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아델리아는 2년 전 숲에서 마주쳤던 괴한들을 떠올렸다.
발목에 들러붙었던 손길과, 살기로 가득했던 복면 너머의 눈동자.
그리고 굉음.
로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델리아가 슬며시 주먹을 쥐었다.
‘드디어 움직였어.’
그날 이후 자폭환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카를리나를 통해 초석이 흘러 들어간 경로도 파악해 봤지만, 대공가와 연결할 만한 부분이 없었다.
‘그런데 대량 구매라고?’
그것도 비싸게.
‘급한 거야.’
로샤크 전쟁을 앞두고 그들 역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원래 서두르다 보면 흔적을 남기는 법이지.
[전쟁에서 자폭환을 쓰려는 걸까요?]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어. 그때 숲에서 마주쳤던 그 괴한들도 서슴없이 자폭환을 사용했잖아.’
과거에 비해 자폭환의 완성도도 꽤 높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연구했다면, 로샤크 전쟁이 벌어졌을 때는 더 완성도 높은 자폭환이 나올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카를리나에게 초석을 대량으로 사들이는 게 누군지 알아보라고 해야겠어.’
아델리아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생했어, 로이. 이건 수고비.”
아델리아가 갈색 주머니를 꺼내어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 주머니를 멀뚱히 보던 로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아, 전 골드 필요 없는데요? 그냥 빨리 검술을…….”
그러나 아델리아는 로이의 말을 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로이. 검술은 검술이고. 이건 로이가 노력하고 애써 준 일에 대한 보답이자, 보수야. 이런 일에 쪼잔하게 굴 생각 없으니까 받아 둬.”
“……고맙습니다, 공녀님.”
로이가 멋쩍은 듯 주머니를 잡아 품속에 넣었다.
그런 로이를 보며 아델리아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정보에는 응당, 그에 맞는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 그것은 아델리아의 오래된 철칙 중 하나였다.
아델리아는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 골드를 사용하는 일에 아낌이 없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지난 2년간, 꽤 많은 재산을 모은 덕분에 골드가 제법 쌓여 있었다.
카를리나가 한 번씩 찾아와 골드가 가득 든 가방을 건네주고는 떠났다. 물론, 아델리아 에스테르의 이름이 아니라, 음지에서 조용히 활동 중인 이니셜 A.E의 재산이었지만.
‘어차피 다 내 거지!’
으히힛. 아델리아가 눈매를 접으며 싱글거렸다.
디크레드 영지로 들어온 뒤, 2년간 아델리아는 여러 가지 이유로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역시 광산 사업이었는데, 아타뮴 광산이나 플라니트 광산을 하나하나 추가하면서 서서히 A.E의 존재를 드러냈다.
그에 맞춰 로즈힐 후작가, 아니. 카를리나의 사업 역시 빠르게 몸집을 불렸다.
-A.E가 대체 누구냐고 많이들 물어요. 다리를 놔 달라고도 하고요.
카를리나는 디크레드 영지로 찾아올 때마다 빠르게 확장되는 광산 사업과 수익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아타뮴 광산에서 나오는 광석들은 대부분 에스테르 공작가의 매그너스 기사단 병기를 강화하는 데 쓰였다.
‘로샤크 전쟁의 선두에 아빠가 나서게 된 이상, 적어도 장비만큼은 제일 좋아야 해.’
그리고 아타뮴 광석을 채굴할 때 함께 나온 저품질의 광석들은 팔아서 이니셜 A.E의 금고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절 기습했던 사내들은 정말 아는 게 없었어요. 의뢰인이 누구인지, 무슨 목적으로 절 데려오라고 했는지도.
그저 ‘인질’로 사용할 거라는 말만 들었다고. 그 의뢰인과 다시 만나기로 한 장소에는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했다.
-때마침 비올라가 제국을 떠났어요. 그래서 더욱 의심이 가기는 하는데…….
심증은 있지만, 물증도, 증인도 없어진 상태라 그 일을 더 파고들지는 못했다.
