며 한동안 뜸해지긴 했다.

그러나 다시 폴디아퀸의 수확이 이루어지자 그들은 다시 거래를 위해 디크레드 영지를 찾았다.

“전쟁이 일어난다는 말 때문에 폴디아퀸 거래가 뚝 떨어졌거든요.”

“그렇지.”

“그래서 그런가. 군수 물자의 호위 병력에 지원하면 제법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차라리 대공가를 찾아가 호위 병력에 지원이나 할까, 하더라고요.”

“잠깐, 대공가? 프레이르 대공가?”

“네. 그럼 로시안트 제국에 다른 대공가도 있어요?”

로이가 눈을 깜빡이며 되묻자, 아델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악시덤이 왜……?’

전쟁을 앞두고 군수 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병력을 모집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황실이 나서서 모집해야 하는 일이었다.

지금처럼 대공가가 나설 게 아니라.

‘조금 이상하지?’

[조금이 아니라, 구린내가 날 정도예요! 누렁이 놈. 분명 또 음흉한 짓을 꾸미고 있는 게 확실해요!]

끄덕. 아델리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로이의 말이 이어졌다.

“아, 맞다. 호위 병력에 지원하는 게 무서운 상인들도 있었거든요.”

“응.”

“그 상인들은 폴디아퀸 말고 다른 물품으로 갈아탈 생각이더라고요.”

“다른 물품? 어떤 거?”

“아, 잠시만요.”

로이가 종이를 손끝으로 훑어 내려가다 말했다.

“여깄다. 으음. 초……, 석?”

“……초석?”

“네. 분명 초석이라고 했어요. 지금 초석을 대량으로 비싼 값에 사들이고 있다고도 했고요.”

“…….”

아델리아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초석이라면…….

‘자폭환의 재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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