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메릴다가 발긋해진 아델리아의 눈가를 손끝으로 쓸어 주며 말을 이어 갔다.
“이레네아는 성년이 되기도 전에 오러가 발현되었단다.”
“……네?”
아델리아가 놀란 눈을 떴다.
‘지금 할머니께서, 엄마에게 오러가 있었다는 말을 하시는 거지?’
그것도 성년이 되기도 전에 발현한 오러가!
[그, 그런 것 같은데요?]
그때, 불현듯 테오스의 말이 떠올랐다.
-성년이 되기 전에 오러가 발현된 사람을 알고 있다.
아아.
아델리아가 속으로 탄식을 삼켰다.
‘……엄마였구나.’
아빠가 알고 있다던 그 사람이, 바로 엄마였어.
그 말을 하던 아빠의 표정, 눈빛, 숨 막히는 침묵까지.
그 모든 게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엄마였기 때문에……. 그 사람이 엄마여서, 그래서 그런 표정을 지으셨던 거야.’
아델리아는 심장을 옥죄는 고통에 가슴 위로 주먹을 말아 올렸다.
“아델리아?”
아델리아가 인상을 찌푸리자, 메릴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델리아를 살폈다.
“괜찮아요…….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그래서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아델리아…….”
메릴다가 눈꼬리를 내리며 아델리아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서 소파로 걸어갔다.
그녀는 아델리아를 소파에 앉히고 자신도 옆에 앉으며 말을 이어 갔다.
“테오스와 이레네아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단다.”
두 사람은 소꿉친구이자 동시에 연인이었다.
테오스가 기사가 되어 수도로 향했을 때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이로 발전한 뒤였다.
그러다 이레네아에게 오러가 발현되었다.
수도에 있던 테오스는 그 즉시 디크레드 영지로 왔다.
-이레네아가 성년이 되는 날, 결혼식을 올렸으면 합니다.
-자네 마음은 알겠다만, 이레네아는……. 오래 살지 못할 걸세.
오벨르는 시한부인 딸을 에스테르 공작가의 공작 부인으로 보낼 수 없다며 거절했다.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테오스는 단호했다. 시한부가 된 이레네아라도 상관없다고 했다.
-결혼식이 끝나면 곧장 수도로 옮길까 합니다. 오러에 관한 거라면 수도에서 알아보는 것이 더 나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오벨르는 쉽사리 허락해 줄 수 없었다.
자신의 딸이 걱정이기도 했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테오스도 걱정이 되었던 까닭이다.
“그랬더니, 네 아버지가 무릎까지 꿇었단다.”
예? 뭘 꿇어요? 무릎요?!
“우리 아빠가요……?”
그 무뚝뚝한 사람이요?
아델리아가 입술을 뻥긋거리자, 메릴다가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네 아버지. 에스테르 공작이 말이다.”
세상에…….
충격의 연속이었다.
‘엄마가 나처럼 성년이 되기 전에 오러가 발현되었다는 것도 충격인데…….’
아빠가 엄마와 결혼하기 위해 무릎까지 꿇었다고?
정강이를 차서 억지로 꿇리려 해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아빠가?
아델리아가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자, 메릴다가 말을 이어 갔다.
“결국 우리는 허락할 수밖에 없었단다. 물론, 할아버지가 뒷목을 여러 차례 잡긴 했지만.”
단 한 번도 부모의 뜻을 거역한 적 없던 이레네아도 그 순간만큼은 고집을 부렸다.
-테오스를 따라갈래요. 숨이 붙어 있는 한, 단 하루라도 더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메릴다가 아델리아의 손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질 않니.”
저택의 침실에서 하루하루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 행복을 찾아가겠다는 딸아이를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레네아의 선택은 결국 옳았어.”
메릴다가 아델리아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데릭과 아델리아, 너희가 태어났으니 말이다.”
환하게 미소 짓는 메릴다의 표정에서는 슬픔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조금,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메릴다가 방을 빠져나간 뒤, 아델리아는 늦은 밤이 될 때까지 이레네아의 방에 머물렀다.
연노란색 페인트가 칠해진 창틀에 머리를 기대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을 촘촘히 채운 별들이 아롱거렸다.
‘엄마 이야기를 해서 그런가…….’