-비올라는 왜 제국을 떠난 거예요? 결혼?
그러자 카를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대공 전하의 무역 사업을 돕기 위해서라고 들었는데……. 비올라는 원래 사업에 관심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조금 이상해요. 무슨 향초 사업이라고 들었는데.
향초? 듣다 보니 이상하긴 했다. 과거에도 비올라가 사업을 했었던가.
아델리아는 카를리나에게 비올라의 행보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라고 부탁했다.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알고 있던 미래가 달라지는 건 역시 께름칙해.’
아델리아는 카를리나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문 앞에서 다시 몸을 돌려 로이에게 말했다.
“혹시 상인들이 향초에 대해 언급하는 게 있으면 꼭 듣고 연락해 줘.”
“네, 그럴게요. 아가씨.”
아델리아는 로이와 렌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주점을 유유히 떠났다.
로이는 문을 나서는 아델리아를 바라보며 눈썹을 끌어 올렸다.
‘한 번씩 애늙은이처럼 말한단 말이야.’
자신보다 한참은 어려 보이는 공녀에게서 범접할 수 없는 묘한 기운을 느꼈다.
‘에스테르 가문 사람들은 다 저런가…….’
아니면 쟤가 좀 이상한 건가?
로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휴시안이 몬 마차가 아델리아를 태우고 다시 백작저에 도착했다. 여전히 어둡고 으슥한 밤이었다.
“들어가, 공녀님.”
아델리아가 마차에서 내리자, 휴시안이 마차 옆에 서서 뒷짐을 진 채 인사를 건넸다.
“같이 안 들어가?”
“응. 이 마차 좀 숨기고.”
아델리아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휴시안의 뒤편에 대기 중인 마차를 힐끔거렸다.
[또 마법으로 수작질하려는 거겠죠!]
‘너무 뭐라 그러지 마. 덕분에 편하게 다녀왔잖아.’
아델리아가 휴시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고생했어. 하지만 앞으로는 이러지 마.”
“왜?”
“너 수상하니까.”
그러자 휴시안의 한쪽 눈썹이 슬그머니 올라갔다.
“내가 수상해? 잘해 준 것뿐인데? 힘들 것 같아서 마차도 태워 주고, 남들 앞에서 티 내지도 않고, 그냥 얌전히 있는데도?”
그러니까. 그러니까 수상하다는 거잖아! 아델리아가 눈매를 갸름하게 뜨고서 말했다.
“어쨌든, 지켜보고 있겠어.”
“…….”
“아. 오늘 일도 비밀이야. 알겠지?”
아델리아가 경고하듯 말을 던져 놓고 홱 몸을 돌려 백작저 안으로 들어갔다.
휴시안이 잠시 넋 나간 사람처럼 멀뚱히 서 있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네.”
슬슬 질려 가던 참이었는데, 아직 조금은 더 지켜봐도 좋겠어.
휴시안이 손을 올려 따악―! 두 손가락을 소리 나게 튕겼다.
그러자 그의 뒤에 있던 검은 마차가 연기를 뿜어내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잠잠하던 숲속의 공기가 한차례 흔들렸다.
고요한 밤. 밤안개를 머금은 축축한 숲속의 냉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평온을 되찾았다.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온 아델리아에게 세라가 물었다.
“아가씨. 저 선물들은 다 어떻게 할까요?”
“응?”
세라가 방 한편에 높이 쌓인 선물 상자들을 가리켰다.
백작저의 고용인들과 교양 수업을 가르치고 있는 귀부인들, 그리고 친분을 쌓게 된 디크레드 영지민들에게서 온 생일 선물이었다.
어젯밤, 급히 나가야 했던 탓에 미처 뜯어 보지도 못했다.
“다녀와서 풀어야겠는데?”
“다녀오시다니요? 어딜 가시려고요?”
“비렌체 거리에.”
“네?”
세라가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일은 자수 수업이 있는 날이다. 그리고 자수 수업을 맡아 준 네리안느 백작 부인의 생일이 이틀 뒤였다.
