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노베트가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이게 무슨 보석입니까, 아가씨?
-프레이르 공녀와의 내기에서 이겨서 얻어 낸 보석이에요.
-……예?
노베트는 프레이르 가문의 보석이라는 소리에 놀랐다.
프레이르 가문이라면 에스테르 가문과는 적대 세력이 아니던가.
노베트가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말했다.
-……송구하오나, 어떤 보석인지 확실치도 않은 것을 각하의 갑옷에 달 수는 없습니다, 아가씨.
특히 프레이르 대공가에서 나온 거라고 하니, 노베트는 더욱 꺼림칙하다고 했다.
그러나 아델리아가 해맑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신전에서 확인도 받았어요. 절대 나쁜 기운이 있는 보석은 아니래요.
오히려 도움이 될 거라며, 아델리아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평범한 보석이라 생각했는데, 가공을 거치다 보니 특별한 능력을 지닌 보석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특별한 능력이라…….
테오스가 갑옷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걸리는 보석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래. ……아델리아가.”
그 아이가 내게 주는 선물이란 말이지.
“고생했네. 나가 봐도 좋다.”
“예, 각하.”
“……이건, 두고 가게. 나중에 돌려보낼 테니.”
테오스의 말에 노베트가 엷게 미소 지었다.
“예, 각하. 천천히 살펴보시고 보내 주셔도 됩니다.”
“그래.”
노베트가 소파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네고 집무실을 나갔다.
테오스는 책상 위에 쌓인 서류들을 잠시 잊고 소파에 느른히 기대었다.
조금 아래로 내려간 시야는 뿌연 안개에 가로막힌 듯 흐렸지만, 그 사이로 반짝이는 보석의 광채만큼은 놓치지 않았다.
아델리아가 준비한 선물이라는 말 때문일까.
2년간 보지 못했던 딸아이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선명하게 떠올랐다.
***
선선한 가을의 향기가 짙어진 어느 날.
예정되어 있던 피아노 수업이 취소되자, 여유가 생긴 아델리아는 3층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방 안은 이름 모를 꽃향기로 가득했다.
아델리아의 어머니, 이레네아의 방이었다.
이레네아의 방은 그녀가 결혼하고 떠난 뒤에도 예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하얀 벽돌을 켜켜이 쌓아 올린 난로, 그 위로 놓인 금 촛대와 작은 새 조각상들.
그리고 이레네아가 직접 그렸다는 풍경화와 장미가 조각된 시계가 벽면에 나란히 걸려 있었다.
따뜻하고 달콤한 방 안의 분위기가 몹시도 정겨웠다.
그래서 아델리아는 이레네아의 방에 머무는 것을 좋아했다.
지난 2년간, 틈이 날 때마다 올라와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기에는 딱 좋은 장소였다.
‘엄마 품이란 게,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비록, 엄마 품이란 걸 한 번도 겪어 본 적은 없지만.
아델리아는 창틀에 기대어 따스한 햇살 아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아델리아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따금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목 언저리에 묶어 놓은 하늘색 리본이 은빛 머리카락과 함께 하늘거렸다.
야호! 공녀님!
창문 아래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아델리아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쟤 또 왔어요, 누님.]
‘나도 보고 있어.’
정원과 백작저 대문을 이어 주는 누른빛의 돌길 위를 휴시안이 할 일 없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보란 듯 고개를 들어 손까지 흔드는 것을 보면,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쫓아낼 생각하지 말고, 곁에 두고 지켜봐. 공녀님도 날 제대로 봐.
자신을 제대로 봐 달라고 했었지.
웃기네.
‘내가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흥. 아델리아는 손을 휘적거리는 휴시안을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때.
“이곳에 있을 줄 알았지.”
메릴다가 간식거리를 챙겨 이레네아의 방으로 들어왔다.
“어? 할머니!”
창가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던 아델리아가 쪼로로 달려가 메릴다의 품에 안겼다.
메릴다는 간식이 든 쟁반을 협탁 위에 올려놓고 아델리아의 손을 잡았다.
메릴다가 다정하게 웃었다.
“이 방이 그리도 좋으니?”
아델리아가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머니. 여기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엄마 방이라서 그런가.”
그러자 메릴다가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델리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 아델이 이만큼이나 자란 걸 보며 분명 행복해하고 있을 거야.”
“그럴까요?”
“그러엄.”
헤헤, 아델리아가 쑥스럽다는 듯 웃다가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3층까지 올라오시면 무릎이 아프다고 하셨잖아요.”
그러자 메릴다가 아델리아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오늘은 우리 아델리아랑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이야기요?”
