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아하하하하! 휴시안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눈가의 눈물을 손끝으로 훔치며 말했다.
“공녀님. 움직이는 마차에서는 그렇게 일어나는 거 아니라고 못 배웠어?”
휴시안이 손끝을 빙글 돌리자, 아델리아의 몸이 부드럽게 허공에 떴다가 다시 의자 위로 앉혀졌다.
“나한테 마법 쓰지 마!”
“위험했다고.”
위험? 지금 네 목숨이 위험하다는 생각은 안 드나 보지?
아델리아가 어금니를 사리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만 더 묻자.”
“알았어. 마지막 질문은 무효로 해 줄게.”
어때? 나 되게 착하지 않아? 하고 되묻는 모습이 리그하르트가 사람 모습을 하면 딱 저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아델리아가 턱을 악다물었다가 슬며시 힘을 빼며 물었다.
“9년 전, 디크레드 영지에는 왜 왔어?”
그러자 휴시안의 눈이 커졌다.
“어? 그건 또 어떻게 알아?”
“……영지에 사람을 들일 때 그런 기본적인 조사도 안 할 거라고 생각했어?”
“오, 그 정도는 확인한다?”
“말 돌리지 말고.”
아델리아가 날카롭게 쏘아보자, 휴시안이 하하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누굴 좀 만난다고.”
“누구?”
“음. 이름이 떠오르진 않는데……. 일단 심부름을 온 건 맞아.”
“일단?”
아델리아가 답답하다는 듯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휴시안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공녀님. 지금 질문 세 가지는 진즉에 끝난 거 알지?”
아델리아는 팔짱을 끼며 그를 노려보았다.
“9년 전 들어온 목적에 대해 제대로 대답을 들은 게 없어.”
“으음. 그게 중요해?”
“중요해.”
9년 전. 엄마의 죽음 이후, 너무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디크레드 영지에서 벌어진 도난 사건과 방화, 그리고 그 일로 인한 할머니의 병까지.
그로 인해 할아버지는 펠로체에게 영지를 맡겨야 했고, 펠로체의 농간으로 디크레드 백작가와 에스테르 공작가는 오해를 풀지 못한 채 덧없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니까.’
휴시안을 쳐다보는 아델리아의 눈빛이 한층 더 서늘해졌다.
‘그러니까 그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너와 상관이 없다는 걸 증명해, 휴시안.’
네가 나의 적이 아니라는 걸, 내가 확신할 수 있도록.
아델리아의 서늘한 시선 한편에는 어딘가 간절함이 묻어나는 것도 같았다.
휴시안이 그런 아델리아의 눈동자를 바라보다 말했다.
“이 대답이 굉장히 중요한 거 같은데.”
“그러니까 말해.”
“그러니까 말 안 해.”
“뭐?”
“쫓아낼 생각하지 말고, 곁에 두고 지켜봐.”
“…….”
“내가 공녀님을 2년간 지켜봤듯이. 그리고 확신을 내렸듯이.”
확신? 무슨 확신?
아델리아가 묻기도 전에 휴시안의 말이 이어졌다.
“공녀님도 날 제대로 봐.”
“그게 무…….”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던 찰나, 마차 안에서 휴시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와! 지 할 말만 하고 사라졌어!]
원래 엉뚱하고 제멋대로인 성격이긴 했다. 잠시 보였던 진지한 태도에 그걸 잊고 있었다.
‘아, 쟤랑 나랑은 진짜 안 맞아.’
아델리아가 속으로 탄식했다. 마부석과 이어진 창으로 보이는 휴시안의 뒤통수를 쏘아보며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한 대 쳤어야 했는데.’
때마침 마차는 백작저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휴시안이 훌쩍 뛰어내려 멈춘 마차의 문을 열었다.
헤헤, 그가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일 봐, 공녀님.”
싱긋 웃는 얼굴은 여전히 얄미웠다.
***
에스테르 공작저와 그리 멀지 않은 마을.
그곳에 노베트와 데오나의 집이 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노베트가 주방 식탁에 앉아 식탁 위 돌덩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식탁 한편으로는 한눈에도 오래되어 보이는 고서들이 높이 쌓여 있고, 그 위로는 읽다 엎어놓은 책이 있었다.
하아. 노베트가 내쉰 한숨에 식탁 위 램프의 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는지. 새카맣던 하늘엔 새벽의 미명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도무지 방법이 없다.’
공작 각하의 도움으로 구할 수 있는 고서는 모두 정독했고, 신전의 고서까지 모조리 뒤져 봤으나 성석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어떤 방법이든, 위험하기 그지없어.’
성석이 망가지지 않고 그 안의 힘만 오롯이 넘기는 방법이…….
‘과연 존재하긴 할까.’
아가씨를 뵐 면목이 없구나…….
노베트의 근심이 더욱 짙어졌다.
그때, 잠에서 깬 데오나가 주방으로 나왔다.
“아빠?”
“어, 어어?”
노베트가 고개를 들어 주방으로 들어오는 데오나를 쳐다보았다.
“왜 일어난 거니, 데오나.”
데오나가 눈꺼풀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바람 소리가 들려서 깼는데, 알고 보니 아빠 한숨 소리인 거 있죠?”
데오나가 배시시 미소 지으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
노베트가 민망해하며 말했다.
“내가 잠을 깨운 모양이구나. 미안하다, 데오나.”
데오나가 고개를 저었다.
“으응, 아니에요. 어차피 곧 해가 뜰 시간인걸요.”