“그러니까 부인의 선물을 준비하려면 오늘밖에 시간이 없어. 마차를 준비해 줘, 세라.”
“오늘 같은 날 늘어지게 쉬셔야 하는데…….”
근래 너무 바쁘지 않았냐며 세라가 걱정했다. 그러면서도 별도리 없이 아델리아의 외출 준비를 도왔다.
화장대 앞에서 아델리아의 머리카락을 손질하던 세라가 조심스레 말했다.
“마부를 바꿔 달라고 하시는 건 어떠세요?”
그러자 아델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왜?”
“이상하잖아요.”
세라의 대답에 아델리아가 푸하, 웃음을 터트렸다.
[옳소! 전 세라 님의 의견에 대찬성입니다!]
리그하르트까지 거들었다. 아델리아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겉으로 보기엔 좀 이상하긴 한데, 나쁜 사람은 아니야.”
“어떻게 확신하세요?”
“지난 2년 동안 사고를 친 적도 없고 마구간에서도 성실하게 일하고 있잖아?”
“그래도 아가씨께 너무 무례하잖아요.”
세라는 감히 평민 주제에 공녀에게 반말하는 마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깍듯이 예의를 차렸지만 틈만 보이면 반말을 툭툭 던졌다.
“다른 대륙에서 와서 제국의 풍습에 서툴다고 했어. 점차 나아지겠지.”
“2년 동안 나아진 게 거의 없잖아요. 그리고 원래,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법을 따르는 거라고 했어요. 로시안트 제국에서 지낼 거면 당연히 로시안트 제국법을 따라야 하잖아요?”
오늘따라 세라의 태도가 강경했다.
그러나 아델리아는 그런 세라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작위도 없는 평민 출신의 마부가 공녀에게 서슴없이 대하는 게 못마땅할 거야.’
세라는 어릴 적부터 공작저의 하녀로 자라며 철저히 교육받았다. 그런 세라의 눈에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휴시안이 정체를 숨기는 마당에, 내가 세라를 설득하자고 휴시안의 정체를 털어놓을 순 없잖아.’
아델리아는 그저 속으로 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준비를 마친 아델리아와 세라는 함께 마차를 타러 갔다.
다른 영지는 아직 가을일 텐데, 디크레드 영지는 벌써 초겨울처럼 싸늘했다.
조금 멀리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다녀올게, 세라.”
“같이 가면 안 돼요?”
“데프랑 같이 가니까 괜찮아.”
그러자 세라 뒤를 따라오던 데프가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며 턱을 치켜들었다.
응, 응. 그래, 그래, 듬직하다. 듬직해.
아델리아가 키득거리며 마차로 향했다.
그러자 말갈기를 손질 중이던 휴시안이 아델리아를 발견하고 손을 들어 휙휙 저었다.
“저 무례한!”
세라가 또 발끈했지만, 아델리아가 웃으며 빠르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 휴시안. 오늘도 잘 부탁해.”
그러자 휴시안이 말갛게 웃었다.
“안녕, 공녀님.”
그때, 휴시안이 아델리아의 뒤를 흘깃거렸다. 그러자 도끼눈을 뜬 세라와 눈이 마주쳤다.
휴시안이 세라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아델리아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녀님. 하녀 바꾸면 안 돼?”
나 쟤 무서워.
풉. 그의 말에 아델리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둘 다 똑같네, 똑같아.
“그럴 일은 없을 거니까 기대하지 마.”
칫. 휴시안이 혀를 차며 마차의 문을 열었다. 아델리아가 마차에 올라타 창문을 열며 손을 흔들었다.
“세라, 다녀올게!”
“네! 다녀오세요, 아가씨!”
아델리아가 탄 마차가 백작저를 빠르게 벗어났다.
‘괜찮겠지……?’
세라가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멀어지는 마차를 응시했다.
별일 없겠지?
‘그래, 설마 별일이야 있으려고.’
요즘은 우리 아가씨도 얌전하게 지내시니까.
‘게다가 데프 경도 있고.’
그래,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세라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마차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