“응. 오늘이 아니면 한동안 기회가 없을 것 같더구나.”
“에이, 제가 당장 어딜 가는 것도 아닌데요.”
아델리아의 대답에 메릴다는 그저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메릴다가 아델리아의 어깨를 감싸 쥐고 벽난로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벽난로 위, 손바닥만 한 액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이레네아는 말이다.”
메릴다가 액자 속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어린 이레네아를 쓰다듬었다.
아델리아는 평소의 할머니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아델리아가 메릴다의 다음 이야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활발하고 고집도 세고 말보다는 행동이 먼저 앞서는 아이였단다.”
“예?”
메릴다가 아델리아의 콧등을 톡 두드리며 말했다.
“딱 너처럼 말이다.”
그러자 아델리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엄마가? 엄마가 나 같았다고?’
[누님이 어머님 같은 거죠.]
‘그거나, 그거나.’
아델리아가 신기하다는 듯 붉은 눈동자를 반짝거리자, 메릴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무뚝뚝하고 편식이 심한 아버지와, 외로움을 많이 타고 무릎이 안 좋은 어머니를 진심으로 걱정해 줄 줄 아는 착한 아이였어.”
그리고는 품에서 도톰한 편지를 하나 꺼내어 아델리아에게 건넸다.
아델리아가 그 편지를 조심스레 펼쳤다.
아……. 아델리아가 짧게 탄식했다.
‘엄마의 편지야.’
오래된 편지였다.
얼마나 많이 펼쳐보고 읽었는지. 접힌 부분들이 제법 너덜거렸지만, 편지지는 여전히 꽃향기를 머금고 있었다.
<어머니, 무릎은 좀 어떠세요? 약초를 조금 보내 드려요. 바르는 약도 같이 넣었어요.>
반듯하고 깔끔하며 힘이 느껴지는 필체였다.
<아버지께서 아직도 편식하신다면서요? 그래도 저희 영지 과일은 잘 드신다니 다행이에요. 입덧은 제가 하는데 꼭 아버지께서 입덧하는 사람 같아요. 이번에도 챙겨 넣었으니 모자라시면 말씀해 주세요. 꼭이에요, 아시겠죠?>
편지 속 이레네아는 부모님을 향한 걱정을 거두지 못했다.
<어머니, 아이 이름은 ‘아델리아’라고 지었어요. 제 보물이에요. 데릭도 사랑스럽지만, 이 아이도 무척 사랑스러울 거예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이 아이를 보물처럼 귀하게 여겨 주셨으면 해요.>
그리고 편지 속에는 태어나지 않은 아델리아의 이야기도 있었다.
‘보물이래…….’
엄마가 나더러 보물이라 했어.
어쩐지 코끝이 시큰거리고 목구멍이 옥죄어 왔다.
‘나, 태어나기도 전부터 되게 사랑받았었나 봐…….’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눈을 감았을 엄마를 생각하니,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델리아가 편지를 조심스레 접으며 메릴다를 쳐다보았다.
아델리아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역시, 저 때문에 돌아가신 걸까요……?”
붉어진 눈가와는 달리, 아델리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평생 가슴속에만 묻어 두었던 질문이었다.
함부로 꺼낼 수 없었고, 꺼낸 뒤에 감당해야 할 진실이 두려워 묻어 두기로 작정했던 이야기.
아델리아는 아빠나 오빠 앞에서는 꺼내 놓지 못했던 그 질문을, 할머니인 메릴다 앞에서 꺼내 놓았다.
“제가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엄마는, 살아, ……계셨을까요?”
“아델리아.”
메릴다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아델리아를 꼭 끌어안았다.
“그동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니? 세상에……. 아델리아.”
아델리아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메릴다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엄마를 떠올리며 슬펐던 적은 없었는데…….’
모르겠다. 왜 하필 지금, 이러한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인지.
추억이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엄마. 그저 자신을 낳아 준 사람. 초상화 하나 남기지 않아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
그래서 그리움이라는 감정조차 너무 막연하기만 했던 사람.
그저 그런 사람일 뿐이었는데…….
-이 아이 이름은 ‘아델리아’라고 지었어요. 제 보물이에요.
어째서 이 편지를 적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상상되는 걸까. 어째서 들어 본 적도 없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지……?
아델리아가 메릴다의 품에 안긴 채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메릴다는 조용히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아델리아가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메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델리아. 이레네아가 우리 곁을 떠난 것은 네 탓이 결코 아니란다.”
“…….”
메릴다의 말이 이어졌다.
“이레네아는, 원래부터 오래 살 수 없는 몸이었단다.”
그 말에 놀란 아델리아가 메릴다의 품에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