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백작 부인의 선물로는 부인의 눈동자 색과 비슷한 보석이 달린 장신구 세트를 구입했다.
너무 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수수하지도 않은 디자인이 백작 부인과 어울릴 것 같았다.
가게에서 나와 잠시 거리를 걷다 보니, 한창 장사 중이던 근처 상인들이 아델리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공녀님! 놀러 나오셨어요?”
“안녕하세요, 벨라 아줌마. 장사는 잘되시죠?”
“아휴, 지난번에 상단을 연결해 주셔서 매출이 다섯 배나 뛰었어요!”
“다행이에요.”
아델리아가 은은하게 웃었다.
나풀나풀 프릴이 잔뜩 달린 노란 드레스가 아이의 걸음에 맞춰 흔들렸다. 어린 공녀의 걸음과 자태에는 나이답지 않은 기품이 서려 있었다.
[으. 누님. 언제까지 그렇게 웃으실 거예요? 몇 년이 지나도 적응이 안 되네.]
그러자 아델리아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대답했다.
‘시끄러워. 디크레드 영지에서 나갈 때까지는 계속 이럴 거니까 네가 적응해.’
할아버지랑 할머니께 걱정을 끼칠 순 없잖아.
‘할머니도 이제 겨우 낫기 시작하셨는데, 손녀가 검을 들고 설쳐 봐. 그 여린 성격에 밤에 잠도 못 주무시고 내 걱정만 할걸?’
그러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냐고, 아델리아가 중얼거렸다.
그사이, 또 다른 상인이 과일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내밀었다.
“이거 좀 가져가세요, 공녀님.”
그러자 데프가 나서서 바구니를 대신 받았다.
“고맙습니다.”
데프는 내친김에 아델리아 대신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델리아가 놀란 눈을 떴다.
“매번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
“고마워서 그렇습니다. 산에서 공녀님을 못 만났다면, 전 아마 그 늑대의 먹이가 되었을 테니까요.”
반년 전, 디크레드 북쪽 산으로 광산 구경을 갔던 아델리아는 늑대에게 쫓기던 상인을 구해 준 적이 있었다.
‘때마침 마주쳐서 다행이었지.’
함께 있던 데프와 아스틴이 나서 늑대를 처리하고 상인을 구해 주었는데, 그때부터 상인은 아델리아를 볼 때마다 과일 바구니를 안겨 주었다.
“이걸 파셔야지, 저한테 공짜로 주면 어떡해요?”
“괜찮습니다! 그 정도로 궁핍하지 않습니다, 공녀님!”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닌데…….
어휴. 아델리아는 어쩔 도리 없이 과일 바구니를 받기로 하고 마차로 향했다.
그러자 골목 입구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던 휴시안이 달려왔다. 아델리아가 휴시안을 빤히 보며 물었다.
“마차를 지키랬더니, 왜 또 여기에 있어?”
휴시안이 작게 웃으며 답했다.
“급한 일 생기면 부르겠다고 가도 된다고 했어.”
“……누가?”
“말이.”
아……. 말이? 말이 급한 일 생기면 직접 부르러 온다고?
또 시작이네.
[옛날부터 저랬잖아요.]
‘응, 그땐 장난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냥 원래 성격인 것 같아.’
아델리아가 휴시안을 쳐다보며 하하……, 어색하게 웃자 휴시안이 천연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인기 많네, 우리 공녀님은.”
그의 말에 아델리아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원래 베푸는 만큼 돌아오는 거야.”
그러자 휴시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딱히 그렇지만은 않던데.”
“응?”
“아냐.”
휴시안이 활짝 웃으며 마차 문을 열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
“음.”
휴시안의 질문에 아델리아가 잠시 고민했다.
“오늘 볼일은 다 끝났으니까 백작저로 가자.”
살 것도 샀고 목적은 이뤘으니까. 그러나 휴시안은 깜짝 놀란 눈을 뜨며 물었다.
“뭐? 바로 백작저로 돌아가겠다고?”
“그럼?”
“이제 점심시간인데? 지금 백작저로 돌아가 봤자, 또 손수건이나 붙잡고 바늘로 찔러 댈 거면서.”
……뭐야, 얘?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델리아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휴시안이 아델리아를 마차로 이끌었다.
“가자, 공녀님. 내가 좋은 곳을 알고 있어.”
좋은 곳……?
그때, 데프가 다가와 휴시안을 밀쳤다.
“이봐! 공녀님께 무슨 짓이냐!”
데프가 위협적인 기세로 휴시안의 행동을 저지했다. 그러자 휴시안이 한 걸음 물러서며 하하, 작게 웃었다.
“누가 보면 내가 공녀님을 납치하는 줄 알겠네. 공녀님이 갓난아이도 아니고, 너무 과보호하는 거 아니야?”
그러자 데프가 울컥하며 말했다.
“아가씨는 당연히 아직 어린아이……!”
“데프.”
아델리아가 데프를 불렀다.
“난 괜찮아. 오랜만의 외출이잖아.”
[밤마다 몰래 나가는 거 말고.]
‘조용히 좀 해.’
아델리아가 데프를 향해 다정하게 웃었다.