그러자 노베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푸르스름한 새벽하늘 끄트머리, 붉은 태양의 햇무리가 언뜻 비쳤다.
‘아, 벌써…….’
그러는 사이, 데오나가 다가와 식탁 위 돌덩이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아가씨께서 주신 그 돌이죠?”
“그렇단다.”
데오나는 자신의 주먹보다 작은 돌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달각달각, 나무 식탁 위의 성석이 흔들거렸다.
“아직 그대로네요?”
2년 전에 처음 봤을 때랑 똑같은 걸 보면.
그러자 노베트가 뜨끔한 얼굴로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도무지 방법을 찾을 수가 없어.”
이거 참. 노베트는 자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데오나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안 하셨어요?”
응? 아무것도 하지 않다니.
“데오나. 이 아빠가 말이다. 황궁의 도서관도 뒤져 보고, 신전의 고서들도 모조리 찾아보고, 공작 각하께서 허락해 주신 공작가의 고서들도 죄다 살폈단다.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라…….”
노베트가 억울하다는 듯 말하자, 데오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 성석은 그대로잖아요?”
“……아니,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고, 노베트가 변명했다.
그러자 데오나는 오히려 더 이해되지 않는다며 말했다.
“아빠는 대장장이인걸요?”
“……응?”
데오나가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까 더 이상하잖아요? 대장장이인 아빠가 용광로 앞에서 망치를 드시는 게 아니라, 도서관과 고서들을 살피셨다고요? 왜요?”
“…….”
왜냐니……. 그거야……. 방법을 찾으려고…….
“조심스럽게 접근을……, 성석이 여러 개인 것도 아니고 말이다. 실수를 하면 안 되니까, 그래서…….”
노베트가 끝을 흐리며 중얼거리다 끝내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데오나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전 버어어어얼써 다 만드신 줄 알았어요. 그래서 이미 아가씨께 전해 드렸나? 했다고요.”
“……데오나.”
노베트가 민망해하자, 데오나가 성석을 덥석 쥐었다.
그리고 주먹을 말아쥐고 있던 노베트의 손을 펼쳐 그의 손바닥 위로 성석을 올려 주었다.
“아빠. 아가씨께서 그러셨어요. 우리 아빠는 제국, 아니.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라고요.”
노베트의 눈동자가 설핏 흔들렸다.
“아가씨께서 다른 방법을 생각하셨다면 신전의 대신관님이나 공작 각하께 직접 부탁드렸을 거예요. 그런데 굳이 대장장이인 아빠에게 부탁한 이유가 뭘까요?”
데오나가 노베트의 손가락을 오므려 성석을 거머쥐게 했다.
“아빠를 믿으신 거예요. 아빠가 아빠다운 방법으로 해결해 낼 거라고.”
“나다운 방법…….”
데오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을 이어 갔다.
“당연히, 대장장이다운 방법이겠죠?”
대장장이다운 방법……!
해가 뜨기 전에 용광로를 달구고, 광물을 녹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펄떡펄떡 끓어오르는 쇳물을 틀에 넣어 굳힌 뒤, 열과 성을 다해 망치로 두드리는 일.
원하는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담금질을 반복하는 것.
잊고 있었다. 자신이 이 성석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 성석으로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데오나……!”
노베트가 벌떡 일어나 데오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네가 나보다 낫다! 훨씬 나아!”
빙그르르—! 노베트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자, 데오나가 꺅꺅 소리 내며 웃었다.
***
똑똑—.
테오스의 집무실. 노베트는 날이 밝자마자 공작저로 향했다.
“들어와.”
테오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노베트가 들어왔다.
노베트는 커다란 은회색 빛의 갑옷을 들고 있었다.
“앉지.”
“예, 각하.”
테오스가 책상을 돌아 나와 소파로 걸어왔다.
노베트는 테이블 위로 갑옷을 올려놓았다.
“각하. 허락을 받고자 왔습니다.”
“허락이라, 무엇에 대한 허락?”
“디크레드 영지를 다녀왔으면 합니다.”
“아델리아를 보러 가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노베트의 눈동자에 자신감이 어렸다. 그 눈동자에 담긴 뜻을 파악한 테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도를 찾은 모양이군.”
“예, 각하.”
“허락한다. 이동에 필요한 마차나 물품들을 준비하라 일러 놓지.”
“고맙습니다. 각하.”
노베트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그리고.”
노베트가 테이블 위 갑옷을 슬쩍 밀어 주었다.
“각하의 전용 갑옷이 완성되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자 테오스가 갑옷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품질은 일전에 확인했던 것 같은데.”
“말씀드렸듯이 이 갑옷은 각하 전용입니다.”
“전용?”
은회색의 갑옷이었다. 어깨와 가슴으로 이어지는 부분에 에스테르 공작가의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얼마 전 완성된 매그너스 기사단의 새로운 갑옷이었는데, 그때 확인했던 것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갑옷을 유심히 살펴보던 그때, 갑옷의 가슴 부위에서 작게 반짝이는 보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보석은 뭐지? 다이아몬드 같기도 하고.”
각도를 바꾸면 다양한 색깔을 띠는 것이, 특별한 보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노베트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 보석 때문에 각하 전용 갑옷이라 말씀드린 겁니다.”
노베트는 갑옷에 박아 둔 보석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아델리아 아가씨께서 그 보석을 각하의 갑옷에 붙여 달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테오스의 시선이 노베트로 향했다.
“아델리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