보고 싶다, 아빠가.
이제는 어쩐지, 아빠 앞에서도 엄마 이야기를 당당히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델리아의 입가로 미소가 고였다.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별똥별의 곡선을 닮은 은은한 미소가.
***
며칠 뒤 오후.
아델리아는 오전 수업을 끝내고 비렌체 거리의 밀워드 주점으로 향했다. 휴시안이 마차를 몰았고 데프가 호위로 그 뒤를 따랐다.
아델리아가 후드를 고쳐 쓰며 주점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주점의 주인 렌시가 빠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아가씨, 어서 오세요! 그렇지 않아도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잘 지내셨죠?”
“어휴, 그럼요!”
아델리아는 주점의 뒷문으로 조심스레 들어왔다. 렌시와 인사를 주고받은 뒤, 복도 너머 북적이는 홀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사람이 많네요?”
그러자 렌시가 아델리아의 시선을 따라, 홀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상단이 들어오는 날이잖아요. 당분간은 디크레드 영지의 주점 대부분이 이럴 거예요.”
“그렇군요.”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 사람, 어디에 있어요?”
“2층에요. 끝에서 세 번째 방이요.”
“아, 세 번째.”
“네, 아가씨. 조심해서 올라가셔요.”
“그럴게요.”
아델리아는 홀의 반대편에 있는 계단을 올랐다. 계단 끝에 오르자, 기다란 복도가 시야로 들어왔다.
‘세 번째.’
천천히 복도를 걸어 복도 끝에서 세 번째 방 앞에 섰다.
-똑똑.
아델리아가 노크 후에 문을 열었다. 그러자 의자에 앉아 있던 붉은 머리카락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바라크였다.
“오랜만이야, 바라크.”
아델리아가 후드를 뒤로 넘기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호위는?”
“밖에.”
바라크는 방으로 들어오는 아델리아를 잠시 바라보다 의자에 앉았다.
‘1년 만인가.’
1년 전, 카를리나의 서신을 가지고 온 바라크와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안 본 사이에 부쩍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저 부족은 어떻게 된 게 눈 깜빡하면 자라 있어?
투기장에서 보았던 사내아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조만간에 오빠랑 비슷해지겠는데?’
아델리아가 감탄을 넘어 경이롭다는 표정으로 바라크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옅은 갈색이었던 피부색도 더욱 짙어졌어.’
고생이 많았던 모양이네.
아델리아가 바라크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해맑게 웃었다.
“우선 축하부터 해야지?”
“축하는 무슨.”
“축하할 일이지!”
아델리아가 바라크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그리젤 길드의 길드장이 된 걸 축하해!”
결국, 바라크는 그리젤 길드장을 처리하고 스스로 길드장이 되었다. 과거에 그러했듯이 말이다.
물론, 그 과정은 과거와 달랐다. 무차별적인 살육이 없었고 그로 인해 바라크가 상처를 입는 일도 없었다.
아델리아는 바라크의 황금색 두 눈이 모두 온전한 것을 바라보며 또 싱글거렸다.
‘눈도 여전히 깨끗하고.’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며 자잘하게 생겼던 흉터도 지금은 없다.
‘안전한 곳에서 차근차근 기초를 다져 얻게 된 자리라 더 의미 있어.’
만약, 바라크가 로즈힐 후작가의 교육과 훈련을 견디지 못해 뛰쳐나갔다면 아델리아도 더는 붙잡지 않았을 것이다.
할 만큼 했다고, 역시 야생에서 거칠게 자라 복수하는 것이 저 아이의 운명이었던 모양이라고.
‘어차피 강제로 끌고 온다고 해서 말을 들을 아이도 아니고.’
그러나 내심 바라크가 견뎌 내길 응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바라크는 견뎌 냈고 이루어 냈다.
그게 어쩐지, 무척이나 기특했다.
흐뭇하게 바라크를 바라보고 있자니, 바라크가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이런 촌구석에 있으면서도 들을 건 다 듣나 보네.”
“디크레드를 촌구석이라고 부르다니. 후작가에 있으면서 보는 눈도 높아졌나 봐?”
“…….”
아델리아가 키득거렸다.
“그래, 어때? 후작가를 떠나 당당히 길드장이 되신 소감은?”