“조금만 더 놀다가 가자. 나도 바로 돌아가는 건 조금 아쉬웠어.”
“아가씨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데프가 한발 물러서자, 아델리아가 휴시안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
“따라와, 공녀님.”
휴시안은 아델리아를 마차에 태우고 신나게 마차를 몰았다. 한참을 달리던 마차는 제법 익숙한 골목길에 접어들더니 그제야 멈춰 섰다.
아델리아가 마차에서 내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딜 가려고?”
그러자 휴시안이 굉장히 즐거운 듯 격양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쪽에는 과일 젤리를 전문으로 파는 가게가 있고, 저어어쪽에는 크리스털 사탕을 팔아.”
아, 그리고 저기는 폭신한 솜사탕을 파는 가게가 있다며 설명을 덧붙였다.
아델리아가 휴시안의 설명을 들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동안 영지 여기저기를 열심히 돌아다녔다고 생각했는데.’
휴시안은 아델리아가 모르는 구석구석을 죄다 꿰고 있었다.
‘안 가 본 가게가 없는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주변 상인들과도 친분이 꽤 깊어 보였다. 상인들은 아델리아와 인사를 나누고 나면 꼭 휴시안과도 인사를 나눴다.
털털하게 인사를 건네는 남자들이 있는가 하면, 뺨을 붉히며 수줍게 인사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거야?’
아델리아가 의심의 눈초리로 휴시안을 살피던 그때, 휴시안은 아델리아를 데리고 한 식당 앞에 섰다.
수도의 인기 많은 식당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디크레드 영지에서는 제법 크고 화려한 편이라 할 수 있는 건물이었다.
‘아, 여긴 나도 알아.’
아델리아가 건물 외관을 살피자, 휴시안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기는 스테이크가 맛있더라. 여기서 점심 먹고 들어가자.”
그러자 아델리아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넌지시 물었다.
“디크레드 영지에 대해 잘 아나 봐?”
“응? 아니. 잘 아는 건 아니고……. 마부 일만 하다 보면 심심하거든. 그래서 여기저기 조금 돌아다녔어.”
흐음. 잠시 고민하던 아델리아가 물었다.
“사 주는 거야?”
“당연하지.”
휴시안이 천진하게 웃으며 허리춤의 주머니를 짤랑짤랑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와! 저 음흉한 마탑주 놈! 누님이 고기에 환장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진정해, 릭.’
[누님!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사특한 악마의 속삭임이에요! 누님을 얕잡아 보고 있어요! 어딜 감히! 우리 누님이 그런 먹을 거에 홀라당 넘어갈 어린아이로 보이나!]
‘어휴! 시끄러워 죽겠네!’
핫. 아델리아가 속으로 버럭 소리치자, 리그하르트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어지간해서는 자신의 수다를 모두 받아 주는 아델리아였다. 그러나 지금처럼 큰소리로 시끄럽다고 다그칠 때는 조심해야 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떠들면 날 용광로에 던져 넣을지도.
리그하르트가 조용해지자, 그제야 아델리아도 마음의 평온을 얻었다.
“안 오고 뭐 해, 공녀님?”
앞서가던 휴시안이 아델리아가 따라오지 않자 돌아보았다.
“아냐, 따라가고 있어.”
아델리아가 짧게 대답한 뒤, 휴시안을 향해 걸어갔다.
휴시안은 자주 와 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창가 자리에 자리 잡고 앉았다.
이 식당에서 가장 맛있는 메뉴라며 알아서 주문도 하더니 음식이 나오자 스테이크를 잘게 썰어 건네주기도 했다.
“어때? 맛있어?”
아델리아는 고기 한 점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데릭이 떠오르기도 했다.
실제로 데릭과 휴시안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다행이네. 마음에 드는 거 같아서. 다들 좋아하길래 공녀님도 좋아할 거 같았어.”
“다들?”
“응.”
서쪽 과수원을 운영하는 레오니, 젖소 농장 집 첫째 딸 젠시, 남쪽 말 농장의 클로이, 그리고 동쪽으로는…….
휴시안의 입에서 디크레드 영지의 아가씨 이름들이 줄줄이 나왔다.
아델리아가 잠시 숨을 들이켜다, 한숨을 느릿하게 내쉬며 말했다.
“그, ……가리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좋은 건데, 휴시안.”
“응?”
“…….”
휴시안이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다. 아니야. 사람들과 잘 지내 보라고.”
오빠도 아닌데 내가 굳이 나서서 설교할 필요는 없잖아? 알아서 하라 그래. 이런 놈이 있으면, 저런 놈도 있고 하는 거지.
아델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휴시안이 입을 열었다.
“응, 그러고 있어. 공녀님도 그러잖아?”
“내가?”
“호위 기사들이랑도 잘 지내고 영지민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잖아.”
휴시안이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델리아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나쁜 게 아니야.”
휴시안이 스스럼없이 지내는 사람들이 전부 젊은 여자라는 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
‘뭐, 상관없겠지.’
아델리아는 다시 식사를 이어 갔다. 시간이 흐르고 식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
턱을 괴고 창밖을 멍하게 쳐다보고 있던 휴시안이 눈동자만 굴려 아델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공녀님.”
“응.”
그리고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언니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