그러자 바라크의 시선이 다시 돌아왔다. 황금빛 눈동자가 아델리아를 가만히 응시했다.
길드장이 된 소감?
나쁘지 않았다.
물론, 후작가에서의 교육은 고되고 어려웠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과 생각을 모두 뜯어고치게 되는 계기이자, 기회였던 시간이었다.
덕분에 첫 번째 목표로 정했던 그리젤 길드장의 목숨을 직접 거두었으니, 복수 역시 절반은 성공했다 할 수 있었다.
-사, 살려 줘! 나도, 나, 나도 의뢰를 받았을 뿐이라고!
길드장의 처절한 외침에도 바라크의 검은 자비가 없었다.
바라크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밤, 부족의 터전이 불길에 휩싸이고 무지막지한 검날 아래 처절하게 울리던 부족 사람들의 비명을.
매일 밤 꾸던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게 된 것은, 그리젤 길드장을 처리한 후부터였다.
“이걸 위해 2년간 후작가에서 교육받게 한 건가?”
“이걸 위해? 이거라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너를 위해서라는 건 확실해.”
“…….”
“하지만 알지? 길드 하나로는 만족하긴 이르다는 거.”
“알아.”
바라크가 짧게 대답했다.
그리젤 길드장을 처리하며 리티카야 부족을 도륙하라 의뢰한 자에 대한 실마리도 얻었다.
“내가 끌려갔던 투기장 주인과 연관 있는 사람이라는 건 알아냈어. 일단 투기장 주인의 주변인들부터 뒤집어 보려고.”
그래, 투기장 주인인 모티반스와 연관이 없을 수 없지.
‘벌써 길드를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하는지 깨우친 모양인데.’
아델리아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바라크가 물었다.
“그래서, 그 투기장 주인은 언제 넘겨줄 건데? 넘겨줘야 정보를 빼내든가 하지.”
“조금이면 돼. 이제 거의 다 끝났어.”
아델리아가 천진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마 내가 에스테르 영지로 돌아가게 되면 마무리될 것 같아. 그때까지 길드를 안정시키는 일에 집중해.”
아델리아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앉았다. 그리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바라크를 응시했다.
“이제 넌 투기장에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 노예가 아니야.”
“…….”
“넌, 그리젤 길드의 우두머리야. 눈짓 하나에 사람 목숨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그러니까 당당하게 굴어.”
네가 모은 정보들은 제국을 뒤흔들 네 무기이자, 방패가 될 테니까. 그러니까 자신이 앉은 자리의 무게를 잊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방심은 금물이야. 길드를 손에 넣었다고 끝은 아니니까.’
바라크는 한동안 아델리아를 쳐다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물어 봤자, 이번에도 대답해 주지 않을 거고.”
“…….”
“이젠 내가 조금은 쓸모 있게 된 건가?”
그러자 아델리아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야말로,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해? 네 쓸모를 계속 증명하려는 이유가 뭐야?”
그녀의 물음에 바라크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날 구해 줬잖아.”
“…….”
“리티카야 부족은 절대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아. 부족의 명맥은 끊어졌지만, 정신만큼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바라크의 시선이 단단했다.
‘짜식, 여전하네.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으려 달려드는 걸 보면.’
아델리아가 괜스레 뿌듯해져 바라크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된 거냐고.”
바라크의 질문에 아델리아가 씨익, 웃었다.
“당연하지. 이제 넌, 제국 내 힘깨나 쓴다는 길드의 길드장이니까. 이제 네 앞으로 제국의 모든 정보가 흘러 들어올 거야. 그리고 나는 네가 가진 그 정보들이 필요해.”
아델리아는 그 정보들이 제국의 판도를 뒤집어 놓을 중요한 열쇠가 될 거라고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아. 물론, 정당한 값을 치를 거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굳이 값을 치르지 않아도…….”
“아니, 난 적절한 보수를 지급할 거야. 그리고 넌 그 골드를 이용해서.”
아델리아의 붉은 눈동자가 반질거렸다.
“제국 최고의 길드로 키워 내. 대륙 최고면 더 좋고.”
“…….”
바라크는 아델리아의 눈빛을 보며 짧게 숨을 들이켰다.
어쩐지, 작은 악마와 영혼을 건 계약이라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